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한천사(醴泉 寒天寺)
경북 예천군 감천면 한천사길 142 (감천면)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 절이 융성(隆盛)하던 때의 규모와 내용은 기록으로 전하는 바 없어 알 수 없지만 절에 현존하는 탑상(搭象), 즉 석탑과 철분의 양삼 그리고 사각이나 원형의 거대한 주초석(柱礎石) 등으로 보아 신라 말기에는 사세(寺勢)가 매우 황성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창건 이후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전혀 알 수가 없다. 현재 대적광전에 봉안된 철조 여래좌상이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조성하였고, 삼층석탑은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러한 유물 자료를 통하여 번성했던 역사의 일단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 1803년(순조 3) 근천(謹天) 스님이 법당을 중수하였는데 이것은 1803년에 작성된 「한대사법당신창상량문(寒大寺法堂新創上樑文)」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어서 1808년 불량계(佛糧契)의 도움을 받아서 선당(禪堂)을 중건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한대사연화기」를 남겼다. 그런데 「한대사법당신창상량문」이나 「한대사연화기」 등에는 모두 '한대사'로 나오고 있어 한때 '한대사'라 하였다. 근대에는 1932년 취운(翠雲) 스님이 요사를 새로 지었고, 1934년 덕기(德奇) 스님이 법당을 중건하였다. 이때 기록한 「위선계서(爲先契序)」라는 기문에는 '한천사'로 나온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한대사로 했다가 근대에 들어와 지금처럼 한천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한천사는 신라시대인 678년(문무왕 18) 의상(義湘) 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구전되는 내용이나 혹은 1875년(고종 12)에 기록된 「한대사연화기(寒大寺緣化記)」에 한천사의 창건 설화가 담겨있다. 부석사 사적기에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할 때, 기둥을 설주하고 지붕을 덮기만 하면 빈번히 넘어지므로 관법을 하여 보니 소백산맥의 남록인 이곳 뒷산이 "말이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달려가는 주마형국(走馬形局)의 머리 부분이라 부득이 이곳에 지금의 한천사를 세워 지축과 지붕을 날려가는 바람을 잡게 하니 이후 부석사를 건립하는데 장애가 없었다"는 내용이다. 이 때 철불(鐵造如來坐像 - 보물 제667호)을 조성하고 馬頭를 鎭壓한 후 부석사를 세웠다고 하다.
<한천사 금동 자물쇠 및 쇠북(寒天寺金銅鎖金─金鼓)>
경북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길95(운수리) 직지사에 고려 전기의 금동자물쇠와 청동반자(靑銅飯子)가 소장되어있다.
보물 제1141호. 자물쇠 3점, 반자 1점. 1989년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에 있는 한천사 경내의 정지작업 중 발견된 것으로, 고려시대 청동반자 1점 및 청동범종의 용뉴(龍紐) 부분 1점과 함께 출토된 매장문화재이다.
청동반자는 전체지름 39㎝, 입지름 22.5㎝, 두께 13㎝로 반구(飯口) 주위를 약식화된 당초문으로 장식하고 있다. 고려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3점의 금동자물쇠는 각기 크기가 다른데 가장 큰 자물쇠는 길이 30.2㎝, 신폭 3㎝로 몸체의 양 끝에 주로 당초문이 장식되고 좌우 양 끝에도 투각수법으로 정교한 당초문계 문양을 넣었다.
걸림쇠는 연꽃 봉우리로 마감해 놓았으며 금동비녀의 형식을 보여 준다. 그 밖에 자물쇠 몸체에 좀더 화려한 선각문양(線刻文樣)이 새겨져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 상태로는 자세하지 않다.
이보다 작은 또 1점의 금동자물쇠는 길이 18.2㎝, 신폭 2.4㎝이며 몸체의 문양에는 능형곽(菱形廓)을 돌리고 안팎으로 가득 차게 어안문(魚眼文)을 찍어 새겨 놓았다. 이 역시 좌우에 당초문 형식의 운문(雲文)을 간략하게 의장하고 있으며, 한쪽 면은 약간 파손된 상태이다.
가장 작은 또 1점은 길이 17.5㎝, 신폭 2.6㎝이며 자물쇠의 좌우 끝은 투각(透刻)된 당초문으로 처리하고, 몸체에는 어안문·점문(點文)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그리고 몸체의 장방형 구획 속에는 중앙에 어안문이 새겨졌고, 상하에는 점문이 화려하게 찍혔다.
고려시대 금동자물쇠는 매우 희귀한 자료인데, 특히 이 유물들은 의장문양의 격이 높아 미술사적으로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 사이에 발견된 금동빗장 일괄품이 보물 제777호(호암미술관 소장)로 지정되어 있으나, 이 한천사 것이 출토지가 분명하고 그 의장양식 등에서 시대적 성격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어서 학술상 매우 가치있는 유물로 평가된다.
<한천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寒天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667호. 높이 1.53m. 광배와 대좌를 잃어버린 이 철조불상은 9세기 후기에 조성된 일련의 철불인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南原實相寺鐵造如來坐像, 보물 제41호)나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長興寶林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117호) 등과 같은 양식적 특징을 지니는 불상이다. 즉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좁고 약간 처진 어깨라든지 가슴의 젖무덤이 강조되고 있지만 탄력이 훨씬 감소된 점 등에서 8세기 조각들에서 보이는 긴장과 탄력이 많이 해이해진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거의 수평으로 표현된 가늘고 긴 눈과 편편한 콧잔등, 유난히 두드러진 인중의 특징적인 처리 등에서 생동하는 양감은 거의 사라지고 추상화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우아하면서도 침잠한 인상을 풍기는 얼굴, 건장한 신체, 결가부좌의 의젓한 모습, 탄력 있는 다리 등은 신라 말기의 불상으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뛰어난 기량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함께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처리된 옷주름은 당시의 다른 철불들과는 달리 유려하고 자연스럽게 처리되어 있다.
물론 왼쪽 어깨에 걸쳐 가슴 아래로 흘러내린 옷주름은 느슨하고 힘이 빠진 형식화된 모습을 보여 준다. 하지만 왼손에 걸쳐 있는 법의의 주름은 유려하면서 극히 자연스러운 주름을 만들어 낸다.
또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양다리를 감싼 반원형의 옷주름도 자연스러운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느슨하고 해이해지기 쉬운 불신에 생동감을 준다.
이 불상은 세부의 표현에서 추상화의 경향이 대두되는 신라 말기인 9세기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 주는 철불이다. 특히 9세기 이후 선종(禪宗) 계통의 철제 불상 조성의 유행을 타고 조성된 우수한 불상이다.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한천사 대적광전 정면에 위치한 석탑으로 대적광전 내에 안치된 한천사철조여래좌상(보물 제667호)과 같은 신라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 시대 후기의 1탑식 가람(伽藍)의 전형적인 석탑의 한 예로서 시대적 양식의 비교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여기는 석탑이다
1972년 12월 29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탑의 높이는 3.56m이다.
2층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이중 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의 석탑으로 기단 너비가 1.74m이며 하층기단(下層基壇) 각 면석(面石) 중앙에 탱주[撑柱 : 받침기둥]가 하나씩 있고, 면석 모서리에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있다.
탑신부는 옥신(屋身)·옥개(屋蓋)가 각각 한 돌로 되었으며, 옥개 받침은 각 층이 4단으로 되어 있다.
추녀는 직선인데 전각(轉角)이 날카로워 경쾌한 멋을 풍기고 있다. 탑의 상륜부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다.
<전해오는 口傳>
주마산 한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
절이 융성(隆盛)하던 때의 규모와 내용은 기록으로 전하는 바 없어 알 수 없지만, 절에 현존하는 탑상(搭象), 즉 석탑과 철분의 양식 그리고 사각이나 원형의 거대한 주초석(柱礎石) 등으로 보아 신라 말기에는 사세(寺勢)가 매우 왕성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창건 이후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내력은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전혀 알 수가 없다.
현재 대적광전에 봉안된 철조 여래좌상이 통일신라 시대 후기에 조성하였고, 삼층석탑은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러한 유물 자료를 통하여 번성했던 역사의 일단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구전(口傳)되는 내용이나 혹은 1875년(고종 12)에 기록된 「한대사연화기(寒大寺緣化記)」에 의하면 한천사의 창건 설화는 부석사 창건과 연계되어있다.
부석사 사적기에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할 때,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기만 하면 빈번히 넘어지므로 풍수지리적으로 살펴보니 소백산맥의 남쪽인 이곳 뒷산이
"말이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달려가는 주마형국(走馬形局)의 머리 부분이라 부득이 이곳에 지금의 한천사를 세워 지축과 지붕을 날려가는 바람을 잡게 하니 이후 부석사를 건립하는 데 장애가 없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철불(鐵造如來坐像)을 조성하고 말머리(馬頭)를 누른 후 부석사를 세웠다고 하다.
그 뒤 조선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 1803년(순조 3) 근천(謹天) 스님이 법당을 중수하였는데
이것은 1803년에 작성된 「한대사법당신창상량문(寒大寺法堂新創上樑文)」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어서 1808년 불량계(佛糧契)의 도움을 받아서 선당(禪堂)을 중건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한대사연화기」를 남겼다. 그런데 「한대사법당신창상량문」이나 「한대사연화기」 등에는 모두 '한대사'로 나오고 있어 한때 '한대사(寒大寺)'라 하였다.
한대사(寒大寺)는 불량계·등촉계(燈燭契)·위선계(爲先契) 등을 통하여 사찰의 발전과 수행을 도모했던 대표적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에는 1932년 취운(翠雲) 스님이 요사를 새로 지었고, 1934년 덕기(德奇) 스님이 법당을 중건하였다.
이때 기록한 「위선계서(爲先契序)」라는 기문에는 '한대사'로 나온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한대사로 했다가 근대에 들어와 지금처럼 한천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전소되고 근년에 세운 요사 2동과 유리광전에서 편액을 바꾸어 대적광전, 약사전, 삼성각 등 당우들만이 있으며, 옛날의 석축도 다 헐리고 석부자재 등 터만 남아 있다.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보물 제667호로 지정된 한천사철조여래좌상(寒天寺鐵造如來坐像)과 경북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이 중 철불은 높이 1.53m의 비로자나불로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865년(경문왕 5)에 건립된 도피안사(到彼岸寺)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다 그 연대가 더 오래되고, 우아한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또 이 불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3.56m의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후대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대적광전에 봉안된 한천사 철조 비로자나불좌상은 보물 제667호. 높이 1.53m이며, 현재 광배와 대좌는 없으며, 9세기 후기에 조성된 일련의 철불인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南原實相寺鐵造如來坐像, 보물 제41호)이나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長興寶林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117호) 등과 같은 양식적 특징을 지니는 불상이다.
즉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한천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이 철불은 2001년 약사여래의 가슴 부위에 청동녹이 심해 보수를 위해 xray로 정밀 검사를 하던 중 약사여래의 수인(手印)이 아닌 비로자나불의 지권임이 밝혀졌다.
이는 1979년 떨어져 나간 팔을 복원할 때 수인이 잘못되었음이 밝혀져 2002년 철불의 수인을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으로 복원하고, 옛적의 전각명도 유리광전에서 대적광전으로 바뀌고 지금의 비로자나불로 안치된 것이다.
좁고 약간 처진 어깨라든지 가슴의 젖무덤이 강조되고 있지만, 탄력이 훨씬 감소한 점 등에서 8세기 조각들에서 보이는 긴장과 탄력이 아주 해이해진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거의 수평으로 표현된 가늘고 긴 눈과 편편한 콧잔등, 유난히 두드러진 인중의 특징적인 처리 등에서 생동하는 양감은 거의 사라지고 추상화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우아하면서도 침잠한 인상을 풍기는 얼굴, 건장한 신체, 결가부좌의 의젓한 모습, 탄력 있는 다리 등은 신라 말기의 불상으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뛰어난 기량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함께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처리된 옷 주름은 당시의 다른 철불들과는 달리 유려하고 자연스럽게 처리되어 있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이란 불상이나 승려가 가사를 입은 모습에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는 방법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방법이 있는데, 앞에 있는 것을 통견(通肩)이라고 하고 뒤에 것을 우견편단(右肩偏袒)이라 부른다.
보물 제1527호인 충주 백운암의 철조여래상도 이와같은 우견편단을 하고 있다.>
물론 왼쪽 어깨에 걸쳐 가슴 아래로 흘러내린 옷 주름은 느슨하고 힘이 빠진 형식화된 모습을 보여 준다.
하지만 왼손에 걸쳐 있는 법의의 주름은 유려하면서 극히 자연스러운 주름을 만들어 낸다.
또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양다리를 감싼 반원형의 옷 주름도 자연스러운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느슨하고 해이해지기 쉬운 불신에 생동감을 준다.
이 불상은 세부의 표현에서 추상화의 경향이 대두되는 신라 말기인 9세기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 주는 철불이다.
특히 9세기 이후 선종(禪宗) 계통의 철제 불상 조성의 유행을 타고 조성된 우수한 불상이다.
삼성각에는 산신과 칠성은 탱화로 모시고 독성은 석조상으로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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