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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대구

대구 달성 용연사(龍淵寺) 제1편

by phd100 2016. 7. 1.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玉浦面) 반송동(盤松洞) 비슬산(琵瑟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914년(신라 신덕왕 3) 보양(寶壤)이 창건하였으며 그뒤 고려시대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419년(세종1) 천일(天日)이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불탔고, 1603년(선조36) 탄옥(坦玉) · 경천(敬天) 등이 사명대사


유정(惟政)의 명으로 중창하였다.

 

1621년(광해군13) 범종각을 지었으나 1650년(효종1) 다시 법당과 요사채 등이 모두 불에 탔다. 1653년에는 홍묵(弘默)이 대웅전을 지었고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건립하였다.

 

1655년 희감(熙鑑)과 홍묵이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청진(淸振)이 관음전을 지었다. 1658년에는 도행(道行)이 명월당(明月堂)을, 이듬해에는 학신이 향로전(香爐殿)을, 1660년(현종 1)에는 일순(一淳)이 약사전을 차례로 건립하였다.

 

1670년 천왕문 앞의 석교가 완성되었으며 1673년에는 자진(自珍)이 세존부도(世尊浮屠)와 비석을 세웠다.

1722년(경종 2)에는 대웅전과 종각을 수리하였는데, 당시 절 규모는 2백 수십 칸에 이르렀으며 거주하는 승려수도 500여 명에 달하였다.

 

1722년 임수간(任守幹)이 지은 용연사중수비(龍淵寺重修碑)의 비문과 1748년 금곡 선청(金谷 善淸)이 쓴 「용연사사적」(龍淵寺事蹟)에 따르면 용연사는 신라 신덕왕 1년(912)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보양은 운문사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바로 그 스님이다. 사적의 기록은 그 다음 고려시대를 훌쩍 건너뛰어 조선시대로 넘어간다.

세종 1년(1419) 해운당(海雲堂) 천일(天日)이 중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왜병들의 방화와 약탈로 잿더미가 되었다. 이를 본 사명대사가 인잠 · 탄옥 · 경천 스님 등에 명해 절을 재건토록 하니 대웅전 등 다섯 동의 전각이 들어서고 20여 명의 승려가 살게 되었다.

그런데 효종 1년(1650) 어느 날 저녁 예불을 위해 등불을 켤 무렵 별똥이 떨어져 불이 나서 종각만을 남긴 채 절이 온통 타버리고 말았다. 이를 다시 10여 년에 걸쳐 복구하였을 때는 수십 채의 건물, 이백 수십 칸이 넘는 대가람이 되었으며, 절 앞의 시내에는 용문(龍門) · 천태(天台) · 무릉(武陵) · 방은(訪隱) · 홍류(紅流) 등 돌을 다듬어 만든 다리가 다섯 개나 놓였다.』

 

이렇게 큰 절의 규모를 갖추고 나서 용연사는 신앙의 핵심이 되는 불사리를 모시는 내실을 다지게 된다.

현종 14년(1673) 석가여래부도, 곧 불사리탑을 이곳에 세운 일이 그것이다. 용연사 또한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갖춘 절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뒤 숙종 41년(1715)부터 7년에 걸쳐 대웅전 등 여러 건물을 중수하고 단청을 새롭게 올렸으나, 불과 4년 만인 영조 2년(1726) 정월 초하루에 대웅전과 동서의 별실, 좌우의 승당이 다시 불에 타는 재난을 당했다.

당시 승통 혜조를 중심으로 대중들이 이를 복구하여 영조 4년(1728)에 중건을 마쳤다. 그러고 나서 29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모습으로 용연사는 우리와 만난다.

 

 

<이제 용연사로 들어 가본다>

그 옛날 도원경을 방불케 하는(武陵) 절에서 조용히 숨어사는 이를 찾던(訪隱) 길에 건넜을, 꽃잎과 단풍잎이 떨어져 흐르던(紅流) 무지개다리들은 간 데 없고, 비좁은 길만 남기고 옹색한 터에 다닥다닥 집들이 이어진 상가를 지나서야 주차장 앞에 용연사 일주문이 얼굴을 내민다.

 

여기저기 갈아댄 나무에 미처 단청을 올리지 않아 궁기가 흐르긴 해도 용연사가 영화롭던 시절에 어울릴 만큼 공포가 화려하고 복잡하다. 그대로 조금 더 올라 절의 약도가 그려진 안내판 앞에서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절의 본당 극락전으로 향하게 되고, 왼쪽으로 능선을 넘으면 불사리탑, 즉 석조계단이 있는 적멸보궁이 나온다.

 

먼저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넌다. 계단을 올라 사천왕문을 지나서 보광루 밑으로 통과하고 나면 극락전 마당이다. 좌우로 영산전과 삼성각을 거느리고 극락전이 서고 그 앞으로 요사채가 하나씩 양쪽으로 나뉘어 자리하고 있다.

 

<삼층석탑>

법당의 중심선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벗어난 자리에는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하나 놓였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탑이다.

기단부는 단층으로 바뀌고, 몸돌은 긴 대신 지붕돌이 두껍고 낙수면이 짧으며 층급받침이 넷으로 줄어드는 등 시대의 하강을 보여주는 요소들이 뚜렷하다. 용연사에서 가장 오래 된 유물이지만 크기가 2m 남짓에 세장하여 극락전이나 다른 건물들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대웅전을 대신한 극락전>

극락전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얼핏 보아서는 고풍을 느낄 수 없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후불탱화, 삼장탱화, 단청과 벽화 등에 모두 세월의 무게가 차분히 서렸다.

후불탱은 극락전에 걸려야 할 미타탱이 아니라 대웅전에 있게 마련인 영산탱이다. 화기(畵記)에는 영조 7년(1731)에 영산대법회탱을 비롯한 5폭의 탱화를 그려 대웅전과 영산각에 봉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존불 또한 문수 · 보현 두 보살을 좌우에 거느린 석가여래이다. 그렇다면 이 법당은 극락전이 아니라 대웅전인 셈이다.

 

이 점은 삼장탱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그 화기에 법장암에서 그려 본사, 곧 용연사 대웅전에 걸었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이상으로 미루어본다면 현재의 극락전은 본래 대웅전이었으나 어느 땐가 무슨 곡절 끝에 극락전으로 현판만 바뀐 듯하다.

 

<극락전에 있는 후불탱인 영산탱의 얘기>

후불탱화는 영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열 살에 죽은 효장세자의 빈궁 조씨를 비롯한 몇몇의 시주로 이루어진 것이다.

조씨는 나이 열셋 되던 1727년에 아홉 살 난 효장세자의 세자빈이 되었다가 이듬해 그를 사별했다. 그러니까 세자의 3년 상을 끝내고 그의 천도를 위해 이 영산탱을 시주했던 모양이다.

 

평범한 여인으로 치자면 아리고 기막힌 사연이겠으나 아무튼 이러한 왕실의 뒷받침으로 그려진 그림이라 그 솜씨도 남달라 청록의 고운 색감, 양 보살의 투명한 두광 표현, 다양한 표정의 섬세한 얼굴 모습 그리고 다채로운 의복 표현 등이 짜임새 있게 자리잡은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삼장탱화 얘기>

법당 우측 벽에 걸린 삼장탱화는 영산탱보다 13년 뒤인 영조 20년(1744)에 그려졌다.

천장보살이 주존으로 가운데 앉고 그 오른쪽에 지장, 왼쪽에 인장, 곧 지지보살이 정좌했다. 삼장보살의 연화대좌 아래로는 각 보살의 두 협시가 좌우에 시립하고 있으며, 뒤로는 시왕을 비롯한 많은 하늘의 권속들이 오색구름 사이로 상반신을 내밀고 있고, 그 위쪽은 구름으로 채워져 있다.

세 보살의 법의 · 대좌 · 광배들의 색채가 서로 달라 산뜻하고 다채로워 보인다. 삼장탱화가 정형화되는 시기에 한 발 앞서 그려진 작품으로 삼장탱화의 편년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밖의 불화>

법당 안에는 이밖에도 불화들이 많다. 공포 사이마다 생긴 공간에 부처나 조사의 다양한 모습을 빼곡이 그렸고 널찍한 벽면에는 벽화를 그렸으며 후불벽화도 그렸다.

특히 왼쪽 벽 상단에 그려진 백의관음도와 그 아랫단의 그림 세 폭이 눈길을 끄는데 범상치 않은 필치가 엿보인다.

 

단청은 화려했던 빛깔이 모두 날아가고 고색이 가득하다. 천장의 반자마다 금색 · 자주색으로 모란을 네 송이씩 그렸으며, 그 가운데를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 또는 범어(梵語)로 메웠다.

법당이 북향이라 흐리거나 비 오는 날에는 내부가 어두워 벽화나 단청을 충분히 살펴보기가 어렵다.

 

현존하는 건물은 극락전, 적멸보궁, 나한전을 비롯하여 사명당, 보광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39호인 석조계단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호인 삼층석탑 그리고 용연사 극락전, 용연사 부도군 등이 있다.

 

 

<비슬산은 어떤 산?>

비슬산(琵瑟山, 毘瑟山). 그 이름의 어감이 참 좋은 이 산은 불교와 인연이 깊다. 높고 귀하다는 의미가 담긴 우리말 ‘벼슬’ 또는 ‘솟을’에서 유래했다는 설명도 있으나, 비슬이란 말은 고대 인도 힌두의 신으로 불교에 수용된 비슈누(Viṣṇu)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毘瑟怒)에서 온 말이다.

 

신라시대엔 포산(包山)이라 불린 이곳에서 관기와 도성이라는 두 성인이 수행했다는 얘기가 『삼국유사』 권5 「포산이성」(包山二聖)조에 실려 있고, 그 책을 지은 일연스님 또한 여기에 있던 보당암 · 무주암 · 인흥사 · 불일사 등에서 젊은 시절에는 예지를 벼리고 나이 들어서는 익힌 바를 베풀었다.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인 옥천사가 이곳에 있었으며, 고려 성종 때에는 아미타신앙을 바탕으로 한 결사(結社)가 이 산중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여러 절이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사 · 용천사 · 용문사 · 소재사 · 임휴사 등이 지금도 흩어져 있고, 그중에도 이들의 앞자리에서 용연사(龍淵寺)가 비슬산을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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