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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북

고령 반룡사

by phd100 2023. 5. 12.

 

반룡사(盤龍寺)

  경북 고령군 쌍림면 미숭산(美崇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0대 애장왕 당시 창건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802년(애장왕 3)에 해인사와 함께 창건된 절로서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하였고, 고려 공민왕 때에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원나라 세조가 이 절에 내린 방문(榜文)의 전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방문에 따르면 일본의 정벌을 위해서 경상도 땅에 왔던 원나라 군사들이 절을 짓밟고 시끄럽게 하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만약 절을 짓밟거나 소란을 피우는 자는 법에 의해서 처벌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교종에 속하였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진된 것을 사명(四溟)이 중건하였다. 그 뒤 화재로 인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육당(六堂)과 요사채가 전소되었으나,

1764년(영조 40)에 현감 윤심협(尹心協)이 대웅전과 동·서 요사채, 만세루(萬歲樓) 등을 중건하였으며, 1930년경 중수하였고, 1996년 대적광전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반룡사는 고려후기에는 대사찰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고려 불교계는 무인정권이 성립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기존의 불교계에 대한 반성운동으로 신앙결사가 다양하게 전개된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보조(普照)국사 지눌(知訥)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원묘(圓妙)국사 요세(了世)의 백련결사(白蓮結社)라 할 수 있다.

 

  고령지역에서도 반룡사를 중심으로 화엄종 계통의 신앙결사가 전개되었다. 흥왕사의 승려이자 이인로(李仁老)의 대숙(大叔)인 승통 요일(寥一)이 명종 27년(1197) 고령으로 오면서 반룡사에서 신앙결사를 개창하였다. 요일이 반룡사의 신앙결사를 개창한 목적은 '불교를 공부하는 자들이 시류에 빠져 자포자기 하는 것을 민망히 여겨 이를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 일종의 불교 개혁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충렬왕 즉위년(1274)에 고려와 원나라의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당시 원나라 세조가 사원의 침탈을 방지하라는 방문(榜文)을 영남지역의 중심사찰이었던 반룡사에 붙였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내용을 보면 '원나라 세조 때의 방문이 있는데…(중략) 만일 절 안을 짓밟고 시끄럽게 굴어 불안하게 하면 소재 관청에서 잡아들여서 법에 의하여 처단할 것을 방을 붙여 보게 하라. 이 방을 반룡사에 붙여서 여러사람에게 보여 알게 하라'고 기록돼 있다.

 

고려 후기 반룡사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이 외에 이인로, 박효수, 유방선 등 명현들이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

 

  반룡사로 들어서면 절 입구에 부도탑 4기가 가지런히 서서 불자를 맞이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즉 둥근 부도탑신을 받치는 돌은 모두 엎드린 연꽃과 위로 펴진 연꽃을 형상화한 복련석과 앙련석으로 마련돼 있고 지붕돌은 팔각형, 팔작지붕 모양, 꽃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 반룡사의 다층석탑은 경북도 유형문화재 117호이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석탑과 달리 납작한 옥개석(지붕돌)만 층층이 포개어 놓은 모양이다. 재질도 보통의 석탑처럼 화강암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흑색의 점판암을 사용했다. 이런 모양의 탑은 통일신라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고려에 이르기까지 유행했다. 탑은 모두 11층으로 되어 있으며 이를 받치는 앙련석과 복련석이 2매 있고 그 아래의 기단은 화강석을 사용했다. 반룡사의 다층석탑은 가까운 해인사 원당암에 있는 다층석탑(보물 제518호)과 형태가 흡사하다. 인근의 동종(경북도 유형문화재 288호) 또한 눈길을 끈다. 반룡사에서 제작된 것으로 전체 높이 50㎝ 정도 되는 종이다. 특히 이 종의 몸통에는 70여자의 한자가 양각돼 있다. 이 명문을 통해 영조 29년(1753) 3월에 고령 반룡사에서 직접 제작된 무게 100근의 중종이라는 사실과 이 종을 만드는데 참여한 희선 등의 승려와 김만세와 같은 신도 등의 이름과 역할 등이 함께 밝혀지기도 했다.

 

 

<반룡사 뒷산 미숭산>

  반룡사 뒤편에 우뚝 솟은 미숭산은 휴일 가족단위 산행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산 정상부에는 대가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적들이 있다. 이 산에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버리지 않았던 이미숭(李美崇) 장군에 대한 전설이 전해진다. 장군은 조선이 건국되자 상원산(上元山)에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하여 후일 고려 재건을 도모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스스로 절벽에 몸을 던져 순절을 하자 휘하 장군들도 잇따라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 후 세인들이 그의 충의를 추모하기 위해 상원산을 미숭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미숭산성에는 갑옷과 칼을 묻었다는 갑검릉(甲劒陵), 말을 달리던 주마대(走馬臺), 개성(開城)을 멀리 바라보았다는 망향대(望鄕臺), 병사들의 조련장인 연병장(練兵場), 순사암(殉死巖) 등 유서가 서린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대가야의 철기문화와 관련된 제철유적이 반룡사 인근 미숭산 일대를 중심으로 경남 합천군 야로면과 경북 고령군 쌍림면 용리 등의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용리 지역의 제철유적은 반룡사의 서쪽 미숭산의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 지표조사를 통해 철광석을 녹이기 위한 제련로의 노벽(爐壁)편과 철생산 과정에서 생성되는 불순물인 슬러지(철재:鐵滓), 철의 원료가 되는 철광석 등이 채집됐다.

 

  노벽편 가운데는 국내 고대 철생산 유적의 송풍관과 달리 일본의 전통 방법에 보이는 소형의 송풍구(送風口)를 사용하였음이 주목을 받고 있다. 철의 왕국 대가야의 각종 철제품들이 이곳 반룡사가 있는 용리에서 만들어져 가까이는 삼국 및 가야 여러나라와 멀리는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되기도 했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과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칠성각 ·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과 좌우보처보살 · 목조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목조지장보살상도 2018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이 절의 문화재로는 석가여래사리탑이라고 전해지는 다층석탑 1기와 동종이 있다.

1979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된 반룡사 다층석탑은 일명 수마노석탑이라고도 하며, 2단의 화강암지대석 위에 세워진 높이 2.4m의 방형탑이다.

 

  반룡사 동종은 1995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서, 1753년(영조 29)의 제작연도와 ‘중종(中鍾)’이라는 명문, 그리고 육자진언(六字眞言)의 범어가 몸체에 새겨져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며 전체 높이는 50㎝이다.

현재 수마노석탑과 반룡사동종은 대가야박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이 절의 뒤편에는 망향대 · 갑검릉(甲劍陵) · 주마대(走馬臺) · 연병장 · 장군수 등이 있는 미숭산성(美崇山城)이 있다.

 

 

반룡사가 있는 미숭산에는 앞서 기술한 바와같이 다음과 같은 이미숭(李美崇) 장군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미숭 장군은 조선이 건국되자 상원산(上元山)에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하여 고려 재건을 위해 후일을 도모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절벽에 몸을 던져 순절을 하였는데,

휘하 장군들도 잇따라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후 세인들이 그의 충의를 추모하기 위해 상원산을 미숭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미숭산성에는 갑옷과 칼을 묻었다는 갑검릉(甲劒陵), 말을 달리던 주마대(走馬臺), 개성(開城)을 멀리 바라보았다는 망향대(望鄕臺), 병사들의 조련장인 연병장(練兵場), 순사암(殉死巖) 등 유서가 서린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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