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태사(開泰寺)
충남 논산시 연산면(連山面) 천호리(天護里) 천호산에 있는 절.
고려 왕건에 의해 창건된 거찰이었으나 조선 세조 이후에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근래에 절이 다시 들어섰으나 옛 영화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바로 계백의 결사대가 신라군을 맞아 대적했던 곳이며 신라 말까지 황산벌이었으나 지금은 연산면 천호리 인 이곳에 자리 잡은 개태사는 그 창건에 남다른 배경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神劍 : 후백제의 제2대 왕. 견훤의 장남으로 부왕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금강을 죽인 다음 왕위에 올라 대왕이라 칭하였다. 견훤이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순하고 함께 공격해오자 일선군에서 맞아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왕건은 반역의 이유가 능환과 두 아우의 권유 때문이라 하여 신검을 용서하였다) 을 쫓아 황산 숯 고개를 넘어 마성에 진을 치고 신검의 항복을 받아 내어 후삼국을 통일한 역사적인 일이었으니 이를 기념하여 바로 그해인 936년에 지은 절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삼국통일은 하늘이 도와주심이라 하여 황산의 이름조차 천호산이라고 고쳤다.
『고려사절요』에는 “개태사를 지을 때 사치스러운 것이 극도에 이르고, 12개월 만에 개태사가 완성되니 낙성법회를 베풀고 왕이 친히 소를 지었다”고 되어 있어 고려의 호국대찰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생민(生民)들이 백가지 근심을 만나니, 많은 고통을 이겨 낼 수 없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발원문에서
왕건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큰 간악한 무리를 섬멸 평정하여 생민을 도탄에서 건져, 농사와 길쌈을 제 고장에서 임의로 할 수 있게 하겠나이다.’ 하였더니,
병신년 가을 9월에 숭선성 가에서 (후)백제의 군사와 대진하여, 한번 부르짖으니 흉광의 무리가 와해되었고, 두 번 째 북을 울리니 역당이 얼음 녹듯 소멸되어 개선의 노래가 하늘에 떠 있고 환호의 소리는 땅을 뒤흔들었습니다.
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의 도와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맡은 관사에 명하여 불당을 창건하고는, 이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고 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왕건은 후세에게 명심하라고 내린 「훈요십조」에서 “차령 이남 공주강(금강) 밖은 지세 인심이 다 간교 배역하니 저 아랫녘 사람들이 국정에 참여하여 정병을 잡으면 혹 국가를 변란케 하며 혹 통합의 옛 원한을 펴리니 비록 그 양민이라도 벼슬을 주거나 쓰지 말라”고 하였다.
차령 이남 공주강 밖은 곧 공주 아래쪽의 논산 이하 전라북도를 이름이니 이는 후백제 지역이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한 왕건이 아예 그 싹을 잘라야 한다고 당부한 말로 ‘지역 감정’을 부추긴 원초적인 명제라고 할 만하다.
왕건은 그토록 후백제 세력을 두려워하여 경계하였고, 후백제를 격파한 것을 길이길이 기억시키려고 개태사를 세운 것이다.
이 절에는 왕건의 영정이 설치되어 기일마다 제사를 지내며 그의 옷 한 벌과 옥대를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번창하던 절이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세 차례에 걸친 왜적의 침입으로 무너졌고 조선 시대에도 불교 진흥책을 썼던 세조 때까지는 그런대로 면모를 유지한 것으로 보이나 그 뒤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석불은 도랑에 묻히고, 가마솥은 홍수에 떠내려가 절의 자취도 없어져 500년 동안 면목 없이 되었다가 1930년에 들어서야 한 여승의 힘으로 다시 절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여행-충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여 대조사(大鳥寺) (0) | 2015.03.26 |
---|---|
논산 관촉사(灌燭寺) (0) | 2015.03.19 |
청양 천장호(天庄湖) (0) | 2015.03.19 |
청양 장곡사(長谷寺) (0) | 2015.03.12 |
공주 마곡사(麻谷寺) (0) | 2015.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