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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중국

중국 산시성(山西省) 면산(綿山) 개자추묘(介子推墓)

by phd100 2014. 7. 11.

1) 개자추묘(介子推墓)

중국 산시성(山西省·산서성) 지에시우시(介休市) 면산(綿山) 정상부근 백수령에 진나라 충신 개자추묘가 있다.

서현곡 입구에서 동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정유장에 내리면 개자추묘와 개공사당으로 가는 갈래 길을 만난다. 개자추묘는 산으로 더 올라 가야하고, 개공사당은 평지로 쉽게 걸어 갈 수 있다.

산등성이를 30분정도 오르면 개자추의 묘가 나온다. 이곳을 백수령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있는 두 그루의 측백나무 모양이 개자추와 그의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여 사람들은 ‘모자나무’라고 부른다.

개자추의 묘역에는 원, 명, 청대의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그 양 옆에는 돌기둥이 있는데 측백나무들이 보기 좋게 그 주위를 에워싸고 심어져 있다. 묘역 앞에는 조그만 버드나무가 한그루 심어져 있는데 이 버드나무 아래에서 개자추가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버드나무는 요 근래에 심은 것으로 보이며 그 때 그 버드나무의 후손이라고 한다.

 

2) 개공사(介公寺)

백수령에서 우측으로 난 길을 내려가면 개공사라는 절이 있는데 개공사 안에는 개자추 모자의 상이 안치되어 있다.

편전 벽에는 개자추의 생애를 기리는 그림과 시문이 있다.

넓은 주차장 앞 인공 수직 담 벽에 새겨진 황금색의 목숨 수(壽)자가 만 개가 적혀있는 만수도(萬壽圖)가 있다.

이곳 만개(萬字)의 수(壽)자 중에 똑같이 생긴 글자는 한자도 없다고 한다. 대단한 역사(役事)가 아닐 수 없다.

 

개자추의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이 진 문공의 뜻은 아니었다. 고집을 부리는 개자추를 조정으로 불러내기 위해 면산의 3면에 불을 지르고, 나머지 한쪽에서 기다리다 개자추를 데려오라는 것이 옛 주군의 명령이었다.

개자추의 출사로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간신들이 면산을 모조리 불태워 개자추 모자를 죽게 한 것이다. 진 문공이 안타까워하며 개자추가 죽은 날 불을 쓰지 못하게 하여 찬 음식만 먹게 해서 비롯된 것이 한식(寒食)이다.

그러나 개자추는 면산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개공사당은 개자추가 죽어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이곳 일대에서는 신앙처럼 받들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 있었던 개공사당을 일제가 훼손하고 파괴했던 것을 최근에 다시 거창하게 확장 복원했다. 이토록 깊은 산골짜기까지 와서 역사적 인물의 유적을 훼손하고, 중국인의 정신을 붕괴시키려 한 일본 제국주의의 악랄함을 엿볼 수있다.

 

3) 서현곡(栖賢谷)

서현곡(栖賢谷)은 25억년 전에 형성된 천연 대협곡으로 한적하고,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깊은 계곡이다.

이 관광구에는 봉후정, 청풍동, 초범동, 용옥취소, 상은순사, 현선조롱박, 순호의신 등 명승지가 80여곳이있다.

협곡으로 하천이 흐르고, 바위가 크고 절벽이 가팔라 10여개의 구름다리를 지난다.

작은다리 큰다리를 지나면서 아찔함과 즐거움을 함께 맛 볼 수 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협곡 가운데서 하늘 한번 쳐다보면 물소리와 어우러져 세상걱정이 사라지고 자신이 신선이 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전설에 의하면 개자추가 어머니와 함께 은거하러 갈 때 이곳을 지나 갔다고 한다.

그후 천년동안 개자추의 “충성하고 효도하며 깨끗하고 강직함 뿐만아니라 위대한 인격과 공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공헌정신은 역대 왕조의 무수한 무인과 문인들의 추앙을 받았기 때문에 이곳 서현곡은 현인을 찾고 성인을 방문하는 곳이 되었으며, 심신을 수련하여 성인의 자취를 느껴보는 한적한 곳이 되었다.<한국인을 위한 안내판에서 발췌>

 

4) 서현곡(栖賢谷)봉후정(封侯亭)

북송 원풍 원년(1078년)에 송나라 신종은 나라에 가뭄이 들자 하늘에 비를 구하는 기우제를 지냈는데, 이때 개자추가 나타나 중원대지를 흠뻑 적시는 비를 내리게 해 주었다. 이에 신종은 개자추를 길혜후(惠侯로) 봉하였고, 재상 문언박을 면산에 파견하여 칙봉하게 하고 정자를 지어 봉후정이라 하였다.

 

 

5) 개자추의 얘기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사람들은 한식을 냉절 또는 숙식이라고도 불렀다.

한식의 유래는 중국 옛 풍속에 "이날은 풍우가 심하여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에서 왔다"는 〈개자추전설 介子推傳說〉이 전해진다.

중국 춘추시대에 공자(公子) 중이(重耳)가 망명 · 유랑하다가 진나라 문공(文公)이 되어 전날의 충신들을 포상했다.

이때 과거 문공이 굶주렸을 때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바쳤던 충신 개자추가 이 포상자들 중에 들지 못하자 개자추는 부끄럽게 여기고 산중에 들어가 숨어버렸다.

문공이 뒤에 잘못을 뉘우치고 그를 찾았으나 산중에서 나오지 않으므로 불을 놓으면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불을 질렀다.

그러나 개자추의 출사로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간신들이 면산을 모조리 불태워 개자추 모자를 죽게 한 것이다.

끝내 나오지 못하고 홀어머니와 함께 서로 껴안고 버드나무 밑에서 불에 타 죽었다

. 이에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이날은 불을 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이날 나라에서는 종묘(宗廟)와 각 능원(陵園)에 제향을 지내고 관공리들에게 공가(公暇)를 주어 성묘하도록 했다. 민간에서는 산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낸다.

농가에서는 이날 농작물의 씨를 뿌리기도 한다. 조선시대 내병조(內兵曺)에서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에 구멍을 뚫고 삼으로 꼰 줄을 꿰어 양쪽에서 톱질하듯이 잡아당겨 불을 만들어 임금께 올린다.

임금은 그 불을 홰에 붙여 관아와 대신들의 집에 나누어주었는데, 이는 불의 주력을 이용하기 위해 불을 소중히 여기는 숭배사상의 전승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