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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북

영주 흑석사. 기흥리 암각화, 마애여래삼존상

by phd100 2020. 2. 9.


<영주 흑석사(榮州 黑石寺)>

흑석사는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다가 1990년대 초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목조아미타불 불상의 몸체 안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어 국보 282호로 지정되어 다시 관심을 끌게 된 사찰이 흑석사이다.

야산이라기보다 구릉자락에 감싸여 있는 흑석사는 삼국시대 석조마애삼존불상과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늦어도 통일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로 매우 유서 깊은 고찰임을 알 수 있다.

이산면 사무소에서 이산초등학교 쪽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 흑석사라고 쓰여진 입석을 보고 들어가니 절을 산이 어머니가 아이를 감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주차장을 올라가다 보니 키 큰 소나무들이 낮은 산의 꼭대기에서 하늘을 찌르기라도 하듯이 몰려있었다.

여느 사찰과는 다르게 흑석사는 창건에 대한 역사도, 창건 후의 사찰 역사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부석사를 비롯한 소백산의 인근 사찰처럼 통일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이라고 유추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찰되었다가 8.15광복 후 소백산 일대 소개령에 의해 순흥 초암사에 계시던 김상호 스님에 의해 초암사 재목을 옮겨와 중창된 것이다.

 

흑석사란 이름의 유래는 절 가까운 마을 이름을 흑석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전해진다.

마을 뒤편 산자락에 검은 빛깔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이 절에 봉안되어 있던 목조아미타불좌상은 본래 정암산 법천사에 있던 걸로 6.25때 옮겨온 것이다. 수년전 불상의 복장에서 복장기와 보권문, 전적4종과 직물, 기타복장 유물이 발견되었고, 국보 제 282호로 지정되었다. 복장기와 조성 보권문의 내용을 보아 목불상은 조선 세조3(1458)에 조성된 삼존불상 가운데 하나였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木造阿彌陀如來坐像腹藏遺物)>

경북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흑석사의 대웅전에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국보 제282. 불상의 전체 높이는 72, 머리의 높이는 21이다. 흑석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81)과 삼국시대의 불상으로 보이는 마애여래상이 있어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로 내려오다가 1945년에 중창된 사찰이다.

 

최근에 대웅전의 목조아마타불상의 복장(腹藏: )에서 복장기(腹藏記)와 불상조성권선문(佛像造成勸善文) 등의 전적(典籍) 714, 사경보(寫經褓: 경을 싼 보자기) 등 직물류 38, 사리·유리·구슬 등 기타 5종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복장기에 의하면, 이 목조아마타불상은 1458(세조 4)에 조성된 삼존상 가운데 본존불로서 원래 정암산(井巖山) 법천사(法泉寺)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법천사는 지광국사현묘탑비가 있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의 명봉산(鳴鳳山) 법천사 외에 대전광역시 대덕구 계족산(鷄足山), 전라남도 무안군 승달산(僧達山), 경상남도 하동군 법산(法山) 등에 법천사가 현존하거나 또는 기록에 나타나지만, 권선문에 보이는 정암산 법천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螺髮: 곱슬머리가 동그랗게 말아 올려진 모양)이며, 높은 육계(肉髻: 부처님의 정수리에 솟은 상투모양의 모습) 위에 정상계주(頂上髻珠: 육계 위에 있는 둥근 구슬)가 있어서 조선 초기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얼굴은 계란형의 수척한 모습이나, 단정하고 아담하며, 체구도 가늘고 긴[細長] 동그란 형태[隋形]이다. 어깨 전체를 두르고 있는[通肩] 법의(法衣)는 일정한 두께로 표현한 반면, 옷의 무늬[衣文]는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왼쪽 팔굽 위에 있는 형태의 모양과 배 위에 평행하게 표현된 옷주름선[衣褶線]은 조선 초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조성기(造成記)와 대공덕경(大功德經)에 이 불상이 법천사의 당주(堂主)1458(天順 2)에 조성된 아미타삼존불의 본존불이라는 기록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1457년 화남(和南)이 작성한 백지묵서법천사아미타불삼존조성보권문 (白紙墨書法泉寺阿彌陀佛三尊造成普勸文)1458년에 조성되었다는 복장기의 기록에 의하면, 성철(性哲성수(性修)의 화주(化主)로 태종의 후궁인 의빈(懿嬪) 권씨(權氏), 명빈(明嬪) 김씨(金氏)와 효령대군(孝寧大君) 등 왕실과 종친들의 시주, 그리고 이소세(李小世이화(李華) 275명의 시주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불상을 조성하는데 화원(畵員)에 이중선(李重善이흥손(李興孫), 각수(刻手)에 황소봉(黃小奉), 소목(小木)에 양일봉(梁日峯) 등이 참여하여 제작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복장기는 불상 제작연도와 제작에 참여한 인물이 나열되고 있어서 불상과 더불어 조선 초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목판본인 불설대보부모은중경합각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合刻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은 권말(卷末)에 있는 정암(定菴)의 발()에 의하면, 1432(세종 14)에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의 발원으로 장수경과 함께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소을진(金所乙進)과 옥매(玉梅)가 영가 천도를 위해 찍어낸 것임이 권말의 묵서지기(墨書識記)에 나타나 있다.

 

복장유물 가운데 백지묵서불조삼경합부(白紙墨書佛祖三經合部)는 최초로 한역(漢譯)사십이장경, 부처님이 마지막 설했다는 불유교경(佛遺敎經), 그리고 위산 영우(潙山靈祐)의 법어[潙山警策]를 필사한 것이다. 이 가운데 사십이장경불유교경은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있지만, 이미 송·원대부터 합편되어 불조삼경(佛祖三經)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으며, 우리나라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에 유통되어왔다.

 

위산경책(潙山警策)은 경문에 수록되어 현재까지 초심자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판본은 모두 송나라 수수(守遂)의 주()가 붙어 있는 반면, 이 사경은 원문만 필사되어 있다. 권말에 있는 원의 고승 몽산화상(蒙山和尙) 덕이(德異)의 서에 의하면, 덕이가 수수의 주가 있는 불조삼경을 구해 1286년에 정산(靜山) 혜대사(慧大師)의 시주로 휴휴암(休休庵)에서 간행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사경은 원판인 휴휴암본의 번각본(飜刻本새로 새긴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주는 생략하고 원문만 필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사연대는 사경의 품격으로 보아 조선 전기로 추정된다. 이 외에 백지금니묘법연화경2의 권수에 붙이기 위한 변상도와 감지은니묘법연화경5의 사경, 그리고 조선 전기의 부적 등의 복장유물이 있다.



<영주 가흥리 암각화(榮州可興里岩刻畵)>

경북 영주시 가흥동에 선사시대 바위그림(암각화)이 있다.

199087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되어 영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바위에 쪼아 새긴 그림이다. 보물 제221호인 가흥리마애삼존불상을 조성했던 노출암반의 수직바위에 새겨져 있다. 삼존불에서 약 10m 떨어진 아래쪽이다.

 

그림이 새겨진 바위의 크기는 높이 1~1.5m, 너비 4.5m이다. 3~5개의 횡선으로 연결시킨 모양의 기본형이 같은 그림을 새겼다. 마치 상하가 넓어지고 가운데가 좁아지는 돌칼[石劒]의 손잡이 모양과도 같고, 상하가 바라지는 사다리꼴을 연상하게도 한다. 이런 문양은 긴 네모꼴의 바위 수직면을 따라 옆으로 단독 또는 연속하여 11개가 새겨져 있다.

 

가흥리 암각화는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 서천변에 있는데, 영주시의 북서쪽에는 소백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남원천과 죽계천이 합류하여 서천을 이루고, 이 서천이 영주시의 서쪽을 흐르고 있다.

유적은 이 합수 지점의 하류로서, 서천변에 돌출해 있는 별봉(해발158m)의 동쪽 사면 끝자락에 있는 수직의 자연 암면 하단에 암각이 새겨져 있다.

유적의 앞쪽에는 28번 도로가 지나가고 있는데, 이 도로 자체가 제방에 해당되며 그 너머에는 서천이 흐르고 있다.

따라서 이 제방이 축조되기 전에는 암면 바로 앞까지 물이 들어왔거나 그 앞 전체가 넓은 하천 범람원 또는 하천변에 있는 저습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비슷한 지형은 고령 양전동이나 안화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흥리암각화는 울산 반구대암각화, 천전리암각화, 고령 양전동암각화에 이어 네 번째로 발견된 선사시대 암각화이다.

검파형(劍把形) 모양의 암각화가 점차 도식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연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가장 늦은 시기인 청동기시대 또는 초기 철기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림이 있는 암벽은 표면이 거친 화강암으로 위아래 두층으로 나뉘어졌는데, 아래층은 높이 201cm, 너비 570cm, 윗층은 높이 181cm, 너비 500cm이다. 그림은 하단층 바위면의 윗부분에 새겨져 있다. 그림이 있는 상단층 바위면은 높이 79~115cm, 너비 388cm의 긴 장방형이며 그림은 갈아파기와 쪼아파기가 혼용되어 있다.

영주가흥리암각화유적에서만 나타나는 유형으로 상하 좌우 윤곽선 전체가 만곡하는 것이 특징이다.

깃털은 표현되어 있지 않고, 내부는 대체로 가로줄로 구획되어 있으나 성혈은 없다. 전체 '패형암각' 가운데 서 가장 도식화된 표현으로 생각된다.

암각화의 형태는 고령 양전리 신상 암각화의 변이형이며, 이런 인면암각화 유형으로는 가장 단순하다. 형태는 세로로 긴 장방형이고 네 윤곽선을 모드 안으로 휜 반원으로 처리하였다.

특히 좌우의 선이 더 많이 휘어 있어 중심부의 서로 이어진 부분은 그림과 그림 사이가 마치 원형을 연결시킨 듯이 보인다. 윤곽선 외부에 머리카락의 묘사는 엾으며 안으로 가로줄을 둘, 셋 그어 내부를 셋 또는 넷으로 나누었다. 세로로 긴 장방형으로 좌우의 선을 안으로 많이 휘게 새겨 놓았다.

중심 바위면 왼쪽 상단에 있는 것은 내부에 칸마다 한 개씩의 원형홈을 새겼다. 또 중심 바위면의 한가운데와 오른쪽 바위면 상부 중심에 있는 도혀으이 바로 위쪽 중심부에 작은 원형 홈이 새겨져 있어 전체적으로 마치 사람이 두 팔과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는 듯하다.

이 작은 홈이 밑의 그림과 연결되는 것인지 아니면 관계없는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원형 홈이 다른 대부분의 그림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어 사람의머리를 표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농사가 잘되고 후손이 번성하길 기원하며 제사드리는 제단터로, 주로 산과 물을 낀 장소에서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 가흥리 뒤로 나지막한 야산이 펼쳐지고, 앞으로 서천이 흐르고 있어 암각화의 입지 조건임을 알 수 있다.

 

가흥리 암각화(榮州可興里岩刻畵)에서 10m 정도 떨어진 곳, 위쪽에 신라시대의 가흥리 마애삼존불상이 있어 유명하고, 1989년에 발견되었다.

또 암각화 오른쪽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가흥리 마애불이 있어 이바위 일대가 선사시대 이래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알수 있다.

암벽에 신앙의 대상물을 새기고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제의 장소로서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외에도 가흥리에는 청동시대 부족들의 경계표시였던 입석이 있어, 이 지역의 자연환경이 좋아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애삼존불상(보물 제221)>

영주시 가흥동, 커다란 바위면위에 조각된 마애불이다. 바위면 가운데 믿음직스러운 본존불이 조각되어 이쏙, 좌우로 부드럽고 풍만한 협시보살이 새겨져 안정된 구도를 이루고 있다.

본존불은 사각형의 얼굴에 팽팽한 빰, 큼직한 코, 굳게 다문 입술, 넓고 당당한 가슴, 긴장된 무릎 등에서 건장한 힘을 느낄수 있으며, 두껍고 무게있는 통견의 또한 장중함을 더해주고 있다. 본존불은 다리와 광배도 갖추어 완벽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8잎의 연꽃이 겹잎으로 새겨진 앙련대좌(연꽃 무늬 자릿돌) 위에 앉아있으며, 연꽃무늬와 화분, 화염문의 조각된 광배(부처뒤의 후광)가 뒤를 받치고 있다.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전면을 향해 당당히 서 있다. 왼쪽 보살은 가슴이 넓고, 왼팔은 어깨로 걸치고 바른 팔을 베어 댄 표현 등에서 강한 남성적인 느낌을 찾을 수 있고, 오른쪽 보살은 오른쪽 보살상은 왼쪽 보살상과 비슷한 수법으로 표현되었지만 보관에 보병이 묘사되었다던가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것은 다른 형태이다. 가흥리 마애삼존석불은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활력이 흐르며, 사실적인 묘사도 부분적으로 나타나 과도기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 시대의 통일신라 시기로 발전해 가는 시기의 작품이다.

불상의 코와 눈의 돌가루를 갈아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아들을 낳고자 하는 부인네들에 의해 불상이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변에는 이름을 알수 없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해서 지금도 동네이름이 "한절마을"로 불리운다.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좌상>

영주 가흥리 마애여래좌상은 자연 바위면에 새긴 불상이다. 2003628일 집중호우로 보물 제221호인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의 좌측 앞 부분의 암벽 일부가 무너지면서 새롭게 발견되었다. 민머리위에 살상투가 큼직하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두 눈은 파이고, 코와 입부분은 훼손이 심하나 양쪽볼은 풍만하여 전반적으로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옷주름이 왼손에서 무릎으로 묵직하에 흐르지만 세부적인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광배(光背)는 보주형(珠形)이며 2중으로 조각하였는데 내연부는 머리를 중심으로 연판(蓮瓣)을 돌렸다. 전체적으로 바위면을 안쪽으로 파들어 가면서 조각하여 감실형(龕室形)을 따른 점과 앙련(央蓮)의 연화좌, 광배의 조각기법등은 모두 고식(古式)이다. 불상의 형태로 보아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榮州可興里磨崖三尊佛像)"의 본존불을 모범으로 삼아 조각한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조형미가 뛰어난 통일신라중기의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영주시에서는 기흥리 마애삼존불상 주변 바위에 대한 구조안전진단을 실시 보존대책을 수립하고 무너진 암벽을 원상북구한 후 불상을 원래 있던 장소를 찾아 다시 모실 예정이며, 문화재지정 절차도 추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