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전남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머물던 주막집이다.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기거하며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을 집필하고 제자들을 교육하던 곳이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조화롭게, 가지런히 하라'이라는 뜻으로, 네 가지는 곧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 · 과묵한 말씨 · 신중한 행동을 가리킨다.
2007년 10월 26일 전남 강진군에서 다산실학 성지(聖地)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강진읍 동성리의 옛터에 복원하였다.
대지면적 1,156㎡에 주막채 · 바깥채 · 초정(草亭) 등으로 이루어졌다. 강진군에서 위탁한 문화해설사 7명이 주막을 운영하면서 문화관광 해설을 제공한다. 300여m 거리에 시인 김영랑(金永郞)의 생가가 있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 온 때는 1801(순조1년)년 겨울이며 그가 40세 되던 해이며 처음 4년간은 강진읍 동문밖의 주막집 사의재 였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오자 강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죄인 취급하여 멀리하였다고 전한다. 다산은 그 주막집 한칸짜리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어 자신을 추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 생각은 마땅히 맑게하되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하며,
- 용모는 마땅히 엄숙하게 하되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해야 한다.
- 말은 마땅히 과묵해야 하며 말이 많으면 곧바로 과묵해야 한다.
- 행동은 마땅히 중후게 하며 중후하지 않으면 중후하게 하라.
- 정약용《사의재기(四宜齋記)》 중에서
다산은 백련사에 들렀다가 해남 대흥사의 혜장선사(惠藏禪師)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도움으로 1805년 강진읍 뒷산에 있는 보은산방(고성사 高聲寺 내 칠성각)로 거쳐를 옮기게 되며 그곳에서 9개월을 머물게 된다.
혜장선사와 다산의 교우를 통해 다산은 다도(茶道)의 경지를 익히게 되었고 이후 유배생활을 감내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다산에게서 학문적 가르침을 받았던 혜장선사는 다산보다 10살이 어렸지만 39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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