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국 사찰 & 함께 가고 싶은 곳
나의 얘기

進禮面(4)

by phd100 2017. 11. 3.

 

<오늘은 그 네 번째 얘기로, 왕도가 될 번한 진례에 내려오는 구전(口傳: 입으로 입으로 내려오는 얘기)>

 

<견훤의 대야성 점령의 숨은 목적>

 

삼국시대에서 부터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역에 위치해 있던 대야성(합천)은 전략적으로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다.

 

백제 입장에서는 대야성을 점령하면 신라 공격에 최일선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고 신라 입장에서는 마지막 방어선이 대야성이었던 것이다.

 

이렇기에 서로 물러설 수 없었던 것인데 통일신라시대를 지난 이후의 후백제로서의 대야성이 지니는 의미는 컸다.

 

땅따먹기 싸움에서 강성한 호족이 없었던 강주(진주), 양주(양산)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관문인 대야성을 함락해야만 했고 백제를 계승한다는 후백제가 마땅히 얻어야 할 곳이 대야성이었던 것이다.

 

또한, 견훤이 대야성(합천) 점령 이후 구사군, 진례군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북에는 왕건이 버티고 있었고 아버지인 아자개의 상주 지방도 고려에 귀부를 하였기에 이제 남은 것은 강주(진주), 양주(양산) 땅이었다.

 

고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 강주, 양주 땅을 점령함으로써 후백제의 영토를 넓힐 수 있었고 옛 백제의 동맹국이었던 가야의 영토를 찾는다는 명분, 그리고 유독 구사군(지금의 경남 창원), 진례군(지금의 경남 김해시)을 공격한 것을 보면 일본과의 교역, 해상루트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옛 가야 연맹의 땅인 합천, 창원, 김해는 통일신라시대 때에는 강주, 양주에 속해 있다.

 

견훤은 주 외교 루트였던 나주지역을 왕건에게 빼앗김으로써 해상루트가 막힌 상태였는데 이곳 경남지방을 얻음으로써 어느 정도 해소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여기서 진례면에 대한 구전(口傳)을 얘기해 볼까 한다.

견훤이 진주를 점령하고 양산으로 가는 도중에 진례로 들어섰다. 들어 서보니 이게 웬일인가,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도읍지와 성으로 정하기에 가장 좋은 입지(立地)이었다.

진례면은 남쪽이 용지봉으로 높고, 북쪽이 낙동강 하안을 끼고 있어 낮다. 그러나 창원은 이와 정 반대다. 그 당시에 폐성이 되어 흔적으로 남아 있던 진례성(進禮城)에 진을 치고서 진례와 창원의 면면을 살폈다.

 

후백제 견훤은 이 만 한 도읍지가 없음을 알고서, 창원은 태평성세일 때 도읍지로 하기로 하고, 당장은 고려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적당한 곳이고, 길이 길이 왕기(王氣)가 서린, 진례를 도읍지로 삼기로 하고, 진례로 들어섰다.

 

견훤이 진례면 한 가운데 들어서서 보니 북쪽이 너무 휑하여 작은 산이라도 조금 막혔으면 하고 중얼거리니, 마침 작은 산이 움직여 북쪽을 막으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냇가에 빨래를 하던 여인이 “아, 저기 산이 개구리 등을 타고 움직이네.” 하면서 빨래 방망이로 가리키니, 산이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렸다.

 

지금 그 산이 봉화산(烽火山 140m)이다. 진례에서 보면 산의 반쪽만 보인다. 그 후 이곳 사람들은 ‘개구리등뫼’ 또는 ‘개구리똥뫼’라고 한다.

 

한 여인의 방정으로 진례면 이 땅을 지금 껏 보잘 것 없는 촌락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왕기는 살아 있어서 왕이 탄생했고, 여인의 방정은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겠다.

 


'나의 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進禮面(6)  (0) 2017.11.07
進禮面(5)  (0) 2017.11.06
<부부관계 / 유머>  (0) 2017.11.03
進禮面(3)  (0) 2017.11.02
남편의 수명  (0) 2017.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