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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남

완도 동천석실(洞天石室)

by phd100 2015. 4. 21.

 

동천석실(洞天石室)

동천석실은 주자학에서 신선이 산다는 선계세상으로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으며 낙서재의 정면에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있다. 3,306㎡(1,000여평)의 공간에 한칸 정자와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전을 조성하고 차를 마시며 시를 지었던 곳이다.

특히 석담에는 수련을 심고 못을 둘로 나누어 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구멍을 파고 다리를 만들어 '희황교'라 칭하였다.

지금도 석실앞에는 도르래를 걸었다는 용두암과 차를 끓여 마신 차바위가 남아있다.

 

낙서재, 곡수당에 서 있으면 맞은 편 산에 동천석실이 보인다. 아슬아슬한 절벽위에 서 있는 정자 동천석실

고산이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자랑했던 동천석실(洞天石室)은 곡수당에서 나와 상류의 부용동 쪽으로 1.5k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 산비탈에 있다.

 

천년의 요새처럼 바위에 걸터앉아 있다. 바위 위 좁은 공간에 어떻게 저기다 저렇게 지었을까 싶은 마음에 그야말로 건축가이기도 한 윤고산의 해안이 빛난다.

 

동천석실 입구에 주차를 하고, 동백나무 등이 군락을 이룬 짙은 난대림 오솔길을 걸어 약 20분 정도 올라간다.

 

동백나무, 소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오르면 전망대처럼 훤하게 트인 암벽 위에 다다른다. 윤선도가 말년에 머물렀던 동천석실에 닿는다.

 

동천석실은 생전에 윤선도가 보길도 최고의 절경이라고 격찬하기도 했던 이곳은 신선이 사는 곳을 동천복지. 요즘 얘기로 이상향이라 부른데서 연유됐다.

 

이곳에는 커다란 바위들에 둘러싸인 손바닥만 한 터에 한 칸짜리 정자가 위쪽과 아래쪽(침실)에 두동 자리하고 있었다. 가파른 산비탈 바위를 끼고 자리한 위치가 절묘하다.

 

무엇보다 고산의 자랑대로 정자에서 바라보는 부용동 조망은 과연 일품이다. 막혔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듯 넓고 평온하게 펼쳐져 있다. 참으로 호방하고 시원스러운 조망이다.

 

보길도 최고봉인 격자봉(433m)을 비롯해 망월봉(364m), 광대봉(310m)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산줄기에 감싸인 부용동은 한송이 연꽃의 형국이라는 표현이 맞은 것 같다.

 

격자봉에서 흘러내리는 산줄기가 연꽃처럼 둘러싸고 있다는 부용동 중심에는 고산이 처음 보길도에 들어와 자리 잡은 주거 공간인 낙서재, 고산의 아들 학관이 아버지를 위해 지었다는 곡수당 등이 먼빛 맞은편으로 내려다보였다.

 

한참을 앉아있어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조망이다. 이런 절경이 부용동을 들리면 꼭 동천석실을 둘러야 하는 이유일 것 같다.

윗 한 칸짜리 정자의 내부는 둘이 앉으면 비좁을 것 같지만 밖을 보면 그 넓은 부용동과 낙서재와 곡수당이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이 공간이 좁게 느껴지지 않는다. 절묘한 착상이다.

 

책을 읽는데 한평 이상의 공간이 왜 필요할까하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 여유가 보인다.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정자 오른쪽 암벽사이에서 솟아나는 석간수를 받는 작은 석지와 연지, 한 사람만이 겨우 오를 수 있는 가파른 돌계단(지금은 가팔라 보조 동아줄을 설치)과 자연 그대로의 모양에 따라 여러 바위에 상징적인 이름을 붙여서 서로 얘기를 나눈 것 같다.

 

정자 앞의 반석은 고산이 다도(茶道)를 즐기던 흔적인 오목하게 패인 차바위가 있다.

아래 더 작은 정자는 침실로 쓰였던 공간인 것 같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은 땅 한 평이면 족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비록 은자는 간 곳 없지만 그가 쓰다듬으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을 바위와 나무들이 온전히 먼저 간 은자의 체취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