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국 사찰 & 함께 가고 싶은 곳
여행-강원

강릉 보현사

by phd100 2021. 9. 3.

 

보현사

강릉시 성산면 보현산(普賢山)에 자리한 보현사(普賢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보현사는 650년(진덕여왕 4)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처음 세운 사찰로, 후에 낭원대사(朗圓大師)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지장선원(地藏禪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3단의 장대석(네모지고 긴 석재로 기단에 가로로 길게 놓은 돌) 기단을 설치하고 막돌 덤벙 초석을 기둥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교하게 그레질 한 후, 둥근 기둥을 세웠다. 정면 3간, 측면 3간의 다포 양식이며,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경내에는 낭원대사의 사리탑인 낭원대사오진탑(보물 제191호)과 낭원대사오진탑비(보물제192호)가 있어 이 사찰의 역사적 가치를 말해 주고 있다.

 

보현사는 태백산맥 대관령과 선자령 바로 아래에 자리하기 때문에 산세가 높은 만큼 주변 경관이 뛰어나고, 깊응 골짜기에 위치한다.

대웅전·영산전·지장전·삼성각.금강루 등의 전각들이 법식에 맞게 자연과 잘 어울려 있어 산사의 그윽한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보현사 십육나한도(普賢寺十六羅漢圖)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1호. 무명 바탕에 채색. 세로 99.2㎝, 가로 193㎝. 월정사 성보박물관 소장. 십육나한은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阿羅漢果)에 이르렀으나 미륵(彌勒)이 올 때까지 열반(涅槃)에 들기를 미룬 채 이 땅에 남아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소임을 맡은 16명의 불제자이다.

십육나한은 『불설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佛說大阿羅漢難堤密多羅所說法住記)』에 근거한다. 나한은 십육나한, 십팔나한, 오백나한으로 무리를 이루어 신앙화 되는데, 그 중 십육나한은 나한의 성격이 가장 집약되어 있는 구성이라 할 수 있다. 보현사 십육나한도는 십육나한의 특성이 잘 반영된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현재 두 폭만이 남아 있다.

 

보현사 십육나한도는 한 화면에 등장하는 여러 존자들이 유기적으로 무리를 이루는 소위 ‘군집식 구도’를 취하고 있다.

조선시대 십육나한도가 대부분 존자들을 개별적으로 표현했던 것과 비교해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작품이다.

이러한 화면 구성 방식은 이후 문경 김룡사 십육나한도(1888), 대구 은해사 백흥암 십육나한도(1897), 해남 대흥사 십육나한도(1901) 등으로 계승된다.

십육나한을 비롯하여 권속과 산수, 경물 모두 표현이 사실적이며 서양화법 중 음영법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있어 근대기 불화의 양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 말기 십육나한도 중 화면 구성과 표현에서 개성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작품인 동시에 근대기의 대표적 불화로 의의가 크다.

 

◇보현사 석조아미타삼존불상(普賢寺 石造阿彌陀三尊佛坐像)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불상 높이는 아미타불좌상 92㎝, 관음보살 81㎝, 대세지보살 81㎝. 주존인 석조삼존불좌상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협시보살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아미타불 내부에서 조성발원문이 발견되어 삼존불이 1691년(숙종 17)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기록된 승려 3인과 속인 21인의 이름은 조선 후기 불교 후원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불상 발원문 구성과 달리 불상 원봉안처에 대한 구체적인 명시가 없고, 불상이운대시주(佛像移運大施主)가 발원문의 문두에 나오는 점을 보면 불상의 조성지와 봉안처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보현사 낭원대사탑(普賢寺 朗圓大師塔)

보현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승탑이다. 보현사에 자리하고 있는 낭원대사의 사리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무너져있던 것을 사찰입구에 복원해 두었다가, 1991년 다시 원래의 자리인 산꼭대기 주변으로 옮겼다.

 

◇낭원대사탑비

낭원대사탑비이 고려 태조 23년(940)에 건립되었으므로, 이 탑비도 이 때 같이 세워놓은 것으로 보인다.

 

낭원대사(834∼930)의 탑비은 대사의 출생에서부터 경애왕이 대사의 덕을 기려 국사로 예우한 사실 및 입적하기까지의 그의 행적이 실려 있다. 대사가 96세로 입적하자 왕은 '낭원'이라는 시호와 '오진'이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대사가 입적한 지 10년 뒤인 고려 태조 23년(940)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가 짓고, 서예가인 구족달(仇足達)이 글씨를 썼다.

 

 

'여행-강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릉 용연사  (0) 2021.09.19
평창 발왕산스카이워크  (0) 2021.09.19
강릉 안반데기  (0) 2021.09.03
평창 육백마지기  (0) 2021.09.03
삼척 덕봉산 해안생태탐방로  (0) 2021.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