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석골사(石骨寺)
석골사는 경남 밀양시 산내면 운문산에 자리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석골사(石骨寺)는 삼국시대인 560년(진흥왕 12년)에 운문산 일출봉(일명 함화산)에서 비허선사(備虛禪師)가 창건하였다. 석골사라는 명칭 외에도 석굴사(石窟寺), 노전사(老殿寺), 석동사(石洞寺)라고 불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의해편의 보양이목(寶壤利木)조에 의하면 보양법사(寶壤法師)가 석굴사의 비허선사와 더불어 의형제를 맺고, 봉성사(奉聖寺)와 석굴사(石窟寺), 운문사(雲門寺) 등 세 절을 왕래하며 교분을 가졌다고 한다.
비허가 작은 암자를 짓고 보양(寶壤)과 서로 왕래하며 수도하였다는 이야기로 보아, 비허가 절을 창건하고 법조는 중창한 인물로 추정된다.
태조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할 때 경제적인 도움을 많이 주어, 고려 건국 후에는 암자를 9개나 거느릴 정도로 발전하였다. 한때 석굴사(石窟寺) 또는 노전사(老澱寺)라고도 불렀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활약하던 곳이었으며, 1753년(영조 11) 함화(含花)가 중창한 뒤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오다가 1950년에 불에 탔고, 1980년대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광전과 칠성각 · 산신각 · 요사채 2동이 있고, 유물로는 석조아미타삼존불과 절구·석탑 재료 등이 전한다.
이 중 석조아미타삼존불은 대광전에 있으며, 석탑 재료는 기단과 보주 등만 발굴되었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 박진이 의병을 규합하고 밀양인 손기양과 이경승이 의병을 일으켰던 곳이라고 한다.
<석골사에 전하는 전설>
석골사에 상좌스님과 스승인 주지스님이 있었다.
주지스님은 제자인 상좌스님보다 인망과 학덕이 못한것을 항상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께서도 상좌 스님을 먼저 하늘로 올라오게 했기문때에 항상 상좌스님을 죄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상좌스님 나란히 걸어가다상좌스님이 길가 보리밭에서 한창 익어가는 보리를 손로 슬쩍 만져본다는 것이 그만 이삭을 훑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본 주지스님은 기회를 놓칠세라 지팡이로 머리를 툭툭치며 영원히 강철이(지나가기만하면 초목이 다 말라 붙는다는 전설상의 독룡)가 되어라고 주문을 외웠다.
상좌스님은 주문을 풀어 달라 애원을 했어나, 주지스님은 주문을 그치질 않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상좌스님은 원망에 찬 눈초리로 강철이가 되어 호박소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후 옥황상제는 주지스님의 술법으로 상좌스님이 강철이가 된 줄은 깜박 잊고 주지스님을 먼저 승천시켰다.
물속에 갇힌 강철이는 억울함을 누르고 승천하기 위해 부처님의 공덕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후, 보리가 익어갈 무렵, 강철이는 옥황상제에게 승천시켜 줄 것을 간청했지만, 옥황상제는 죄값을 더 치루어야 한다며 강철이를 외면해버렸다.
화가난 강철이가 몸부림을 치며 떠다니는 곳에는 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져 농작물 수확을 거둘 수 없게 되었다.
자꾸 이런 일들이 되풀이 되어 결국 강철이는 승천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승천할 수 없는 강철이의 억울함으로 해마다 창녕 화황산과 삼량진으로 이어지는 산맥에 떠올라 다니며 몸부림을 쳤다.
보리가 익을 무렵이면 몸부림이 시작되었고, 강철이가 날아다니는 곳에는 우박이 쏟아져 농작물의 피해가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밀양, 창녕지방에는 보리가 익을 무렵이면, 가끔 천둥 번개가 쳐서 농작물을 망칠 때가 많다.
강철이가 살던 이곳이 호박같이 생겼다고 해서 호박소 또는 구연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때 가뭄이 들 때마다 밀양부사가 몸소 와서 기우제를 지내며 단비가 내리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상운암 인근에는 제2의 얼음골이라 불리는 자연동굴이 있는데,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동의보감』을 쓴 허준이 이곳에서 자신의 스승인 유의태를 해부한 곳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석골사가 처음 세워질 당시에는 석굴사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곳은 오래 전부터 스님들의 수도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