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갑사(道岬寺)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사로에 있는 사찰로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곳 도갑사 자리에는 일찌기 문수사라는 절이 있었고 어린 시절을 문수사에서 보낸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신라 말기에 그 터에 절을 다시 지은 후 도갑사라고 이름붙였다. 고려 때 크게 번창하여 전성기를 누렸으며, 조선 세조 3년(1457) 수미(守眉)대사와 신미(信眉)대사가 중건했다.
해탈문:
도갑사 일주문을 지나 100m 가량 들어가면 국보 50호인 해탈문이 나온다. 조선 성종 4년(1473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로 건축양식이 대단히 독특하다. 해탈문 좌우 앞쪽 칸에 금강역사상이 다음 칸에는 보물 제 1134호인 문수동자와 보현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경내에는 1980년에 새로 지은 대웅전과 석조 5층석탑 수미왕사비가 있고, 절 100m 위 미륵전에는 보물 89호인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조선 세조 3년(1473년) 신미, 수미 두 왕사가 중창했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총 규모가 966간에 소속된 암자가 12개나 되었으며, 상주한 승려 수가 730명에 달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6.25동란을 겪으면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다. 지금도 대웅전 뒤 천여 평의 빈터에는 주춧돌이 선명하게 군데군데 박혀 있고, 앞뜰에는 5m에 달하는 스님들이 마실 물을 담아 두는 석조의 크기가 도갑사의 옛 사세와 승려수를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강희 21년 임술’(조선 숙종 8년, 즉 1682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석조에는 늘 맑은 물이 철철 넘친다.
수미왕사비:
영암 출신 수미왕사의 활동과 내력이 기록된 비이다. 비문에 따르면 수미왕사는 조선 세조 때의 승려로 13세에 도갑사에서 출가했다. 그후 법주사 등으로 다니며 경전 공부를 하다가 도갑사로 돌아와 황폐한 절을 중창했고 불경 언해 기구인 간경도감에서 불경을 번역하는 일을 했다. 세조는 그에게 묘각(妙覺)이라는 호를 내리고 왕사로 책봉했다.
용수폭포:
이폭포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 봉안되어 있는 미륵전(彌勒殿)을 끼고 돌아 흐르는 계곡에 있다. 옛날 “이무기가 龍이되어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깊이는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 갔다고 한다.
지금은 수심(水深)이 약 2m정도이고, 수폭(水幅)은 5m정도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쏟아져 산사(山寺)의 정취(情趣)를 더해주고 있다.
미륵전(彌勒殿):
집 이름은 미륵전이지만 안에는 돌로 된 석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불상의 높이는 2.2m이고 광배까지 합하면 3m가 되며 대좌와 불신과 광배가 모두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불상의 얼굴은 둥그스름한데 눈두덩은 두툼하고 코는 넓적하며 입이 작다. 이마가 좁은 편이고 육계는 큼지막하다. 왼편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은 가슴께에 두세 줄의 주름을 만들고는 무릎을 감쌌고, 다리는 결가부좌하고 손은 항마촉지인을 짓고 있다.
원래 석가여래는 대웅전이나 영신전에 모시고 미륵전에는 미륵불을 모신다. 조선 후기에 오면 이렇게 주존불과 그것을 모신 집 이름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도선수미비:
미륵전에서 내려온 후 계곡을 따라 좀더 산 쪽으로 들어가면 왼쪽 널찍한 터에 도선수미비(보물 제1395호)가 있다.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와 중창한 수미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전체 높이가 4.8m에 이른다.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얼핏 보면 요즘 새로 세웠다 할 만큼 말끔하다. 이 비석이 완성된 것은 효종 4년(1653)이었지만 만드는 데 17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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