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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인천

강화 고려궁지(高麗宮址)

by phd100 2022. 4. 22.

 

고려궁지(高麗宮址)

강화읍 관청리에는 고려시대 때 이곳에는 궁궐이 있었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1232년 고려 고종19년에 왕도가 강화로 옮겨졌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로 원종 11년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사용되었다.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의 궁궐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이후 대몽 항쟁기 39년간 고려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골과의 화친 후 고려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 건물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의 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된 사실이 있으며, 그 후 고려 궁터에는 조선 궁전건물(장령전, 행궁, 만령전, 봉선전, 외규장각, 척천정, 세심재 등) 및 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 시 프랑스군에 의해 건물 등이 소실되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있다.

이제는 대부분 근처에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현재의 고려 궁지는 고려시대 궁궐 영역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래의 영역은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고려 궁지 안으로 들어가면 보물 제11호 강화동종, 시도유형문화재 제26호 이방청, 시도유형문화재 제25호 강화유수부동헌과 외규장각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한 곳으로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다.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특별하게 비단을 사용하였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를 사용하였으며, 해서체로 정성 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하였다.

병인양요 당시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프랑스군의 눈을 사로잡은 것도 채색 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병인양요는 고종 3년(1866)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과 프랑스 신부 11명이 처형된 사건을 빌미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무력 침범한 사건이다.

우리 민족이 경험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와의 전쟁이었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 함대는 양민을 학살하고, 조선의 왕실 서고였던 외규장각을 불태워 6,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다. 또한 의궤를 비롯한 340여 책의 왕실 문서와 은괴 수천 냥을 약탈한 사건이다.

 

최우(崔瑀)
본관은 우봉. 뒤에 이(怡)로 개명했다. 아버지는 충헌(忠獻)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추밀원부사로 있다가, 1219년(고종6) 아버지의 뒤를 이어 최고 집정자가 된 그는 동생 향(珦) 등을 포함한 반대파를 제거하여 지위를 굳히는 동시에 자신이 축적해둔 금은보화를 왕에게 바치고, 아버지가 빼앗은 공사전민을 주인에게 되돌려주었으며, 부패한 관리를 내쫓고 대신 가난하고 지체 낮은 인재들을 등용했다.
1225년 관리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정방을 자신의 집에 설치했다. 무력지배기구인 사병집단을 의미하는 도방을 확대하여 자신의 호위와 친척 및 외부에 대한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1231년부터 대대적인 몽골군의 침입이 개시되자 1232년 국왕을 받들고 강화로 천도했다. 또한 개성 사람들을 강화로 옮기게 하고, 여러 지역의 백성들도 산성과 해도로 피난하게 하는 등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선정을 베풀기도 했지만 사치와 전횡이 심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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