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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남

통영 한산대첩길(삼칭이길)

by phd100 2021. 12. 9.

 

 

한산대첩길(삼칭이길)

경남 통영시 산양읍 영운리 삼칭이 바위길은 통영 영리 마을 해안선을 따라 나 있는 해안도로이다. 구간은 총 4km로 걷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자전거도로와 산책로가 분리되어 있어 안전하고 편리하다.

 

한산대첩길은 해안일주도로가 발달한 미륵도 중부의 동쪽 해변에 조성된 도보여행길 겸 자전거여행길을 말한다.

이 길은 통영미륵도의 남쪽 해안길로, 도남동 충무 마리나리조트앞에서 시작해 산양읍 영운리까지 이어진다. 그 길은 환상의 자전거 도로와 통영등대낚시 공원이 있어 더더욱 낭만적인 해안길이다.

 

이충무공이 한산대첩을 거뒀던 바다가 그리 멀지 않으니 도보여행자들은 이 길을 걸으며 낭만에 젖기도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도 자연히 되새겨 볼 수 있고 멀리 동쪽바다에는 가끔씩 한산도로 들어가는 유람선도 볼 수 있다.

 

한산대첩길 시작은 산양 일주도로의 영운리에서 영운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고, 반대쪽은 마리나리조트에서 시작된다.(대부분 사람들은 이곳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보통은 한산대첩길을 산양읍 영운리에서 시작하는 해안길을 삼칭이길이라 한다. 그래서 설명도 이곳에서 시작한다.

 

지명 유래를 보자면, 미륵도 남쪽 해안에 위치한 이 지역은 옛 통제영의 ‘삼천진’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 후기 삼천진이 설치된 포구였으며 통영 토박이들은 삼천진리를 ‘삼칭이’라고 불렀다.

 

삼거리에서 바다로 빠지는 영운천변 길을 가다가 ‘금정수산’이라는 사유지를 통과하면 산책로의 목재 데크가 시작된다. 금정수산 맞은편은 영운리포구(일운마을)이고 그 뒤로는 미륵산 정상이 올려다 보인다.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는 관광객을 싣고 미륵산을 열심히 오르락내리락한다.

 

한산대첩길은 초입부터 북드럼바위, 돛단여, 장승여 등암초와 바위들이 시시각각 모습을 내비쳐 도보여행자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그중 삼칭이 복바위는 재미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선녀 3명이 옥황상제의 근위병 3명과 사랑을 나누다 발각되어 천둥번개와 벼락을 맞고 그 자리에서 돌로 변하여 지금의 형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 해안도로의 시작 지점은 말끔하게 목재 데크로 단장된 길이다. 얼마 가지 않아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여유로이 페달을 밟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 길은 환상의 자전거 하이킹 도로로도 유명하다.

가다보면 독특한 해상구조물을 마주하게 되는데, 바로 통영 등대낚시공원이다. 산책로에서 등대가 세워져 있는 바다로 길게 교량이 뻗어 있다. 교량 끝 부분에 낚시체험장과 낚시 데크가 있어 꾼들은 어렵지 않게 바다 위로 이동해서 대물을 만나는 꿈을 꾼다.

 

한산대첩로 중간에는 휴게소와 자전거 대여소가 있다. 땀을 많이 흘렸다면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하나 베어 물고 등대낚시공원의 이색적인 풍경을 감상해도 좋고 자전거 페달을 맘껏 밟아보고 싶은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동심으로 돌아가도 좋다.

 

길옆에 위치한 통영 공설해수욕장 해수욕객들을 위한 샤워장과 화장실 건물, 통영윈드서핑협회 사무실 건물을 지나면서부터는 동쪽 바다 건너편을 바라보며 한산도의 위치를 가늠해본다.

이 바다는 한산도 해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라 충무공 이순신의 공을 떠올리지 않고 걸을 수 없다. 아직도 입에서 불을 뿜어낼 듯한 거북 등대가 서 있는 한산도 앞바다는 바로 한산대첩이 벌어졌던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통영 공설해수욕장에서부터 충무 마리나리조트에 이르는 수륙해안산책로 구간은 영운리삼거리에서부터 수륙마을에 이르는 구간보다 도보여행객들이 더 자주 눈에 띈다.

리조트 투숙객들이 운동 삼아 많이 나오는 것이다. 리조트 앞마당에 닿으면 연필 형상으로 유명한 등대와 요트 계류장, 유람선 등이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이 다시금 여행자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도보여행에 이어 요트여행을 즐기는 것도 바다의 고장인 통영시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 중 하나이다. 충무 마리나리조트에서는 요트를 타고 한산도를 찾아가는 체험 여행을 할 수 있다. 일몰 세일요트 투어 상품의 경우 한산도 제승당 앞에까지 갔다가 마리나리조트로 돌아오면 약 2시간이 소요된다.

 

 

<한산대첩 비화(秘話)>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견내량에서 왜적을 격파한 전과보고서’(《見乃梁破倭兵狀》)에 보면 한산대첩 해전은 이렇게 시작되어있다.

 

「7일, 동풍이 세차게 불어 항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통영의 당포(唐浦. 산양읍 삼덕리 당개)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정박하고, 군사들이 저녁 식사를 위해 나무하고 물을 긷고 있는데,

산으로 피난했던 이곳 섬(同島:미륵도)의 목자(牧子) 김천손(金千孫)이 신(臣) 등의 우리 수군들을 바라보고 급히 달려와서 고하기를 “적의 대․중․소선을 합하여 70여 척이 오늘 하오 2시경(未時)에 영등포 앞바다에서 거제와 통영의 경계인 견내량(지금의 거제대교)에 와서 대어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이순신은 여러 장수에게 지시하고, 8일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배를 띄어 출진했습니다.」(...避亂登山 同島牧子金千孫 望見臣等舟師 奔遑進告內 賊船大中小幷七十餘隻...)라고 했다.

 

이러한 왜적의 동태와 병력규모까지를 소상하게 제보한 김천손의 첩보를 통해 우리 수군은 이미 적을 꿰뚫어 보면서 작전을 구사하였으며, 왜적은 결국 유인책에 말려 패전하게 된 것이다. 병법에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던가.

 

한산해전에 패한 적장 와키자카(脇坂安治)는 그 한 달 전인 6월 6일 그의 군사 1,600명으로 전라순찰사 이광(李洸)이 이끌었던 조선의 전라․경상․충청도의 연합군 5만명을 격파한 왜군 최고의 맹장이었다.

그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패장으로 전락하게 된 연유는 조선 수군을 얕본 자만심과 지나친 공명심 탓도 있겠지마는 조선 수군을 맞아 싸우기도 전에 이미 첩보전에서부터 패전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산대첩의 첫 단추를 끼운 목동 김천손(金千孫)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연 김천손은 누구인가?

 

이를 두고 그동안 제법 논란이 있긴 있었다. 임란사를 연구하는 학계에서 조차도 김천손은 거제도의 목동(牧童)이었다는 설과 거제 앞바다에 있는 화도(火島)의 목동이었다는 주장, 그리고 어부(漁夫)로 소개하기도 했었다.

 

김천손의 보고하는 과정 또한 구구하다. ‘견내량 근방에서 잠복근무하다가 적을 보고 용남면에서 배를 타고 당포로 왔다’는 설과 ‘견내량에 가까운 용남면 쪽의 산꼭대기(삼봉산?)에 올라 적정을 살핀 다음... 몇 시간 동안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줄달음을 쳐서 이를 아군에게 보고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이렇게 소설 같은 주장을 펴기도 한다. ‘김천손이 견내량에 왜선이 도착한 것을 (현지에서) 확인한 후... 험난한 산야와 복잡한 해안 포구를 달려 현재의 통영대교 아래인 판데목을 건너 미륵도 산양읍 삼덕리 당포마을까지 내달린다.

그 거리가 약 20킬로미터, 달린 시간만 3~4시간은 되었으니 얼마나 힘들여 달려왔는가는 짐작이 간다. 마라톤전투에서 아테네까지 달려 승전보를 전하고 죽은 페이디피데스 만 기릴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짚신이 몇 켤레가 닳도록 달렸던 김천손을 기념하기 위한 「당포 김천손 달리기 대회」를 이제라도 개최할 것을 제안하면 어떨지...

 

더욱이 통영 향토사의 정론인 《통영시지(統營市誌)》(1999년)에서 조차도 ‘목동(牧童) 김천손(金千孫)은 견내량에 왜선이 오후 2시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당일 20㎞의 거리를 약 4시간 만에 주파했으니 얼마나 힘들여 달려왔겠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했다.(제5절 한산해전편 137쪽)

 

그러나 장계(狀啓. 보고문)에서 ‘산으로 피난했던 이곳 섬(同島)의 목자(牧子) 김천손이 신 등의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 급히 달려와서 고하기를...’ 했으니, ‘이곳 섬’(同島)은 당포가 위치해 있는 섬 즉 미륵도(彌勒島)를 칭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산으로 피란했다가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 달려왔다고 했으니, 왜적이 내침한 북동쪽의 견내량과 그 반대편의 우리 수군이 도착한 남서쪽의 당포(산양읍 삼덕리)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미륵도의 최고봉인 미륵산(彌勒山)으로 피란하였음이 분명하다.

 

이곳 미륵산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왜적의 침략을 망보던 ‘미륵산봉수대’(경남도지정 기념물 제210호)가 설치되어 있어 망군(望軍)과 봉수군(烽燧軍)이 상주했을 뿐 아니라, 그 남서쪽 산기슭의 산양읍 남평리의 야시골(冶所谷)에는 미륵산목장(彌勒山牧場)이 있었으며 그 아래 ‘딘전’ 또한 옛 당포진영의 둔전(屯田)이었던 곳이다.

 

그리고 목자(牧子) 김천손은 고기를 잡는 어부(漁夫)도 소먹이는 아이인 목동(牧童)도 아니며, 당포진영에 속한 이곳 미륵도의 목장에서 말과 소를 관리하던 어엿한 목자(牧子)였음이 분명하다. 조선후기의 문헌《동여비고(東與備攷)》(1682년)에는 이곳 미륵산의 남쪽 기슭에 ‘미륵산목장’(弥勒山牧)이 있었음을 고증해주고 있다.

 

즉 미륵산목장의 목자 김천손이 미륵산으로 피란했다가 산정에서 오후 2시경에 왜적선 70여척이 거제도 방면에서 견내량으로 대거 내침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며, 곧 이어 날이 저무는 해거름(오후 6시경)에 우리 수군전선들이 당포해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급히 달려 내려와 이러한 적정을 상세하게 보고한 것으로 해석되어진다.

 

결국 이렇게 시작된 한산해전을 청사에 빛나는 승첩으로 이끈 것은 우세한 전력으로 우리수군 연합함대의 주축을 이루었던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위대한 활약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수훈은 충효사상으로 일관된 공(公)의 숭고한 일생의 발자취와 함께 민족혼을 상징하는 영원한 구심점으로 길이 선양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충무공의 위대한 전공과 함께 당시 연합함대를 결성했던 여러 장수들과 휘하 삼도수군병사들의 용전분투 그리고 연해안 향토민들의 활약 또한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당시 대형 전선들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는 리아스식 해안의 복잡한 지리적 특성을 비롯하여 조류와 간만 및 해풍에 대한 경험과 전문성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니, 이곳 바다에 익숙한 지역민들의 역할도 매우 컸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수군 또는 의병으로 참전했다가 산화한 수없이 많은 민초들은 물론 적정을 살피고 이를 소상히 알린 김천손의 첩보 등은 수군연합함대로 하여금 한산해전을 전무후무의 대승첩으로 이끈 또 다른 가장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였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하겠다.

 

<한산대첩>

조선 선조 25년(1592년) 5월 29일(양력 7월 8일)에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6월 10일(양력 7월 18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西進하고 있었다.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熊川)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5일(양력 8월 11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다음 날인 6일에 이억기와 더불어 48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다.

 

7월 7일(양력 8월 13일) 저녁, 조선 함대는 통영 미륵도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서 일본의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사고가 발생했는데 7월 7일(양력 8월 13일) 이순신 휘하의 수졸 황옥현이 도주했다. 이순신은 황옥현을 잡아들여 군무이탈 혐의로 참수형에 처한 후 그 수급을 효수했다.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을 보면 한산도해전 당시 일본 수군은 전선 73척 : 아다케부네 36척, 세키부네 24척, 고바야부네 13척이며, 아다케부네는 전투원 60명, 노꾼 80명, 대포 3문, 철포병 30명이며,

세키부네는 전투원 30명 노꾼 40명 대포 1문 철포병 20명, 고바야부네는 전투원 10명, 노꾼 20명, 철포병 8명이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7110명이 선을 넘을 수 없었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 길이 약 4km에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는 데다,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운신하고 전투를 벌이기에 좁은 해협이었다.

반면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6척 만으로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격멸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다.

 

6척의 조선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그들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전 조선 함대가 배를 돌려 학익진(鶴翼陣)을 펼쳤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한 것을 비롯해 왜선 47척을 불살라 격침시켰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거제,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 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일본군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도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일본의 전선들은 판옥선에 비해 급격한 회전이 어려웠고(따라서 후방은 비워져 있었지만, 쉽게 도망갈 수 없었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함대의 정면에 배치된 함선은 많은 피해가 우려되었지만,

조선 함대는 압도적인 화포의 화력으로 이 불리한 점을 극복하였다.

 

격침되거나 나포된 일본 함선은 모두 총 59척이었고, 병력 4000 ~ 5000명 중 상당수가 전사했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자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견내량파왜병장》에는 400명, 《와키자카기》에는 200여 명)은 군량이 없어 13일간 미역을 먹으며 견내량과 무인도에서 머무르다가 뗏목으로 겨우 탈출하였다. 마나베 사마노조는 이때 자신의 배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하였다.

 

이 전투는 행주대첩과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3대 대첩의 하나로 불리며,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한산도 대첩은 일본 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해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다.

나아가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위협을 주어 불리했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구한말 고종 황제의 미국인 고문 호머 헐버트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 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

 

한산도 해전 다음 날 벌어진 안골포(安骨浦, 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서 벌어진 해전도 이순신은 승리로 이끌었고, 이순신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이억기 ·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의 관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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