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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시성(山西省) 평요현(平遙縣) 평요고성(平遙古城)

by phd100 2014. 7. 16.

평요고성(平遙古城)

 

평요고성(平遙古城)은 중국 산시성(山西省) 태원(太原)에서 90km나 떨어진 평요현(平遙縣)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이다. 황토고원의 산시성은 중국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탄의 매장량이 엄청나게 많은 성이다.

그러므로 광산주들은 부유층이 많으며 근로자들은 그에 비하여 빈곤하다. 주로 한족(漢族)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외 민족으로는 회족(回族), 만주족(滿洲族), 몽고족(蒙古族)이 이곳에 거주를 하고 있다.

산서성에는 오대산(五臺山)과 더불어 운강석굴도 있지만, 이곳 평요고성(平遙古城)도 유명하다.

 

평요고성(平遙古城)은 여강고성(麗江古城), 대리고성(大理古城)과 더불어 중국의 3대 고성가운데 하나이다. 그중 평요고성은 흙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성벽(城壁)과 성문(城門)으로 유명하다.

 

평요현(平遙縣)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성은 다른 성과 다르게 성벽의 경계가 곧 마을의 경계이다. 그러므로 성곽(城郭)으로 둘러 싸여진 성내의 도시라고 생각을 하면 된다.

평요고성은 서주(西周) 선왕(宣王)이 처음으로 건설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니 기원전 827~782년으로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서주의 장수(將帥)이며 정치가, 문학가이기도 한 윤길보(尹吉甫)의 군대가 이곳에 주둔하기도 하였다. 그 후 명나라 청나라시기에 개축을 거듭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평요고성은 지금도 사람들이 거주를 하고 있다. 인구도 4만 2000명 정도이고, 성의 넓이는 680,625평정도이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성안에는 사원(寺院) 묘사(廟祠) 누각(樓閣) 현아서(縣衙署) 등 고대의 건축물이 원형 그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고성(古城)내부에는 골목길만 하여도 100개가 넘는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른 시가지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다 갖추고 있는 성중(城中)의 도시이다.

 

평요고성 안에는 명나라 때부터 유명한 소기(小器)가 특산품이다. 그리고 성벽의 높이는 12m이며 총 길이는 6.4km이다. 성문은 모두 6개이고 문 밖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다.

이는 평요고성이 다른 표현으로 오구성(烏龜城)이라 불리기에 풍수지리학을 바탕으로 성을 수축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물 밖 2개의 우물은 거북이의 눈을 나타낸다. 북문(北門)은 꼬리이며 동문 서문에는 각각 2개의 문이 있으니 이것은 거북이의 다리를 표현한 것이다.

 

* 평요고성 내부에는 민가만 하여도 3,800여 채가 된다. 이 민가들은 거의 기와를 사용하여 지은 흙집이 대부분이다.

 

* 평요고성의 시가지 동쪽에는 사찰이 많고 서쪽에는 부자가 많으며 남쪽에는 상가가 즐비하고 북쪽에는 부유하지 못한 이들이 주로 거주를 하고 있다. 그리고 옛날에는 각 가정마다 문(門)의 장식으로서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 성내에 도교사원인 성황묘(城隍廟)가 있고, 맞은편에는 문묘(文廟)가 있다. 이 사원 안에는 유교를 살펴볼 수 있는 묘원(廟院)있다.

 

* 표국(鏢局)이라는 건물은 “빠오쥐”라고 하여 평요고성의 무술을 알아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 그리고 일승창(日升昌)이라는 건물도 둘러보아야 하는데, 이곳이 바로 중국 최초의 은행건물이다. 그만큼 평요고성은 금융업이 일찍부터 발달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일승창은 중국 최초의 표호(票號 : 환으로 보내진 돈을 현금으로 바꿔주는 금융업자)로 중국현대 은행의 아버지이다.

 

평요는 산서에서 가장 큰 상품집산지로서 상업의 발달은 금융업의 발달을 이끌었고, 평요의 상인 이씨는 청나라 도광3년 (1823년) 일승창(日升昌)이라는 표호를 만들었다.

대청금융제일가(大清金融第一街)인 평요고성의 서대가에 있으며, 100년 동안 번성하였다. 전국 35개의 도시에 진출하였으며 정부의 은(銀), 조세, 군인의 급여, 대출, 예금 등의 업무를 보았다. 멀리는 미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에도 진출하였으며 청나라 경제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일승창의 입구에 걸린 편액에는 ‘일승창기(日昇昌記)’라고 쓰여 있는데 “日”자는 동쪽하늘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듯 사업이 번창하라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이 편액은 청나라 가경말년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진항(陳沆)의 필체라고 한다.

 

일승창에는 총 21채의 건물이 있고, 넓이는 1400㎡이다. 남북으로 마련된 정원에 3진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동원은 좁고 긴 모습을 하고 있고, 서원은 일신중표호(日新中票號: 개인이 운영하는 금융기관)를 병합한 것이다. 일신중표호는 2진의 규모이며 2층의 누각식 건축물이다. 두 표호(일신중과 일승창) 모두 산서민가의 전통특색을 잘 갖추고 있다.

 

일승창에는 영업용 방과 접견실, 그리고 보조용 방들이 있다. 전원(前院)에는 궤방(櫃房), 신방(信房), 장방(賬房)이 있고, 후원(後院)에는 접견실, 손님방, 주인방 등이 있다. 주요 건물 뒤 쪽으로 하인들의 방과, 주방, 화장실, 창고 등이 있다.

 

* 이랑묘(二郞廟)

평요고성 북대가 79호(北大街 79號)에 위치한 도교사원이다. 이랑신 양전(楊戩)을 모신 사원으로 이랑신은 옥황상제의 조카이자 천궁을 지키는 대장이기도 하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을 체포하는 것도 이랑신이다.

동향으로 건설되었으며 3진의 규모(문을 세 곳 지나야 하는 규모)를 갖추고 있다. 명대에 건설된 것으로 산문, 희대, 종고루, 원진전, 토지전, 신마전으로 되어 있다.

 

신마전은 이랑신이 탄다고 하는 용마(龍馬)를 모신 곳이다. 원래 이 말은 민강(岷江)에 사는 용신이었는데 수시로 바람을 불어 풍랑을 일으켰다. 그래서 이랑신은 이 용신을 굴복시켜 자신의 용마로 삼았다고 한다. 지금도 민강 주변에서는 복용관(伏龍觀)을 쉽게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