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정사(鳳停寺)
경북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天燈山)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능인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2018년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 아름다운 산사 7곳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 7개 사찰은 안동 봉정사, 영주 부석사, 양산 통도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산사의 아름다움을 잘 느낄 수 있는 세계적인 도량이 바로 봉정사이다.
682년(신문왕 2) 의상(義湘)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왔으나, 1972년 극락전에서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672년(문무왕 12)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천등굴에서 수학하던 능인 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앉은 곳(머무를 停)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또 일설에는 능인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 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혔고, 청마(靑馬)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길을 인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천등산 봉정사”라 하였다고도 한다.
창건 후 능인은 이 절에다 화엄강당(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전법(傳法)하였다 한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남은 부속암자로는 한국의 10대 정원인 아름다운 영산암(靈山庵)과 오른쪽 골짜기 부근의 지조암(智照庵)이 있다.(이 중 영산암은 관광 필수 코스)
1566년(명종21) 퇴계 이황(李滉)이 시를 지어 절의 동쪽에 있는 낙수대(落水臺)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에서도 계속 존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조선시대 초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였고, 500여 결(結)의 논밭을 지녔으며, 당우도 전체 75칸이나 되었던 대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1999년 4월 21일에 봉정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 절에는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봉정사 대웅전, 1967년 보물로 지정된 봉정사 화엄강당과 봉정사 고금당 등의 지정문화재와 무량해회(無量海會: 僧房) · 만세루(萬歲樓) · 우화루(雨花樓) · 요사채 등 21동의 건물이 있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서 높이 3.35m의 봉정사 삼층석탑이 있고, 경판고(經板庫)에는 대장경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봉정사의 창건주가 의상(義相, 625∼702)대사라는 설과 능인(能仁)대사라는 설이 엇갈릴 만큼 전하는 기록이 미미하다. 능인은 의상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의상이 인근 영주(榮州) 땅에 부석사를 개창 한 이래 의상계 화엄학파들이 주도적으로 이 일대 가람들을 경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능인이 627년 창건했다고 하더라도 당시에는 암자 수준의 작은 가람이었을 것이다.
가람이 자리잡은 천등산 기슭은 급경사지여서 깊이보다는 폭이 넓도록 대지를 조성하였다. 가람은 동쪽에 대웅전, 서쪽에 극락전이 병렬로 놓인 구성으로, 누각 강당인 덕휘루(德輝樓)와 연결된, 복도와 같이 긴 앞마당이 이 두 영역을 통합하고 있다.
극락전 앞에는 우화루(雨花樓)라는 7칸의 긴 행랑이 마당을 감싸고 있고,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우화루로 연결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도 3칸 진여문(眞如門)이 놓여 마당을 폐쇄하였다.
극락전 앞면에도 대웅전과 같이 쪽마루가 부설되었고, 고금당의 앞뒤에도 쪽마루가 있어서 극락전은 산중 수도원 같은 승려들의 생활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앞 쪽마루가 있는 절로는 강화 정수사가 있다)
☆ 극락전(極樂殿)
깊은 산속의 절이었던 봉정사(鳳停寺)가 대웅전 보다 세상의 주목을 더 받는 것은 극락전이다.
1972년 극락전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1363년에 지붕을 중수했던 사실을 담은 묵서(墨書)가 발견되면서부터이다. 목조건물을 대략 150년마다 중수한다고 가정하면, 극락전은 적어도 1200년대 초반에 건립된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때부터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이 가지고 있던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라는 명성은 봉정사 극락전으로 바뀐다. 원래는 대장전(大藏殿: 지금의 지장전 의미)이라 불렀으나, 뒤에 극락전(極樂殿)이라 개칭한 것 같다.
극락전은 옆면의 기둥 배열이 독특하다. 7m 정도 길이에 기둥을 5개나 세웠다.
모든 기둥들이 초석부터 도리(道里)까지 이어졌고 가운데 고주(高柱)는 용마루까지 닿아 있다. 또한 기둥들 사이를 두 겹의 수평 부재들이 마치 꿸대처럼 매우 촘촘히 결구되어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중국 건축의 천두식(穿斗式) 구조를 연상케 한다.
또한 잘게 잘려진 직선의 합장재들, 山자 모양, 혹은 낙타 혹 모양의 화반(花盤)들도 유일한 사례이다.
그만큼 국내 다른 건물과는 구별되는 구조법이고, 신라 때부터 전승된 오래된 주심포 형식이라는 의미에서 '라대(羅代) 주심포'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 등을 '려대(麗代) 주심포'라고 한다면, 봉정사 극락전은 라대 주심포의 유일한 유구로서 역사적 가치를 갖는다.
불상을 모시고 있는 닫집도 그 구조가 매우 특이하다. 보통 전각들의 닫집은 건물 구조에 부가되어 있지만, 봉정사 극락전의 닫집은 좌대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어 완전히 독립된 구조를 이룬다.
또 최근에 법당 안에 마루를 깔았는데, 그전까지 법당에는 전돌이 깔려 있었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아미타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후기의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놓았다.
그러나 봉정사의 건축적 가치는 극락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극락전 외에도 대웅전, 고금당(古今堂), 화엄강당(華嚴講堂)은 각각 한 시대를 대표하는 구조 형식을 가진, 봉정사를 목구조 박물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중요한 유구들이다.
☆ 대웅전(大雄殿)
봉정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좌우로 모시고 있다. 발견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후불 벽화는 고려 불화의 기법과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고려 후기로 추정하는 근거가 제시되고 있다.
대웅전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후불벽에 숨겨진 벽화가 15세기 초의 것으로 확인되어, 늦어도 그 이전에 창건되었다고 보여진다.
이 건물의 기둥 높이와 간격의 비가 1:1.43으로, 우리나라의 목조건물로는 옆으로 매우 긴 수평적 비례를 갖는다. 내부에는 우물반자[순각반자(純角斑子)]를 붙여 지붕 구조틀을 가렸는데, 수직적인 높이감보다 수평감이 강한 공간이다.(이런 공간 배열은 봉정사가 급경사지에 세워졌다는 걸 감안하면 건물이 수평배열을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전면 외부에 내부의 마루면과 같은 높이로 쪽마루를 붙여 수평으로 확장되는 느낌을 더하고 있다.
☆ 고금당(古今堂)
당호를 고금당(古今堂)이라 쓰기도 하고 옛 금당이란 뜻으로 고금당(古金堂)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후자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규모나 위치로 볼 때 불전(佛殿)으로 건립되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전자의 표기가 옳은 것으로 보인다.
또 봉정사 창건 당시에는 불신관(佛身觀: 부처를 바라보는 관점)이 정리되지 않았던 통일 전의 금당이 분화되어 법당의 명칭이 구분되는 시점이므로 금당이라는 명칭을 다시 쓴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고금당은 극락전 앞뜰에 동쪽을 향하여 세운 건물이다. 내부는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진 작은 승방으로, 극락전에 딸린 노전(爐殿) 역할을 한다. 구조 형식은 초각(草刻)이 매우 선명한 주심포식이라 할 수 있지만, 이미 출목이 있는 이익공(二翼工)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과도기적인 모습을 갖는다.
☆ 화엄강당(華嚴講堂)
화엄강당은 대웅전 앞 경내로 들어서면 왼쪽에 동향(東向)하여 서 있는 건물인데, 그 뒷면은 극락전(極樂殿) 앞뜰이 된다. 화엄강당(華嚴講堂)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장대석(長臺石) 댓돌 위에 두꺼운 판자를 쪽마루처럼 깔아 놓았는데, 사분합(四分閤) 띠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중앙간(中央間)과 북쪽 간이 하나로 틔어 있는 온돌방이 되어 있다. 나머지 남쪽 간을 부엌으로 만들어 놓았으나, 그 박공 쪽 벽을 헐어서 내부를 넓힘에 따라 건물 원래의 모습이 약간 손상되었다.
화엄강당은 같은 경내에 있는 극락전과 대웅전을 17세기에 고쳐 지었을 때 화엄강당도 함께 고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강당은 봉정사 경내를 대웅전 공간과 극락전 공간으로 구분하는 경계선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두 공간을 합친다 해도 그리 크지 않은데, 화엄강당을 마당 한가운데에 가로질러 조성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
봉정사 아미타설법도는 1713년 도익 등이 조성한 불화로, 본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십대 보살과 범천, 제석천, 십대 제자, 타방불, 사천왕, 팔금강 등을 배치하였다. 다른 불화에 비해 본존의 비중을 작게 함으로써 다수의 권속들을 표현하였음에도 안정적이면서도 답답하지 않은 화면을 구성하였다. 18세기 전반 경상북도 지역 불화의 특징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 영산회상벽화(靈山會上壁畵)
봉정사 영산회상벽화는 화려한 꽃무늬로 구획된 화면 안에 영취산(靈鷲山)에서 석가모니불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법한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대웅전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대웅전 중창기」에 벽화도 동일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봉정사 영산회상벽화는 높이 362㎝, 길이 401.5㎝이며 토벽(土壁)에 채색하였다. 화면 중심에는 좌상의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크게 자리하고 삼존 주변에 십대 제자와 보살, 범천, 제석천, 사천왕 팔부중 및 천부중 등의 권속이 배치되어 있다. 본존 대좌 앞에는 구름 위로 보탑이 솟아나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는데, 『묘법연화경』「견보탑품」의 내용에 근거를 두고 있다.
☆ 영산회괘불도(靈山會掛佛圖)
봉정사 영산회 괘불도는 도문(道文), 설잠(雪岑), 승순(勝淳), 계순(戒淳), 해영(海英), 종열(宗悅), 성은(聖訔) 등이 그렸다. 비단 바탕에 채색되었다. 중앙에 커다랗게 표현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8보살과 십대 제자가 둘러싸고 있는 간단한 구도이다.
여래는 오른손을 어깨 위로 올리고 왼손은 배 부분에 올려놓고 있어 아미타 수인을 취하는 듯하나 화기에 ‘영산회(靈山會)’라 적혀 있어 석가모니불임을 알 수 있다.
화면 맨 아래에는 연꽃을 든 보살 삼존과 여의를 든 보살이 나란히 서 있으며, 이 가운데 여의를 든 보살은 문수보살이며 그 맞은편에 분홍색 연꽃을 든 보살은 보현보살로 추정된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위로는 화불이 있는 보관(寶冠)을 쓰고 정병(淨甁)을 든 관음보살과 보관에 정병이 있고 보협인을 든 대세지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십대 제자 가운데 백발의 노승과 젊은 승려는 가섭과 아난이다.
☆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봉정사 화엄강당(華嚴講堂)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이다. 봉정사의 부속 암자인 지조암에 있던 것을 봉정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협시불로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서는 관음보살상만이 전해지고 있어 알 수 없다.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머리카락 일부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상체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입었고, 가슴 부분에 장식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은 높이 105㎝, 폭 63㎝ 크기로 결가부좌에 설법인을 하고 있다.
☆ 만세루(萬歲樓)
만세루는 봉정사 대웅전과 극락전이 있는 중심 경내로 들어가는 출입구다. 봉정사 중심 경내는 구릉의 경사면에다 두 층의 너른 평지를 마련하기 위해 높은 축대로 둘러쌓았는데, 출입을 하려면 경사면을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축대의 중심부를 틔워 계단을 만들었고, 그 위에 이층 누각을 올려 계단과 출입문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아래에서 경내로 들어오는 데에서는 문의 역할을 하지만, 경내에서 보면 경관을 조망하는 정자 역할을 한다. 정자의 역할과 문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봉정사의 누문이 만세루다.
만세루는 1680년(숙종 6)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그 후 수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원래 이름은 덕휘루(德輝樓)였으나 언제 어떤 연유로 만세루(萬歲樓)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누문 아래 기둥이 휘어지고 부식되어 형태적으로는 대단히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만세루 마루에 운판 · 북 · 목어를 두고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누마루에 과거의 명칭이었던 ‘덕휘루’라는 현판과 몇 개의 기문이 걸려 있다.
☆ 삼층석탑(三層石塔)
극락전 앞뜰에 위치한다. 삼층석탑은 무게로 인하여 기단부의 일부가 약간 파손되었고 상륜부(相輪部) 일부가 남아 있지 않으나 거의 완형에 가까운 석탑이다. 높이는 3.18m이다.
1층 몸체[옥신(屋身)]에는 남면에 감실 문을 조각하였고 문에는 자물쇠까지 새겼다. 1층에서 3층까지의 몸체에는 사잇기둥 없이 모서리 기둥만 모각되어 있다. 기단부에 비해서 탑신부의 폭이 작으며, 각 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의 체감률이 적고 지붕돌[옥개석(屋蓋石)]도 높이에 비해 폭이 작아 처마의 반전(反轉)도 약하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가 순서대로 있으며, 그 위로 보륜(寶輪)으로 보이는 것이 하나 있다. 상륜부 가운데에 찰주(擦柱)가 솟아 있다.
삼층석탑은 극락전의 건립과 연대가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의 다른 석탑과 비교하여 특이한 점이나 미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전체적으로 고려 중엽의 석탑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 무량해회(無量海會)
대웅전 아래 오른쪽에 화엄강당, 왼쪽에 무량해회 전각이 있다. 대웅전 왼편에 위치한 무량해회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승방이자 요사채이다.
이 화엄강당은 우리나라 화엄종의 법맥을 잇는 도량답게 스님들이 화엄경을 비롯한 경전을 공부하는 전각이다.
무량해회(無量海會), 바다처럼 한량없는 화엄대중들이 모여 공부하고 수행한다는 멋진 이름이다. 무량해회 전각에는 <입지게(立志偈, 뜻을 세우는 게송)>이라는 멋진 게송을 적은 주련이 있다.
자종금신지불신(自從今身至佛身)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불에 이르기까지
견지금계불훼범(堅持禁戒不毁犯) 부처님의 계율 굳게 지켜 함부로 범하지 않겠나이다.
유원제불작증명(唯願諸佛作證明) 오직 바라옵나니 모든 부처님께서 증명하여 주옵소서.
영사신명종불퇴(寧捨身命終不退) 차라리 신명을 버릴지언정 죽어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수행에 임하는 굳건한 결의와 마음 자세를 나타낸 멋진 게송이다.
우리 일반 신도, 在家 수행자들도 입지게를 가슴에 새겨, 단단한 마음 자세로 수행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다.
☆ 봉정사 영산암(靈山庵)
‘한국의 10대 정원’으로 꼽히는 봉정사 영산암 마당 정원은 빼놓을 수 없는 정원이다.
영산암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전각 6동 가운데 자리 잡은 마당에는 소나무와 배롱나무, 맥문동 같은 화초가 어우러져 무심한 듯 아름다운 정원을 이룬다. 사색의 계절 가을, 영산암 전각 툇마루에 앉아 마당 정원을 바라보는 맛이 각별하다.
영산암은 일반적인 부속 암자와 달리 본사(本寺)와 이웃해 있다. 봉정사 승려들이 생활하는 요사채 뒤쪽 문으로 나가면 야트막한 언덕 아래 ‘한국의 10대 정원, 봉정사 영산암’ 표지판이 보인다. ‘영화 〈나랏말싸미〉 촬영지’라는 문구도 있다. 고즈넉한 옛 정취를 간직한 영산암에선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동승〉도 촬영했다.
영산은 석가모니가 설법하던 인도의 영축산을 말한다. 영산암의 정문을 겸하는 우화루는 ‘꽃비가 내리는 누각’이란 뜻이다. 부처가 영축산에서 설법할 때 꽃비가 내렸다는 전설에서 따온 이름이다.
우화루의 작은 문으로 허리를 굽혀 들어가면 우리 옛집과 마당이 어우러진 신세계가 펼쳐진다. 3단으로 된 마당 아래쪽에 풀꽃이 있고, 가장 넓은 중간 마당은 바위 위에 솟아오른 소나무를 중심으로 배롱나무와 석등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간 마당 좌우에 들어선 송암당과 관심당은 우화루 2층과 수평으로 이어져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공간 연출을 보여준다. 우화루의 대청마루가 송암당, 관심당의 툇마루와 연결되는 모양도 독특하다. 우화루 벽체를 일부 없애고 송암당에는 넓은 툇마루를 두어 건물 가운데 ㅁ 자형으로 닫힌 공간이 밖을 향해 열린 모습이다.
다시 짧은 계단을 오르면 우리 고유 신앙을 이어온 삼성각과 십육나한을 모신 응진전이 보인다. 응진전에 줄지어 앉은 나한상은 중앙의 엄숙한 불상과 달리 저마다 독특한 표정과 자세가 해학적이다. 벽에는 부처를 그린 탱화, 봉황과 학, 매화 등을 그린 민화도 눈길을 끈다.
영산암 마당 정원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 송암당 툇마루에 앉으면 아담한 소나무와 배롱나무, 소박한 풀꽃이 아늑하다. 마당 가운데 서서 삼성각 쪽을 바라보면 하늘로 뻗은 소나무 가지와 바닥의 기암괴석이 선계에 온 듯하다. 응진전 앞에서는 영산암 마당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충 보면 5분도 안 걸리는 영산암에 오래 머물러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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