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해미읍성(海美邑城)(사적제116호)이 있다. 이 성은 조선 태종 7년(1407년)에 정해현과 여미현을 합하여 그 중간쯤인 몽웅역(夢雄驛)에 해미현을 설치하고 읍성(邑城)겸 충청도 병마 절도사 영(營)으로 쌓은 것이다.
효종 2년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을 두어 군사 약1400여명을 주둔 시켰다.(참고 : 호서의 병영은 청주에 湖西中營, 공주에 湖西右營, 홍성에 湖西前營, 충주에 湖西後營을 두었다)
이성은 북동쪽의 낮은 구릉(성벽보다도 높은 위치로 이곳에서 성밖의 모든 상황을 볼 수 있다)을 의지하여 넓은 평지를 에워싸고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성벽 바깥쪽은(안쪽은 흙으로 샇음) 대부분 가공(加工)한 화강암으로 쌓되 아래 부분부터 위로 오르면서 크기가 작고, 성문은 무사석축(武沙石築)으로 쌓았는데 남문은 홍예문으로 되고 동문과 서문은 사각문이다.
수구문이 서문옆에 있으며 치성(齒城)이 두 개이고 성안에 우물과 샘이 여섯 곳이 있었다. 성벽 바깥으로는 깊은 해자(垓字: 성곽주위로 둘러 판 호(壕))를 둘러 판 흔적이 있어 조선시대 읍성의 표본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남문 근처의 성돌(城石)에는 축성과 관계된 새김 글이 남아 있다.
이 성은 본디 왜구를 막기 위해서 쌓은 것으로 계속 수축(修築)을 해온 것이나 원래의 모습이 대체로 잘남아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임진란이 일어나기 13년 전 선조 12년 나이 35세 때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이 곳에서 10개월 동안 근무했던 곳이다.
남문이자 정문격인 진남루(鎭南樓)를 들어서면 성안 한 중간에 정면 5칸 맞배지붕인 호서좌영(湖西左營)이 서있다. 성둘레가 정확하게 1486m인 성에는 진남루(鎭南樓), 영양루(岺陽樓), 지성루(枳城樓)의 3개 성문만이 남아 있다. 이 읍성은 고창의 읍성인 모양성과 함께 비교적 잘 보존 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슬픈 사연이 있으니 18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때 해미읍성은 감옥소였다. 당시 솔뫼(송산리)의 김대건 신부(한국 최초의 사제, 순조 21년, 1821생)를 위시하여 천주교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퍼져 있었다.
그래서 끌려온 천주교인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성안의 한 호야나무(회화나무: 콩과(荳科)의 낙엽교목(落葉喬木);홰나무; pagoda-tree)는 남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난다.
수령 300년으로 이 나무의 가지에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고문을 했고, 그 흔적으로 철사 줄이 아직도 나무에 밖혀 있다. 이들의 처형대였다.
1868년 병인사옥(丙寅邪獄)때 천주교도 1천명을 이 나무에 목매어 처형했다.
천주교도들은 자신이 죽는 것보다 남이 죽어 가는 것이 보기가 괴로워 먼저 처형되기를 원했다는 처절한 사연이 서린 곳, 해미읍성. 천주교계에서는 이 곳을 성지로 삼고 순교탑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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