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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남

구례 화엄사 구층암(九層庵)

by phd100 2020. 2. 15.


화엄사 구층암(九層庵)

전남 구례군 마산면 지리산 화엄사경내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산내 암자이다. 전하는 유물로 보아 신라말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며, 사찰 이름으로 보아 본래 구층석탑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연혁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건물로는 천불보전과 수세전·칠성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중 천불보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건물로 아미타여래불을 모시고 있으며 뒤에는 토불(土佛) 1,000개가 모셔져 있다.

탱화는 제석탱화가 걸려 있다. 수세전은 정면 2,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산신탱화와 칠성탱화가 모셔져 있다. 요사채는 천불보전 좌우에 있다. 유물로는 동종과 석등·삼층석탑 등이 있다.

 

<구층암동종(九層庵銅鐘)>

이중 구층암동종(九層庵銅鐘)1728(조선 영조 4) 조성된 것이다.

화엄사의 산내암자 구층암에 있는 조선 후기의 구층암 동종(九層庵銅鐘)은 화엄사 대웅전에서 뒤쪽으로 돌아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산내암자인 구층암(九層庵) 법당에 있는 범종이다,

제작 당시에는 화엄사의 또 다른 암자였던 내원암(內院庵)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신(鐘身) 높이 53, 용뉴(龍鈕) 높이 14, 지름 46크기이다. 종신에는 상대와 하대가 생략되었고, 상단에 '()'자가 새겨져 있다. 중앙에 4개의 유곽(遊廓)이 조각되었고, 각 유곽 안쪽에는 9개의 유두가 돌출되어 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두광을 갖추고 구름을 딛고 서 있는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여의주를 문 두 마리의 용이 새겨진 용뉴(종을 매달기 위하여 만든 용 모양의 고리)가 있으며, 음통(音筒)은 생략되었다.

 

<요사체>

요사 처마 아래에는 1829(순조 29) 석잠(碩岑)이 쓴 해동봉성현지리산화엄사봉천암중수기1900(광무 4) 송암(松庵)이 쓴 등봉천암(登鳳泉庵)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천불보전(千佛寶殿)>

천불보전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불전으로, 정면의 어간이 양 협간보다 두배 정도 넓다. 화려한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으로 아담한 규모에 비해 장중하고 화려한 맛을 풍긴다. 내부에는 아미타불과 천불상 및 제석탱이 봉안되어 있다.

 

어간의 문살은 소슬살문이며 좌우 협간의 문살은 빗살문이다. 화엄사 원통전과 대웅전의 문살도 역시 빗살문으로 깔끔한 맛을 풍긴다. 이와 대조적으로 어간의 소슬살문은 단아한 가운데 화려한 멋이 숨어 있다.

 

기둥 위 주심포 밑에는 거북의 등에 올라탄 토끼상이 조각되어 있어 민속적인 흥미를 일으키고 있으며, 어간 기둥머리에는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살미가 역동적으로 뻗어오르는 위에 연꽃봉오리가 벙글어 있어 아담한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잡화엄식의 장중한 맛이 있다.

 

<수세전(壽世殿)>

수세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두 칸, 측면 1칸의 칠성각이다. 내부에는 근래에 봉안한 산신탱과 칠성탱이 있다.

수세전은 초라한 듯하면서 예쁘다. 창방에 민화풍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이채롭다.

 

<선실(禪室)>

선실은 모과나무 그대로 건물의 기둥을 삼은 것으로 잘 알려진 요사채이다. 좌우에 방장실을 두고 가운데에 큰방을 둔 구조로서, 역사적으로 선실·강원·결사도량 등으로 쓰였던 까닭에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가령, “선원을 비롯하여 강원”, “본존요사”, “대방채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선원”·“강원”·“본존요사등의 이름은 당대의 쓰임새에 맞추어 명명되었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으며, “대방채라는 이름은 큰방을 둔 요사채로서 다용도 건물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현재에는 다실(茶室)로 쓰이고 있으므로 다실로 불려도 무방하나, 과거 이곳이 용맹정진 선원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유서 있는 역사적 도량이라 할 것이므로 그 전통을 존중하여 선실이라 부르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선실이라는 이름의 사용은 한국불교연구원에서 펴낸 한국의 고찰 제8권의 «화엄사»(일지사, 1976)에 보인다.

 

선실은 팔작지붕에 정면 7, 측면 4칸이다. 어느 건축가는 이 선실의 건축에 감명을 받고 자연주의 건축이라 명명했다.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었다. 1961년 각황전 보수작업에 참여한 목수 일행이 구층암 일대에 흩어져 있던 석탑 부재들을 찾아내어 복원한 것이다.

현재 구층암 뜨락에는 또 한 기의 삼층석탑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석탑 부재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은 기단이 2층이고, 상층 기단은 4장의 판석을 짜맞추어 만들었다. 탑신부 중 1층 한면에는 결갑부좌한 불상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탑신 1층 앞면에는 여래좌상을 새겨놓았으나, 탑의 본래 앞면이 어느 쪽이었가는 확실하지 않다. 아울러 탑의 위치 또한 절집의 향배와 어긋나는 면이 있다. 탑의 원위치와 관련해서는 추측만 있을 뿐 확실한 자료는 없다.

 

신라말에서 고려초로 연대를 잡는다. 단정한 맵시를 자랑하는 이 석탑은 일류봉 쪽에서 해가 뜰 때 여래좌상이 그림자를 떨어뜨리며 선정에 든 상호를 밝게 드러내신다.

 

<석등과 배례석>

삼층석탑과 마찬가지로 1961년 각황전 보수작업에 참여한 드잡이 일행이 복원한 것이다. 당시 구층암 주변에 흩어져 있던 지대석·하대석·옥개석 등 부재들을 수습하였으나 기둥돌과 불박기집은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남은 부재의 규격에 맞게 기둥돌과 불박기집을 새로 만들어 세웠다. 이 석등은 옛 장인의 솜씨를 이어받은 뛰어난 현대 장인의 안목과 옛 부재가 결합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불보전 앞에 있는 이 석등은 높이 2.4미터로 기본적인 8각석등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석등 양식은 일반적인 신라 석등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제작연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석등은 고려초의 유물로 추정되며, 옥개석 윗면에는 복련이 조각되어 있고 상륜에는 보주가 남아 있다.

간석과 화사석은 1961년에 보수하였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석등 앞에 놓인 배례석은 옆면에 무늬곽을 베풀고 윗면 한가운데에는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다.

 

예로부터 암자 이름의 끝말로는 난야’, ‘정사’, ‘’, ‘등등이 쓰였다. 구층암도 이러한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아, ‘구층난야’, ‘구층대’, ‘구층암으로 불린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먼저 <화엄사사적>(1924)을 보면 구층난야라는 이름이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나며 이후 구층대라는 이름이 뒤이어 나타난다.

구층대라는 이름은 1937년의 <구층대상량문>의 제명에서도 보이는 바, 이 상량문은 과거의 역사를 충실히 이어받은 기록이라는 점에서 구층대라는 명칭이 이전부터 두루 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암자 이름인 구층암1899년 매천 황현이 쓴 <중수구층암기>의 제명에서 최초로 확인되며, 이후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1918), <속수구례지>(1961) 및 일제강점기의 관련 기록들에서 두루 확인되고 있다.

현재 구층암에 들 때 처음 보이는 <구층암>이라는 편액은 걸려 있는 위치로 보나 서법으로 보나 근현대에 쓴 글씨로 추정된다.

 

위와 같은 사료들을 종합하여 볼 때, ‘구층난야내지 구층대구층암보다 유서 있는 이름이며, 근현대기에는 구층대구층암이라는 이름이 한동안 병행하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층대라는 이름은 수행자들의 기록에서 줄곧 등장하는 반면, ‘구층암이라는 이름은 학자들의 붓끝에서 시작되어 보편화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세간에는 예로부터 이 암자에 구층석탑이 있었기 때문에 구층암이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이라고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추정으로 보인다.

 

앞서 말했다시피 암자의 이름이 구층난야’, ‘구층대’, ‘구층암등으로 불리다가 최종적으로 구층암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으나, 정신사적 배경을 볼 때 구층대라는 이름이 암자의 근본 취지에 부합한다고 본다.

특히 수행자의 가풍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구층대라는 이름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격의 규모가 암자임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구층암이라는 이름이 훗날에야 대외적으로 널리 쓰인 듯하다.

 

그렇다면 구층대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현존하는 문헌들 중에서 구층대를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노자의 <도덕경>으로, “구층의 누대(九層之臺)도 한 줌의 흙으로부터,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구절에 등장한다.

구층대(九層臺)는 구층지대(九層之臺)를 약칭한 것으로, 예로부터 인간이 건축할 수 있는 최대·최고의 건축물을 상징했다.

 

그리하여 구층대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대한 비유이기도 했다.

예컨대, 성현의 지위를 논함에 있어서 최고의 지위인 성인을 구층대에 오른 이로 비유하기도 하며, 선불교 문헌에서는 깨달음의 궁극을 구층대로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면, <만선동귀집>에서는 ()은 종자를 이미 싸고 있는 것과 같으며 [] 또 구층지대를 보는 것과 같으니, 곧 단박에 보느니라”(頓如種子已包[]又如見九層之臺則可頓見)고 언급하고 있다. 이밖에 규봉종밀의 돈점론에서도 비슷한 맥락에서 구층대를 언급하고 있다.

 

산승들은 이러한 정신사적 배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학자들이 편의상 구층암이라고 칭하던 시기에도 굳이 구층대라고 칭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구층암이라는 이름이 구층대의 정신사적 배경을 지운 것은 아니니 구층대대신 구층암으로 불리는 것을 아쉬워할 것은 없겠다. 다만 구층암구층대에서 유래했음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러나 구층탑이 있었기 때문에 구층암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주장은 위와 같은 수행자의 가풍을 간과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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