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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얘기

進禮面(6)

by phd100 2017. 11. 7.

 


<오늘은 송정리, 초전리로 찾아갑니다.>

 

[송정리(松亭里)]

 

송정(松亭)

임진왜란 전에 한골에 곽씨가 마을을 이루어 살았는데 꽤 많이 살았고 행세도 한 것으로 마을 이름이 대동마을이었고, 뒷산도 대동산으로 불렀으나 모두 떠나고 벽송정이라 불리어 오다, 송정으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 한다. 소나무가 많다는 뜻으로 송정이라고 한다 함.

 

가야시대의 유물과 고분군이 있었으나 도굴되고 그 흔적과 우물들의 파편만 널려 있다.

 

김해 임진왜란 충신의 한분인 송빈(宋賓) 공의 차자(次子)인 사천공이 처음으로 송정에 터를 잡아 온지 어언 400여년, 지금은 청주송씨의 사천공파의 집성촌이다.

송씨가 득세할 때는 망골과 한골은 송씨의 노배들이 살던 마을로 100여세대가 되었으나 송정이 쇠하기 시작하자 노비촌이 망하기 시작한 곳이 망골, 노비촌의 한가운데 마을이라고 한골이라 불렀는데 지금 대원사가 있는 일대의 골이다.

 

청곡(淸谷)

청곡에는 조선 중엽부터 옹기굴이 생기면서 점차 번성하여 경남에서는 알아주는 옹기점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전부터 마을이 이룩돼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 초에 면사무소가 초전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오면서 파출소도 함께 옮겨 오고 해방 후에 5일장, 우체국, 농협, 보건지소, 소방파출소 등이 생기면서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아파트도 생기고 하여 1996년 1구와 2구로 법정 분동되었다.

‘점에’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옹기를 셀 때 한점, 두점에서 나왔다고 한다.

 

점터(옹기를 굽는 가마가 있던 곳)가 위치한 뒷산은 분청도예촌이 조성되어 해마다 김해의 도자기 축제장이 되기도 한다.

 

상둔덕(上屯德)

시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약 300여 년 전 경북 달성군 논공면에서 김해 김씨 김창택의 3형제분이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고, 그 후로 다른 성씨들이 이주해 와 살고부터 마을이 이룩되었다고 전해온다.

 

진례면 중앙으로 흐르는 화포천 상류중 진례면 중앙에 위치해 있어 홍수가 날 때면, 방죽을 쌓은 둑방을 범람하기도 해, 해마다 둑방 사방 공사가 일 년 중 동네 큰 일거리였다.

 

이렇게 쌓다 보니 개천가 양안에 둔덕이 생기게 되었고, 둔덕을 한자로 의미있게 표기해서 둔덕(屯德)으로 전해져 온다.

 

마을 앞 제방에 마을을 상징하는 포구나무(느티나무)가 2그루(큰포구나무, 작은포구나무) 있었는데, 수령은 약 200여 년으로 그늘이 동네 쉼터를 만들어 주었고, 명절에는 동민들이 그네를 뛰는 등 민속놀이를 즐기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수령이 다하고 개발의 여파로 둑방에 많던 아카시아와 함께 모두 사라 졌다.

 

하둔덕(下屯德)

1948년 둔덕마을이 상둔덕과 하둔덕으로 법정 분동되었고, 지금부터 약 300여 년 전에 청주송씨, 김해김씨, 남양흥씨, 전주이씨 등의 성씨들이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지금은 상·하둔덕이 이어져 마을의 구별이 안 된다.

 

산월(山越)

옛 문헌에 충훈리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이룩되기는 오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마을 앞 충훈천변의 충훈사지는 고려시대의 사찰로 부지가 수천 평으로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발굴조사단이 내려와 금동불상 1좌와 기타 많은 유물을 발굴한 것으로 전해 온다.

 

우리나가 일본에 강점된 후 일본인들이 송정리 716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많은 뽕나무를 심어 집단거주하면서 농막, 산넘어(山越) 춘비골 등으로 불리어 경남도에서도 양잠으로 알려진 마을이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산월부락으로 불리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초전리(棗田里)]

 

초전(棗田)

초전이란 이름은 옛날 대추나무(棗:대추나무 조)가 많은 이 곳에 임, 김, 박, 최, 송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전해 오며,

조선조 때는 자여도(自如道: 自如驛을 중심으로한 驛道:역길)에 있었던 작은 역이 있었다. 초전리 750번지 그 일대 아름드리 숲들은 역마를 매던 곳이라 한다.

일제 초에는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초전리 830번지(지금의 초전마을 회관)에 있다가 1920년경 송정리로 이전되었다. 1954년에 마을이 현등, 본부락, 월촌으로 분동되었다가 1955년에 다시 초전을 합동되었다.

 

돈담(敦談: 이웃끼리 오순도순 모여 얘기하기 좋은 마을)

돈담부락은 진례면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마을의 지대가 조금 높아서 돋은 마을(돈담)이라고 불렸다고 전해온다.

돈담과 진례각단 등 2개 마을로 구성되고 진례각단은 진례국민(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6.25사변 때는 진례국민(초등)학교 운동장과 근처의 유휴지가 함안등지에서 피난 나온 피난민의 집단 수용처가 되었는데, 피란 온 그 해 겨울 모든 피란민 천막촌이 불에 타는 화마를 입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 후 면민의 몇몇 유지들이 모여 사학(私學)을 열어 이곳에 개교하게 되었다(진례중학교).

 

인구의 증가와 경제발전 등의 여파로 지금은 백조, 동원, 송정아파트와 현오빌라 등과 상가 학원 등이 입주하면서 진례면 내에서는 인구수로는 제일 큰 마을이다.

마을돈담은 지금의 초,중학교를 지나 동쪽에 위치하며, 김해시장(김해부사)을 배출한 마을로 풍수지리적으로도 꽤 괜찮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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