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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충북

단양 도담삼봉

by phd100 2021. 2. 20.

 

도담삼봉(嶋潭三峰)

단양 팔경 중에서 단연 으뜸인 제1경 도담삼봉,

일찍이 조선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의 유년시절을 함께해준 벗이자 퇴계 이황의 시심을 흔들어 놓은 명승지다.

도담삼봉은 정도전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였고 나라의 기틀을 잡았던 불세출의 인물이었지만, 훗날 이방원에 의해 살해당했던 정도전. 그는 경북 봉화 사람이지만, 출생지가 외가였던 단양이었다.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 와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덧붙여 당시 정선군에서는 단양까지 흘러들어 온 삼봉에 대한 세금을 부당하게 요구했는데 이에 일곱살의 어린 정도전이 정면으로 대응했다.

 

"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 오라고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어 아무 소용이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도로 가져가시오."

어린 정도전의 이런 주장으로 인해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고 정도전은 훗날 호를 삼봉이라 지을 정도로 도담삼봉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도담삼봉은 풍채가 당당한 남편봉을 중심으로 아담한 모양새의 처봉과 첩봉이 양옆을 지키고 있는데 특히 남편봉은 삼도정이라 불리는 육각 정자를 품고 있어 그윽한 운치를 더한다.

가운데 봉우리는 늠름한 장군처럼 위엄 있는 자태를 하고 있는데 이를 남편봉이라 부르고,

그보다 좀 작은 북쪽 봉우리는 처봉, 남쪽 봉우리는 첩봉이라 부른다. 이 삼봉 가운데 아내봉은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둔 남편을 미워하여 돌아앉은 모습을 하고 있고, 첩봉은 아기를 밴 모습으로 남편봉을 바라보고 있다.

 

첩봉을 왜 자식봉이라 붙이지 않고 첩봉이라 붙였는지 모르겠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둔 남편을 미워하여 돌아 앉은 본처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살펴볼수록 그 생김새와 이름이 잘 어울려 선조들의 지혜와 상상력에 새삼 감탄스러움을 느낀다.

 

석문(石門)

충북 단양군의 매포읍 하괴리에 위치하며 단양 8경중의 하나이다. 도담삼봉에서 강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왼쪽 강변에 있는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석문 주변에는 천연기념물인 측백나무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자라고 있는데 석문에 막혀 위로 자랄 수가 없어 강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여지도서』의 도담에 대한 기록에서 “석문(石門), 은주암(隱舟巖)이 마주하고 있다.”고 수록되어 있다. ‘석문’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대동지지』(단양편)에서도, 도담에 대한 기록에 “바위에 구멍이 뚫린 석문(石門)이 있다.”고 수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도담 옆에 “석문암(石門岩)”으로 표기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삼봉 맞은편에 “성문(城門)”으로 표기하고, ‘선인답(仙人沓)’에 대해 설명해 놓았는데,

석문의 왼쪽 아래에는 작은 굴이 하나 있다. 굴속을 들여다보면 마치 구획정리가 된 논두렁처럼 경계 지어진 암석에 물이 담겨져 있는데 신선이 농사를 짓던 논이라 하여 “선인옥전(仙人沃田)” 혹은 “옥전”이라 부른다.

 

옛날에 마고 할머니가 잃어버린 비녀를 찾기 위해 석문 밑을 긴 손톱으로 마구 파헤쳤는데, 이 때 만들어진 것이 아흔아홉 마지기의 선인옥전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석문에서 상류로 조금 더 올라가면 자라의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듯한 자라바위도 볼 수 있다.

 

 

단양팔경(丹陽八景)

① 도담삼봉(嶋潭三峰):단양 북쪽 12km 지점의 단양읍 도담리에 있다. 남한강의 수면을 뚫고 솟은 세 봉우리 가운데 남봉(南峰)은 첩봉(妾峰) 또는 팔봉이라 하고, 북봉은 처봉(妻峰) 또는 아들봉이라고 한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이 이 곳에 은거하여 자신의 호를 이 도담삼봉에서 본떠 삼봉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② 석문(石門):단양 북쪽 12km 지점의 도담삼봉 하류에 있다. 남한강변에 높이 수십 척의 돌기둥이 좌우로 마주보고 서 있는 위에 돌다리가 걸려 있어서 무지개 형상을 하고 있다.

 

③ 구담봉(龜潭峰):단양 서쪽 8km 지점인 단성면 장회리(長淮里)에 있으며, 남한강을 따라 깎아지른 듯한 장엄한 기암괴석으로 그 형상이 마치 거북같다 하여 구봉(龜峰)이라고도 하였다.

 

④ 옥순봉(玉筍峰):단양 서쪽 9km 지점의 장회리에 있으며, 그 솟아오른 봉우리는 자유분방하고 기상천외하여 예로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렀다. 1549년(명종 4) 단양 현감으로 부임한 이퇴계(李退溪)가 석벽에 ‘丹陽同門’이라 각명(刻銘)했다 하며, 우후죽순같이 솟아오른 천연적 형색이 희다 하여 옥순봉이라 하였다고 한다.

 

⑤ 사인암(舍人岩):단양 남쪽 8km 지점인 대강면(大崗面) 사인암리(舍人岩里)에 있으며, 덕절산(德節山:780m) 줄기에 깎아지른 강변을 따라 치솟아 있는데, 우탁(禹倬)이 사인재관(舍人在官) 때 이곳에서 자주 휴양한 데서 사인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⑥ 하선암(下仙岩):소백산맥을 흐르는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는 단양 남쪽 4km 지점인 단성면(丹城面) 대잠리(大岑里)에 있으며, 심산유곡의 첫 경승지로서 불암(佛岩)이라 부르던 3층의 넓은 바위를 조선 성종 때 임제광(林齊光)이 선암(仙岩)이라 부른 뒤부터 하선암이라 개칭하였으며 봄에는 철쭉꽃, 가을에는 단풍이 온 산을 물들이며 절경을 이룬다.

 

⑦ 중선암(中仙岩):단양 남쪽 10km의 단성면 가산리(佳山里)에 있으며, 삼선구곡(三仙九曲)의 중심지이다. 흰색의 바위가 층층대를 이루고 있으며, 효종 때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이 명명(命名)한 것으로 전해온다. 암계류(岩溪流)에서 쌍룡(雙龍)이 승천하였다 하여 쌍룡폭포라고도 한다.

 

⑧ 상선암(上仙岩):단양 남쪽 12km 지점의 가산리에 있으며, 중선암에서 약 2km 올라가면 수만 장의 청단대석(靑丹大石)으로 된 벽과 반석 사이로 흐르는 계수(溪水)가 폭포를 이루고 있어 절경이며, 선조 때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가 상선암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단양에는 그 밖에도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죽령(竹嶺) 산정에서 떨어지는 죽령폭포, 운선계곡(雲仙溪谷) 상류에 위치하는 칠성암(七星岩), 가을철의 단풍으로 절경을 이루는 북벽(北壁), 소백산맥 중에 솟은 봉우리와 계곡이 절경을 이루는 구봉팔문(九峰八門), 계절에 따라 변모하는 아름다운 금수산(錦繡山),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축성했다는 온달성(溫達城), 길이 약 2km의 자연굴 천장에 통혈(通穴)이 있어 일광이 반사하는 일광굴(日光窟), 천태만상의 절경을 이루는 고수동굴(古藪洞窟) 등 제2 단양팔경도 알려져 있다.

 

 

<사인암과 영월 장릉>

단양 팔경 중에서 단연 으뜸인 제1경 도담삼봉,

일찍이 조선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의 유년시절을 함께해준 벗이자

퇴계 이황의 시심을 흔들어 놓은 명승지다.

도담삼봉은 정도전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였고 나라의 기틀을 잡았던 불세출의 인물이었지만, 훗날 이방원에 의해 살해당했던 정도전. 그는 경북 봉화 사람이지만, 출생지가 외가였던 단양이었다.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 와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덧붙여 당시 정선군에서는 단양까지 흘러들어 온 삼봉에 대한 세금을 부당하게 요구했는데 이에 일곱살의 어린 정도전이 정면으로 대응했다.

"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 오라고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어 아무 소용이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도로 가져가시오,"

어린 정도전의 이런 주장으로 인해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고 정도전은 훗날 호를 삼봉이라 지을 정도로 도담삼봉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도담삼봉은 풍채가 당당한 남편봉을 중심으로 아담한 모양새의 처봉과 첩봉이 양옆을 지키고 있는데 특히 남편봉은 삼도정이라 불리는 육각 정자를 품고 있어 그윽한 운치를 더한다.

가운데 봉우리는 늠름한 장군처럼 위엄 있는 자태를 하고 있는데 이를 남편봉이라 부르고 그보다 좀 작은 북쪽 봉우리는 처봉, 남쪽 봉우리는 첩봉이라 부른다. 이 삼봉 가운데 처봉은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둔 남편을 미워하여 돌아앉은 모습을 하고 있고, 첩봉은 아기를 밴 모습으로 남편봉을 바라보고 있다.

 

첩봉을 왜 자식봉이라 붙이지 않고 첩봉이라 붙였는지 모르겠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둔 남편을 미워하여 돌아 앉은 본처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살펴 볼 수록 그 생김새와 이름이 잘 어울려 선조들의 지혜와 상상력에 새삼 감탄스러움을 느낀다.

 

사인암

"조선시대 승지였던 오대익은 여기서 신선놀음을 즐겼다고 합니다. 하인들을 시켜 저 꼭대기 소나무에 노끈을 매달아 나무로 깎은 학을 타고 흰 깃털 부채를 든 채 이 아래 맑은 못 위로 천천히 하강한 거지요."

 

"여기 바위에 새긴 바둑판을 보세요. 그 옆엔 '난가대(爛柯臺)'라는 세 글자가 보이지요. 썩을 난, 도끼자루 가. 말 그대로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는 뜻입니다."

 

덕절산 자락 강변에 우뚝 솟은 약 50m의 기암절벽과 그 옆으로 휘감아 흐르는 남조천(일명 운계천)이 절경인 사인암. 고려시대 유학자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이 정4품 벼슬인 사인(舍人)직에 있으면서 머물렀다는 곳이다. 그의 '백발가'(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시비가 입구에 서 있다.

 

추사 김정희가 '하늘에서 내린 한 폭 그림 같다'고 한 이곳에 일찍이 박제가·김홍도 등 숱한 문인·화가들이 다녀갔다.

그 흔적이 곳곳에 아로새겨진 각자(刻字)들이다. "단양8경에 모두 500여건의 각자가 있는데 이곳에 230여건이 있습니다."

 

 

이어 도담 삼봉과 석문을 둘러본 일행은 이곳 명물인 마늘정식으로 배를 든든히 채웠다. 다음 행선지가 이번 답사 주제인 '온달과 평강의 연가' 현장, 온달산성이었다.

 

◆'온달콤플렉스'는 낯뜨거운 誤讀

 

"온달을 그저 마누라 잘 만나 벼락출세한 사내로만 본다면 참으로 민망한 오독(誤讀)입니다."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 김부식이 그를 충신열전에 올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온달전의 핵심어는 '신(信)'입니다. 공주가 어릴 적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가 다른 혼사가 들어오자 '임금은 장난말을 하지 않는다'며 온달을 찾아간 것이나, 훗날 온달이 자원 출병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전사하자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 모두 신의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김부식은 온달과 공주를 통해 고구려의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려 했던 거지요."

다시 10분쯤 오르자 한눈에도 단단해 보이는 잿빛 돌벽이 나왔다. 성은 해발 427m 산 정상을 중심으로 7~8부 능선을 따라 둘러친 테뫼식이다. 성 위에 오르니 눈앞에 남한강이 U자로 굽이치는 장관이 펼쳐졌다.

"이 성을 누가 처음 지었는지는 설이 분분합니다. 출토 유물을 보면, 고구려가 쌓아 신라가 재축성한 것도 같습니다. 다만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보면 고노(古老)들 사이에 온달이 쌓았다는 말이 전해오고, 이 주변에 온달 설화가 많습니다."

 

"온달은 신라 군대와 아단성(阿旦城) 아래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넘어져 죽었다. 하지만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라고 말하자 그제야 관이 떨어졌다."(삼국사기)

 

선돌

소나기재 정상에서 단종이 영월로 들어 갈 때 잠시 쉬었는데, 신선이 노는 곳에 신선처럼 바위가 보였다고 해서 신선바위 즉 선돌이라 함

 

단종의 나이 열 여섯-

 

유배 길에 오르기 전 날, 정순왕후와 청룡사 <우화루>에서 단장斷腸의 이별을 나눈 후,그 이튿날-

영원히 (永)건너간다(渡)는,그래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청계천 황학동 동묘 앞의 영도교永渡橋에서 생이별을 한 후....

 

정순왕후는 그 길로 <정업원>이라는 초라한 움막을 짓고, 82세 그의 생을 마감 할 때 까지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안녕을 빌었다.

 

동망봉! 그것은 지금의 숭인공원 안에 있다.

 

단종의 유배길은 백성들의 울음으로 가득했다.유배의 행렬이 경기도 광주 땅을 지날 때 호송군졸의 눈을 피해 백성들은 행렬이 마을을 지난 뒤에야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알拜謁했으니 지금의 검단산 앞 경기 하남시 배알미동이란 이름이 그것이다.

 

단종이 유배 중 마른 목을 추겼다는 여주군 대신면 성구리의 <어수정御水井>,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단강초등학교 느티나무 정자에서 쉬었다 간 <단정지端亭址>, 운남리 고개에서 백성들이 절을 했다고 해서이름 한 뱃재拜峙- 주천 물미마을의 <어음정御飮井>과 <군등치君登峙>등......

 

경복궁을 떠난 지 꼭 7일 만에청령포에 당도했다지만, 이 역사의 현장을 보지도 못한 채-

 

서강이 유유히 휘어져 도는 물도리를 끼고 있는 땅청령포淸冷浦-

청령포는 삼면이 푸른 강으로 둘러싸이고 칼날 같은 산들이 얽히고설킨 천혜의 유배지다.

 

밤이면 피를 토하듯이 처절하게 울부짖는 두견새의 울음소리와 밤새도록 끊일 줄 모르고 흐르는 포구의 거친 물소리만 들려오는 첩첩산중-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단종애사 만한 비극이 어디 또 있을까?

 

정순 왕후는 매일 아침 유배지인 동쪽의 영월을 향하여 통곡하였고, 단종은 한양 땅이 바라보이는 층암절벽인 노산대魯山臺에 오를 때마다 정순왕후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부림쳤다.

 

소수서원의 모든 소나무가고려 때 유학자 안향선생을 배향한 사당을 향해 절을 했듯이 이곳도 단종어소를 향해 머리 숙여 절을 하고 있는 소나무가 많다.

 

<성삼문成三問의 역모逆謀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세조3년 1457년 6월 22일- 영월로 유배를 떠나면서 배웅 나온 환관宦官 안노安?에게 단종은 그렇게 말했다.

 

 

어린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단종의 처연한 자취보다는 끝내 죽음으로 그를 모셨던 신하들의 최후가 더욱 감동적이다.

 

단종을 청령포에 유배를 보낸 쪽이나죽음을 무릅쓰고 복위를 꾀했던 쪽 모두가 어린 단종의 죽음에 가담한 셈이다.

어린 단종을 권자에 앉히고,끌어내리고, 다시 복원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끝내 유배와 무고한 죽음으로 그를 끌고 갔으니 말이다.

그러나세상이 바뀌면 당장 눈앞의 이득만을 좇아 표변하는 요즈음 세태에 견주어 볼 때 삼족을 멸한다는 지엄한 왕명 앞에서도애처롭게 죽어 간 단종의 주검을 수습하고, 함께 통곡했던 사람들의 의협심과 그 충절만큼은 감동적이다.

 

단종의 시신은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내던져졌는데, 물길 따라 떠내려가지 않고 며칠이나 빙빙 돌았다.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자,

 

옳은 일을 하다가 그 어떠한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吾所甘心-하고 당시 영월호장이던 엄흥도가 시신을 몰래 거두어 동을지산冬乙旨山에 묻고는단종의 의복을 수습하여 계룡산 동학사를 찾아가 김시습과 함께 제사를 올린 후에 홀연히 잠적해 버렸다.

 

그로부터 84년 후-중종 36년, 신하들의 상소를 받아들인 중종은 단종의 묘소를 찾도록 명하였다. 그때 영월군수 박충원의 꿈에 단종이 현몽하여 간신히 묘를 찾아낸 곳이 동을지산-, 지금의 장릉이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으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 속을 헤맨다.

一自怨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孤身雙影碧山中 고신쌍영벽산중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窮限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 엔 달빛만 희고 피눈물 나는 봄 골짜기엔 낙화만 붉었구나.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血淚春谷落花紅 (혈루춘곡락화홍)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어쩌다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何柰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총

 

나흘간 내내- 요즈음 말로 물 폭탄이 쏟아져 청령포로 가는 뱃길마저 끊어지는 등, 물난리가 났다 이에 단종은 영월동헌의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관풍헌에서 생활하던 어린 단종은저녁노을이 물들 때면 홀로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부인 정순 왕후가 있는 한양을 바라보며 애절한 시를 읊었다. 일명 단종의 자규시다.

 

그러나 1457년 10월 24일-막내 숙부인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운동을 일으키고 이 일이 발각되자 순흥이 피바다, 불바다로 변했고마침내 그 여파로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단종도 숨을 거두니그의 나이 열일곱이다.

 

백제가 멸망 할 때 삼천 궁녀가 떨어져 산화 해 간 부여의 낙화암만 있는 게 아니다.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자 여섯 궁녀들이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후세 사람들이 이 절벽을 낙화암이라 일컬었고 민충사란 사당을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송현수는 교형에 처하고 화의군 등을 금방에 처하다. 노산군이 자살하자 예로써 장사지내다.>

세조실록 9권에 실린 1457년 10월 21일 2번째 기사다.

<병자록>에는 사약을 받는 순간 공명심에 사로잡힌 나졸이 갑자기 활시위로 단종의 목을 조른 것으로 나와 있다. 송현수가 누군가? 단종의 장인이다. 그가 죽자 단종도 자살했다니...역사도-실록도 픽션인가?

 

 

 

보덕사 :

숙종 24년, 1698년 ,단종이 복위된 후 그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 된 사찰이 보덕사다.

경내 산신각에는 백마를 탄 단종과 머루 바구니를 올리고 있는 한 노인의 그림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노인이 머루를 따서 관풍헌을 찾아가는 길에 백마를 탄 단종을 만났다.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여쭈니,

단종이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오.>하더란다.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고 급히 관풍헌으로 갔을 때 이미 단종은 사약을 받고 숨진 후였다.

 

그 전설로 해서 단종은 지금껏 태백산 산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영월의 사찰이라면의당히 적멸보궁이 있는 법흥사를 손 꼽지만보덕사도 들릴 만하다.

 

다른 건 몰라도 12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보덕사해우소>가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어흥미를 더 해 준다.

 

 

 

삼척 해신당(海神堂) 공원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신남마을에서는 동해안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근을 숭배하는 민속이 전해지고 있다.

 

해신당의 전설을 지니고 있는 이 마을의 바닷가 언덕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근의 조각공원을 조성해 놓고 있다.

신남리에는 처녀귀신을 위로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약 500년 전 이 마을에는 장래를 약속한 처녀 애랑이와 총각 덕배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애랑이가 바위섬에 미역을 다러 간다하여 덕배가 애랑이를 바위섬에 내려주고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심해져 해변으로 나와 보니 강풍과 집채 만한 파도가 일어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애랑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안타깝게도 높은 파도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애랑이 죽은 뒤로는 뱃일 나간 젊은이들이 죽거나 고기도 전혀 잡히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이러한 재앙이 죽은 애랑의 원혼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애랑이가 죽은 동족 바위섬을 향해 제사를 지내며 처녀귀신의 넋을 위로했지만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사람 중 한명이 홧김에 제사를 지내던 신목(神木)에 방뇨를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다른 배들은 여전히 빈배인데 그 어부만 만선으로 돌아 왔다. 그 어부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바다를 향해 소변을 보았는데, 그 후로는 바람도 그치고 고기잡이 배 마다 만선이 되었다고 한다.

 

처녀귀신이 원하는 것이 바로 남자의 정기임을 안 마을사람들은 남근을 깎아 제물과 함께 바쳐 혼인을 못한 원한을 풀어 주었다. 그 후로는 다시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정월 보름과 시월의 오(午)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정월 보름에 지내는 제사는 풍어를 기원하는 것이고, 말의 날인 시월 오(午)일에 지내는 제사는 12지신의 동물 중에서 말의 거시기가 가장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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