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국 사찰 & 함께 가고 싶은 곳
여행-전남

곡성 관음사(觀音寺)

by phd100 2020. 2. 18.


곡성 관음사(觀音寺)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301(백제 분서왕 3) 처녀 성덕(聖德)이 낙안포(지금의 보성 벌교)에서 금동 관세음보살상을 이곳에 옮겨와 절을 짓고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다고 전하다.

그 뒤 1374(공민왕 23)에 절을 크게 확장해 원통전(圓通殿)을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원통전(圓通殿)만 남고 소실되어 1604(선조 37)에 모든 건물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당시 국보 제273호였던 원통전과 국보 제274호였던 금동 관세음보살이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관음사에는 심청전과 관련되는 전설이 전하는데 1729(영조 5)에 백미선사가 기록한 목판본에 실려 있다고 한다.

원판은 소실되었으나 인쇄본이 송광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조선사찰사료에도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관음사에 모신 금동 관세음보살은 진나라 황후가 된 원홍장(元洪莊)이 돌배에 실어 보낸 것이라고 한다.

불상을 이곳에 옮기는 도중 쉬었던 곳마다 정자를 세웠는데 대추정, 삽정, 현정, 흥복정 등이라고 한다.

 

'관음사사적'에 의하면, 눈이 먼 아버지를 둔 효녀 원홍장(元洪莊)이 홍법사의 불사를 위해 성공(性空) 스님에게 보내졌는데 스님을 따라나섰다가 중국 진나라 사신을 만나 진나라 황후가 되었고 황후가 된 원홍장이 고국을 못 잊어 불상을 만들어 보냈는데 처녀 성덕(聖德)이 그 불상을 모셔다가 관음사를 지었으며 성공 스님은 홍법사의 불사를 원만히 회향하였고 홍원장의 아버지 원량(元良)은 눈을 떠 장수를 누렸다고 한다.

 

이 설화가 1933년 김태준의 '조선소설사'에 소개되어 심청전(沈淸傳) 원형설화로 국문학계의 공인을 받고 있다고 한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어람관음상(魚籃觀音像)이 남아 있고 성덕보살상으로 알려진 소조불상이 두상(頭像)의 일부만 남겨져 원통전에 봉안되어 있다.

 

옛 관음사 입구

현재는 주차장에서 바로 관음사로 진입할 수 있는데 관음사 안내판 부근의 작은 다리를 건너면 옛 진입로였던 숲길이 있다.

 

금랑각(錦浪閣)

옛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 관음사 앞 계류를 건너는 교각인 금랑각(錦浪閣)을 만난다.

 

성덕산관음사(聖德山觀音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숭정기원후경신년6월일서(崇禎紀元後庚申年六月日書)라는 낙관이 있다.

숭정기원후경신년은 1680년인데 330년이 넘은 목재 현판이 전란(戰亂) 속에서도 현판이 살아남았다.

 

금강문(金剛門)

금랑각을 건너면 단청도 없이 허름해 보이는 금강문이 있다.

들어서면서 왼쪽에는 나라연금강(아금강), 오른쪽에는 밀적금강(훔금강)이 사찰을 수호하고 있다.

나라연금강은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 배나 된다고 하고 입을 벌리고 있어 아금강역사라고도 하며 밀적금강은 야차신의 우두머리로 부처님의 비밀스러운 사적(事迹)을 모두 듣겠다고 서원하였으므로 밀적(密迹)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입을 다물고 있어 훔금강역사라고도 한다.

 

''는 범어의 첫째 글자이고, ''은 끝 글자로 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극락전

관음사 경내 서쪽에 있는 전각으로 근대에 새로 지은 것처럼 보이는 극락전 내부에는 아미타불이 단독으로 봉안되어 있다.

현판과 주련은 현 한국서예가협회 고문인 서예가 담헌 전명옥씨의 글씨이다.

 

옛 원통전 터

원래 있던 원통전이 6.25전쟁으로 붙에 타 없어지고 법당 앞 괘불 지주만 무심히 서 있다.

법당 터 서쪽엔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사이 세워져 있다.

 

원통전

1954년 주지 박창훈(朴昌薰) 스님이 부근의 대은암(大隱庵) 건물을 옮겨와서 지은 건물이다.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고 아래쪽 유리 상자 안에 두상(頭像)의 일부만 남은 소조 불상이 모셔져 있다.

현판은 글씨는 서예가 용곡 조기동씨의 글씨이다.

 

어람관음상

원통전 앞에 있는 석상으로 '어람관음상(魚籃觀音像)'이라고 하는데, 어람관음은 법화경의 33관음 중의 하나로 물고기로 가득 찬 어람(물고기 바구니)을 들거나 혹은 물고기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며 용이 해치거나 방해하는 것을 제거하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관음사(觀音寺)의 창건 설화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 마을에서 계곡을 타고 5km쯤 더 올라간 지점에 관음사가 자리하고 있다. 뒤에 검장산, 남동쪽에 성덕산이 있다.

 

백제 분서왕 3(300)성덕보살이 전남 벌교에서 금동 관세음보살상을 모셔와 봉안하여 창건한 남한 제일의 백제 고찰이며 내륙 유일의 관음성지로서 그 가치가 크다.

6·25 때 국보 제 273호로 지정되어 내려오던 고려조 건물 원통전(圓通殿)이 타고 그 안에 보존된 국보 제 214호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불에 타 머리 부분만 남아 있다.

 

순천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가면 1729년 옥과현 관음사에서 간행한 목판본 성덕산 관음사 사적기가 보관돼 있다.

이 사적은 조선 영조 5(1729) 관음사 장로 우한자(優閑子)스님이 백매자(白梅子) 선사에게 들려 준 창건 유래를 다듬고, 관음사 원통전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 기록 등 중창의 자취를 책 말미에 붙여 정리하고 있다.

 

 

관음사 창건설화에는 심청의 얘기가 들어 있다.

대흥이라는 고을에 장님 원량(元良)에게는 원홍장(元洪莊)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원량(元良)은 비록 눈이 멀었으나 양반의 후예로써 행실이 청렴 강직하고 기개가 고상하여 언어범절이 조금도 경솔하지 아니하니 인근의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는 바였으나 불행은 겹치는 것이라고 한다더니 성품이 현숙하고 민첩하여 바느질과 품팔이로 앞 못 보는 자신을 봉양하던 부인이 그만 산고 끝에 먼저 세상을 뜨니 앞도 못 보는 장님의 처지로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이집 저집 젖동냥으로 키운 딸이 홍장이었다.

 

홍장은 성장하면서 성품이 현숙하고 민첩하여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부축해 드렸으며, 그의 봉양이 극진하여 모든 범절에 있어 비범(非凡)한데가 있었다.

홍장의 효성이 이러하였으니 고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대효(大孝)라 칭송해 마지 않았으며 나라 안에는 소문이 자자했고 멀리 중국땅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님 원량은 밖에 나갔다가 마침 홍법사(弘法寺) 화주승 성공스님(化主 性空大師)을 만나게 되었는데 성공스님은 원량을 보더니 "당신과 함께 금강불사(金剛佛事)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부디 큰 시주가 되어 주시오"라고 말하였다.

원량은 갑작스런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생각해보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므로 조용히 대답하기를 "나는 보시다시피 앞을 못 보며 더구나 가난한 처지인데 어떻게 부처님을 위하는 시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화주승 성공대사는 다시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소승이 금강불사의 원을 세워 지성으로 백일기도를 봉행하여 마지막 회향하는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부처님께서 현몽하시기를 " 내일 기도를 마치고 길을 나서면 반드시 장님을 만날 것이다.

그는 이번 불사에 대단월(大檀越: 큰 시주)이 될 것이니라 하셨으므로 이렇게 간청하는 것입니다."

원량은 말을 잊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겨우 입을 열어 "집에는 곡식 한줌 없고 밖에 나와 봐야 내 땅 한 뼘 없는 처지인데 무슨 수로 시주를 할 것입니까? 다만 나에게 딸린 것이 있다면 딸자식 하나가 있을 뿐인데 이 아이로써 금강같은 불법에 선근 인연이 되고 혹시 대작불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데리고 가서 좋은 도리를 생각해 보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홍장의 나이는 불과 열여섯이었다. 이리하여 화주승 성공대사는 무한 감사의 예를 올리고 장님 원량을 따라 그의 오두막으로 갔으며 아버지 원량은 성공대사와의 언약한 사연을 딸에게 말해 주었다.

 

홍장은 일생 아버지를 봉양할 생각이었으나 아버지와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어 애통하게 울었으며 원량 역시 기막힌 심정이 되었다.

실로 산천초목도 울고 일월도 빛을 잃은 듯 하였으며 날으는 새와 달리는 짐승 또한 슬피 울부짖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지극한 효심은 곧 불심으로 나타났음인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급기야는 아버지를 하직하고 화주스님을 따라 나섰다.

 

아버지인 장님과 딸 홍장의 작별을 가엾고 측은하게 여겨서 마을 사람들도 길을 메우며 옷깃을 적시었다.

홍장은 화주스님과 길을 나서며 뒤돌아 보이는 고향마을과 평생 모시려하던 아버지도 이제는 영영 이별이라고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하였다.

난생 처음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너무나 오래 걸은 탓으로 피로에 지쳐 바다가 보이는 소랑포(蘇浪浦)에 이르러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홍장과 성공스님은 서쪽 바다를 향하여 쉬고 있었는데 바다 저 멀리 수평선 위에서 붉은 배 두척이 나타나는가 하더니 질풍같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날으는 화살처럼 순식간에 나루에 다다른 배는 모두 진()나라의 배였고 배에는 금관옥패(金冠玉佩)와 수의를 입은 사자(使者)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언덕에 앉아 있는 홍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배에서 내려 홍장이 쉬고 있는 곳으로 다가와서 홍장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어 절을 하며 "참으로 우리 황후(皇后)마마 이십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홍장은 물론 화주스님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홍장은 얼굴빛을 고치고 "여러분께서는 어디서 오신 어른이신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저희는 진()나라 사람입니다. 영강 정해년 오월 신유일(永康 丁亥(267)五月 辛酉日)에 황후(皇后)께서 붕거(崩去) 하셨는데 이로부터 성상(聖上)께서는 늘 슬픔을 가누지 못하시더니 하루는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성상의 새 황후 되실 분이 이미 동국(東國) 백제에 탄생하여 장성하셨고 단정(端正)하기로는 전 황후보다 더 하시니 이미 가신 이를 생각하고 과히 슬퍼하지 마시오'하고 현몽하시매

성상께서는 꿈에서 깨어 날이 밝자 곧 폐백(幣帛) 4만단(四萬端)과 금은진보(金銀珍寶) 등을 갖추어 이 두 배에 싣게 한 다음 상()을 잘 보는 상사(相師)를 선발하여 사자(死者)로 삼아 신칙을 내리시되, 동국(東國)으로 달려가서 황후를 맞이하라 하시었으므로 소신(小臣) 등이 외람되이 상명을 받자와 본국을 떠나온 이래 숙야(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로 근심 하옵더니 이제 다행히 성의(盛儀)를 여기서 뵈옵게 되었나이다.

 

사자의 긴 사연을 듣고 난 홍장은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 한 몸이야 가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소, 그런데 갖고 오신 폐백이 얼마나 되옵니까?"

"예 저기 두 배에 가득 실은 것이 모두 값진 보물이옵니다." 홍장이 미소를 띠며 말하였다.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옵고 아버님을 위하여 선근종자(善根種子)를 심어 드리기 위하여 부처님께 바쳐진 몸입니다.

그러하오니 저 두 배에 싣고 오신 폐백을 소녀 대신 이 화주스님께 드리시면 기꺼이 따라 가오리다"하였다.

"예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이 때 화주승 성공대사는 참으로 부처님의 가호라고 기뻐하면서 "홍장 아가씨! 아버님의 일은 염려마시고 가십시오. 소승이 잘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싣고 온 보물을 모두 홍법사로 가져가게 하고 홍장은 중국 진나라 사신을 따라 진나라로 가게 되었다.

 

홍장이 진나라에 당도하여 궁안으로 들어가 진나라 황제(皇帝)를 배알하였으니 그녀는 둥근 달 같은 얼굴 모습에 별빛 같은 두 눈이 반짝였으며 덕()과 지혜(智慧)를 갖춘 모습이 진실로 황후(皇后)의 기상(氣象)이었다.

 

바다 한 모퉁이에 있는 동국(東國) 백제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더란 말인가. 진나라 황제는 찬탄해마지 않았다.

궁중에서는 새 황후를 모시는 큰 잔치가 베풀어지고 황후가 된 홍장은 품성이 단아하고 자애로운 위의(威儀)를 갖추었으므로 황제의 총애가 날로 더해갔으며 홍장 황후는 항상 정업(淨業)을 닦고 행하기에 힘쓰니 나라가 편안하며 가난한 자와 병든 자가 줄어들어 온 나라 백성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홍장은 "내 비록 타국(他國)의 보위에 오른 몸이지만 어찌 조국을 잊을 수가 있으리오" 그리하여 그는 오십삼불(五十三佛)과 오백성중(五百聖衆) 십육나한(十六羅漢)을 조성하도록 한 다음, 세척의 석선(石船)에 실어 본국에 보내니 그 배는 감로사(甘露寺) 앞 포구에 닿았으며 이를 감로사에 봉안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에 대한 신심도 너무나 훌륭하였다.

 

그 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황태자로 하여금 고향 백제 땅에 탑을 조성하게 하여 금강사(金剛寺)에 모셨으며 또 풍덕현(豊德縣 : 현재 京畿道 開豊郡) 경천사(敬天寺)에도 모셨다.

(이 탑은 일제시대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을 다시 찾아와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국보 제 86호로 지정되어 모셔져 있음. 감로사, 금강사와 경천사의 연기설화가 이러하였지만, 그 사적(史蹟)이 지금은 모두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이렇게 본국을 위하여 공덕을 쌓는 한편 황후 홍장(洪莊) 자신의 원불(願佛)로서 관음성상(觀音聖衆)을 조성하여 조석으로 발원하여 모시다가 고향 백제(百濟)를 그리는 사무친 마음으로 석선(石船)에 실어 동국(東國) 백제(百濟)로 띄워 보내면서 서원하기를 "관세음 보살님이시여! 인연따라 제 고향 백제로 가셔서 그들에게 자비와 지혜를 주시고 정업을 닦아 소원을 성취케하여 주소서..." 하는 원력을 세워 배를 띄웠다.

 

그 배는 바다에 표류하기를 한 달 만에 홀연히 바람을 따라 낙안(樂安) 땅 단교(斷橋) 곁에 정박(碇泊)하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이 땅을 지키던 수비병들이 수상한 배로 의심하여 추격하여 붙잡으려 하였으나 관음성상(觀音聖衆)을 실은 석선이 스스로 움직여 바다 멀리 가버렸다.

 

이 때 옥과(玉果 : , 곡성군 옥과면)에 사는 성덕(聖德)이라는 아가씨가 우연히 집에서 나와 해변에 이르렀는데 저 멀리 해운중(海雲中)에서 한 척의 석선(石船)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이쪽에서 끌어당기는 것처럼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배를 바라보고 있던 성덕은 깜짝 놀랐다. 그 돌배 안에는 관음금상(觀音金像)이 번쩍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덕은 문득 공경스러운 마음이 일어나고 어디로든 좋은 자리를 찾아 모셔야 할 것 같아서 먼저 몸을 단정히 하여 예배를 드리고서 관음상을 등에 업으니 가볍기가 홍모(鴻毛 : 아주 가벼운 것, 기러기의 털)와도 같았다.

성덕은 관음상을 업고 낙안을 출발하여 고향인 옥과 땅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열 두개의 정자(亭子)를 만나 쉬어갔다.

처음 쉰 정자는 그 이름조차 알 수 없고 두 번째 쉰 정자는 대취정(大鷲亭)이요, 세번째 쉬어간 정자는 샘정(泉亭)이다.

그리고 네번째는 미타정(彌陀亭), 다섯번째는 율목정(栗木亭), 여섯번째 정자는 불휴정(不休亭)이라 하는데 이곳은 조그만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곱번째 쉰 정자는 흥복정(興福亭), 여덟번째는 현정(玄亭), 아홉번째는 삽정(揷亭), 열번째는 아흐레 동안 머물렀다 해서 구일정(九日亭)이니 여기서 생각하기를 화순(和順 : 옥과의 동쪽) 땅의 백아산(白亞山)으로 갈까, 아니면 담양(潭陽 : 옥과의 서쪽) 땅의 추월산(秋月山)으로 갈까, 또는 옥과현(玉果縣)의 설산(雪山)으로 갈까하고 망설여졌다.

 

구일정은 성덕 아가씨의 고향이므로 일단 고향까지는 왔으나 막상 관음성상을 모실 곳을 물색하려 하니 얼른 떠오르는 곳이 없으므로 9일간이나 머물면서 원근의 명산(名山)들을 생각하면서 어느 곳으로 갈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9일 동안을 심사숙고한 끝에 화순 땅의 백아산으로 갈 것을 정하고 다시 관음상을 업고 구일정을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열한번째 쉰 곳이 운교(雲橋)라는 동리 앞의 정자였다. 운교정(雲橋亭)을 떠난 성덕은 가파른 고개를 넘게 되었으니 이 고개는 하늘에 맞닿았다 하여 하늘재(天峙)라 하였다.

 

관음금상(觀音金像)을 업고 이와 같은 가파른 고개를 오르는 데에도 그 무게를 의식하지 못 하리 만큼 가벼웠는데 이 하늘재를 올라서니 이상하게도 관음성상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하여 마치 태산(泰山)처럼 무거움을 느꼈다.

성덕은 관음보살님을 모실 인연처가 가까워졌음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니 산의 형상이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벌려져 있고 집을 지을만한 터전이 넓지도 좁지도 않은 체 적당한 지라 마음으로 흡족히 여겨 그 곳에 터를 잡아 관음성상을 모시니 이곳이 곧 지금은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全南 谷城郡 梧山面 善世里 = 오산면은 예전에는 옥과현 화면이었음) 성덕산(聖德山) 관음사(觀音寺)이다.

 

성덕은 나무를 꺾어 움막을 만들어 관세음 보살님을 모시고 관음사(觀音寺) 창건을 발원하는 기도를 조석으로 봉행하였다.

그런지 얼마 후 산 아래에 사는 촌가의 사람들이 나무하러 산에 와서는 이 광경을 보고 자기들도 관세음 보살님께 예배하며 마음속의 소원을 빌면 모두가 성취되는 기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하나같이 이루어지므로 관세음 보살님의 영험(靈驗)스러움이 전국 방방곡곡에 전파되니 찾아와서 예불 기원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 마치 구름 같았다.

이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주산(主山)을 성덕(聖德)아가씨의 이름을 따서 성덕산(聖德山)이라 하였으며 성덕보살은 관음사의 개산조(開山祖)가 되고 또한 창건주(創建主)가 되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기니 성덕산(聖德山)은 백제 이래로 수천년 동안 내륙에 있어서는 유일한 관음영지(觀音靈地)로 이어져 내려와 정유재란 전까지만 하여도 80여 동()의 건물을 자랑하였던 것이며 지금도 우리나라의 관음신앙(觀音信仰)을 서민적 염원 속에서 통불교적으로 널리 홍포(弘布)해 오고 있는 현장인 것이다.

 

한편 원홍장(元洪莊)의 아버지 원량(元良)은 딸과의 이별의 슬픔 속에서 눈물을 흘리다가 홀연히 눈을 떴다.

衆生被困厄 無量苦逼身 觀音妙智力 能救世間苦(중생이 때때로 곤액을 입어 한량없는 고통이 핍박하여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 모든 고통 건져주리라)

 

관세음 보살의 염피관음력(念被觀音力)이 이와 같이 이 세상 모든 고통 건져주리라 하였듯이 장님 원량은 광명(光明)을 찾을 수 있었으며 그 뒤로 95세의 나이까지 복락(福樂)을 누리면서 여생을 평안하게 살았다고 한다.

 

또한 홍장으로부터 금은보화를 시주받은 성공(性空)대사는 홍법사(弘法寺) 대작불사를 환희 원만하게 회향하였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성덕산 관음연기(聖德山 觀音緣起)에서 볼 때 관음성상(觀音聖衆)은 실로 원홍장(元洪莊)의 효심(孝心)이 불심(佛心)으로 나타난 것이며 또한 4만단의 폐백과 금은진보(金銀珍寶)를 기꺼이 법보시(法布施) 하였으며 온갖 정업을 행하였고 마침내는 관음성상(觀音聖衆)을 원불(願佛)로 조성하여 본국(本國)에 이르게 하여 뒤에 성덕(聖德)보살에 의해 열매를 맺어 더욱 빛나게 하였다.

후세인(後世人)은 홍장(洪莊)과 성덕(聖德)보살을 관세음(觀世音)보살의 화신(化身)으로 추앙하였으며 이로써 전라남도 곡성군(옛 옥과현) 성덕산(聖德山) 관음사(觀音寺)의 관음연기(觀音緣起)는 오늘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여행-전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순 만연사  (0) 2020.02.20
곡성 태안사(泰安寺)   (0) 2020.02.20
구례 화엄사 구층암(九層庵)  (0) 2020.02.15
영광 불갑사(佛甲寺)   (0) 2018.08.19
영광 불갑저수지 수변공원(水邊公園)  (0) 2018.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