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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인천

강화, 신비의 땅, 생명의 땅 강화(江華)

by phd100 2022. 3. 13.

 

신비의 땅, 생명의 땅 강화(江華) !

강화를 뭘 보러 가느냐고 한다면 당신은 무어라 대답할 건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니산이 있고, 조선말기의 전쟁 터였고, 유명한 고찰 전등사가 있으니까 한번쯤 가볼 만 하지….

 

강화, 그곳은 한번쯤 가볼 만한 곳이 아니다. 여러 번 가 봐도 새롭고 신비한 기(氣)와 생명을 매번 느낄 수 있는 곳이다.(그래서 生氣處라고도 한다.)

 

강화는 경기도 북서쪽에 위치하는 인천광역시에 속하는 군의 하나. 면적 407.86㎢로 한국의 섬들 가운데 다섯 번째로 큰 강화도와 15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군청소재지는 강화읍(江華邑) 관청리(官廳里)이다.

 

본래 고구려 혈구군(穴口郡)이었고 신라시대에는 해구군(海口郡)으로 불리었다. 고려초에 열수(洌水;한강) 어귀가 되므로 열구진(洌口鎭), 940년(고려 태조 23) 강화로 개칭 후, 강주(江洲), 강도(江都), 강화부로 되었다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 1627년(인조 5)에 강도(江都), 1896년 강화부, 1906년에 다시 강화군, 73년 강화면(江華面)이 읍(邑)으로 승격되었으며, 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현재 강화군은 강화읍(江華邑) 1읍, 길상(吉祥)․선원(仙源)․교동(喬桐)․불은(佛恩)․하점(河岾)․화도(華道)․양사(兩寺)․서도(西島) 등 12면(面)으로 되어 있다.

 

강화군은 경기만에 위치하는 강화도․교동도․석모도 등의 여러 섬으로 되어 있으며 주도는 강화도이다. 강화도는 본래 김포반도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오랜 침식(浸蝕)으로 평탄화 된 후 침강운동(沈降運動)으로 육지와 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동쪽으로 염하(鹽河)를 끼고 김포반도와 마주하고 북쪽으로는 한강․예성강구(禮成江口)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및 황해도 연백군(延白郡)과 마주하며, 서쪽과 남쪽은 곧장 경기만(京畿灣)으로 열려 있다.

마니산(摩尼山, 468m)․혈구산(穴口山, 466m)․고려산(高麗山) 등의 잔구성산지(殘丘性山地)가 섬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강화의 명물 화문석은 고려시대부터 생산되는 강화도의 특산물인데 완초의 길이가 길어 품질이 우수하다. 1970년대 만 해도 강화는 섬인데도 전체 주민의 약 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인구의 6%만이 수산업(水産業)에 종사하고 있는데, 이는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으로 인하여 어로구역(漁撈區域)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또한 강화는 고등학교 7개교, 중학교 10개교, 초등학교 31개교, 기술학교 1개교, 고등기술학교 1개교, 대학교 3개교가 있는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한 곳이다. 군내에서 신자가 가장 많은 종교는 기독교이다.

 

그리고 정족산(鼎足山)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전등사(傳燈寺)가 있는데 이 절의 대웅전은 보물 제178호이고 약사전은 보물 제179호이다. 강화에는 고려시대에 몽고의 침입에 항쟁하기 위해 쌓은 강화산성(사적 제132호)이 있고, 선원면(仙源面)에는 이때 지은 호국사찰인 선원사의 절터(사적 제259호)가 있다.

또 김포반도를 마주보는 해안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신미양요(辛未洋擾)의 유적인 갑곶돈대(甲串墩臺)․광성보(廣城堡)․초지진(草芝鎭) 등이 줄지어 있다.

이 밖에도 봉천산 기슭에 보물 제10호 하점면 오층석탑․제615호 하점면 석조여래입상과 고려산 기슭에 사적 제224호 고려 고종의 홍릉, 읍내에는 제133호 고려궁지, 궁지내에 보관되고 있는 제11호 강화동종 등 470점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많은 역사적 사건을 겪은 곳이라 곳곳에 유적이 남아 있다. 여기선 초지진, 광성보, 덕진진, 강화역사박물관 등은 가서 보고 음미하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서 강화군은 '시의 고장', '재물의 고장', 그리고 '역사의 고장', 더 나아가 '역사박물관'이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고려궁지(高麗宮址)

강화읍 관청리에는 고려시대 때 이곳에는 궁궐이 있었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1232년 고려 고종19년에 왕도가 강화로 옮겨졌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로 원종 11년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사용되었다.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의 궁궐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이후 대몽 항쟁기 39년간 고려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골과의 화친 후 고려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 건물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의 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된 사실이 있으며, 그 후 고려 궁터에는 조선 궁전건물(장령전, 행궁, 만령전, 봉선전, 외규장각, 척천정, 세심재 등) 및 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 시 프랑스군에 의해 건물 등이 소실되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있다.

이제는 대부분 근처에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현재의 고려 궁지는 고려시대 궁궐 영역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래의 영역은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고려 궁지 안으로 들어가면 보물 제11호 강화동종, 시도유형문화재 제26호 이방청, 시도유형문화재 제25호 강화유수부동헌과 외규장각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한 곳으로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다.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특별하게 비단을 사용하였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를 사용하였으며, 해서체로 정성 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하였다.

병인양요 당시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프랑스군의 눈을 사로잡은 것도 채색 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병인양요는 고종 3년(1866)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과 프랑스 신부 11명이 처형된 사건을 빌미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무력 침범한 사건이다.

우리 민족이 경험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와의 전쟁이었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 함대는 양민을 학살하고, 조선의 왕실 서고였던 외규장각을 불태워 6,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다. 또한 의궤를 비롯한 340여 책의 왕실 문서와 은괴 수천 냥을 약탈한 사건이다.

 

최우(崔瑀)
본관은 우봉. 뒤에 이(怡)로 개명했다. 아버지는 충헌(忠獻)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추밀원부사로 있다가, 1219년(고종6) 아버지의 뒤를 이어 최고 집정자가 된 그는 동생 향(珦) 등을 포함한 반대파를 제거하여 지위를 굳히는 동시에 자신이 축적해둔 금은보화를 왕에게 바치고, 아버지가 빼앗은 공사전민을 주인에게 되돌려주었으며, 부패한 관리를 내쫓고 대신 가난하고 지체 낮은 인재들을 등용했다.
1225년 관리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정방을 자신의 집에 설치했다. 무력지배기구인 사병집단을 의미하는 도방을 확대하여 자신의 호위와 친척 및 외부에 대한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1231년부터 대대적인 몽골군의 침입이 개시되자 1232년 국왕을 받들고 강화로 천도했다. 또한 개성 사람들을 강화로 옮기게 하고, 여러 지역의 백성들도 산성과 해도로 피난하게 하는 등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선정을 베풀기도 했지만 사치와 전횡이 심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오읍약수(五泣藥水): 강화도 읍내 내성인 북산 진송루 부근(고려궁지를 바라보아 왼쪽으로 차로를 따라 10분쯤 가면 강화산성 북문 진송루 밖으로 왼쪽으로 5분)에 오읍약수가 있다. 이곳은 바다 건너 북녘땅인 개풍군 일대를 마주 바라보는 곳으로서 매년 실향민들의 망향제와 종교단체의 통일축원기도회가 열리는 곳이다.

오읍약수는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강토를 침입해오자 왕족과 비빈,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강화도로 피신해 와서 내성을 축조할 때였다.

오랜 가뭄으로 성을 쌓던 장정들이 목이 타서 몹시 허덕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더니 큰 바위가 깨지면서 그곳에서 샘물이 솟아 나오므로 장정들이 갈증을 풀게 되었고 그 후 이 약수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인근 주민들이 아끼는 약수터가 되었다.

‘오읍(五泣)’이라는 이름은 고려가 병란을 피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였을 때 모두들 떠나온 고향과 가족이 그리워, 한이 사무쳤으므로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신(神)이 울고, 임금과 백성이 울었다는 뜻에서 오읍(五泣: 泣: 울음 읍)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북녘땅의 잃어버린 고향산천과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이 빤히 바라다보이는 고향을 눈앞에 두고 눈물 흘리는 곳이 되었다.

이 무슨 역사의 악업(惡業)일까. 외침으로 인해 고향을 그리며 눈물짓던 약수터가 이제는 분단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하여 지호지간에 고향을 두고 다시 눈물짓게 되었으니 말이다.

 

 

◇용흥궁(龍興宮)

고려 궁지 주변은 볼거리가 많다. 고려 궁지로 오는 길에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곳은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는 용흥궁이다.

이 집은 옛 동네노인들 사이에 ‘원범이네 집’으로 불리는 곳으로서, 원범은 강화 도령으로 알려진 철종의 이름이다.

 

조선 말기 안동 김씨의 세도가 한창일 때 24대 헌종이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뜨자 대신들은 똑똑치 못한 왕족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여 정사를 손아귀에 쥐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강화도에 살고 있던 이원범이 지목되었다.

영조의 현손인 그가 강화에서 자라게 된 것은 할아버지인 은언군이 신유사옥 때 강화로 쫓겨나 사약을 받고 죽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농부로 전락한 그는 임금으로 봉한다는 대왕대비의 교서도 읽지 못하였다. 이 집은 본래 초가삼간이었으나 그가 왕위에 오르자 강화 유수가 기와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는데, 용(龍)이란 왕을 상징하는 글자로서 왕의 탄생을 뜻하는 이름이다.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용흥궁은 조선 철종(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던 잠저로,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 4년(1853)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낭채를 두고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같이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궁 안에는 철종 잠저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성공회 강화 성당

용흥궁 바로 위쪽에는 사적 424호로 지정된 성공회 강화 성당이 있다. 고요한 초대 주교가 1900년 축성한 건물로 주도하였다. 전체적인 건축 양식은 한국 정통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배치와 내부 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 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 정신을 드러나게 하였다.

 

시간의 섬 중심부를 거닐며 지상의 배 한 척을 본다. 강화읍 내 성공회(聖公會) 강화성당 터는 ‘구원의 방주’ 형국이다. 한옥 건물은 자연스럽게 배의 선실이 된다.

터키 아라라트(Ararat)산 구원의 방주가 떠오른다. 개화기 때, 성공회 초기 선교사들이 이곳 강화도에 한옥 성당을 세운 건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이오나(Iona) 섬처럼 신앙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뜻에서였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눈에 익은 절집이나 향교 건물, 반가의 고택과 다름이 없다. 성당 바로 못 미처 철종(哲宗, 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곳에 세운 용흥궁(龍興宮)과도 잘 어울린다. 서로 이질감 없는 풍경을 연출한다. 공간 구성과 건축양식의 토착화가 낳은 결과다.

 

언덕배기가 일어서는 서남쪽 초입, 뱃머리쯤 해당되는 곳에 솟을대문이 서 있다. 한국 전통 건축양식의 외삼문이다. 절의 일주문에 해당한다. 계단을 오른다. 외삼문 대문 중앙에 태극문양을 배경으로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문을 지나면 내삼문이 나타난다.

절의 천왕문에 해당하는데 종루(鐘樓)를 겸했다. 범종과 흡사하다. 당좌(撞座, 종을 치는 부위)의 돋을새김 십자가 문양이 다를 뿐이다. 애초 영국에서 들여온 종은 1943년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정문 계단 철재 난간과 공출해갔다. 지금의 종은 1989년 다시 만든 것이다. 조금 전 지나쳐온 철재 난간은 2010년 일본성공회 측에서 한일 양국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봉헌했다고 한다.

 

 

◇강화도령 철종외가(哲宗外家)

철종외가(哲宗外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철종(재위1849∼1863)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던 집이다. 철종 4년(1853)에 지은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안(안채)과 밖(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으로 간단히 분리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철종외가묘(哲宗外家墓)는 철종외가에서 좌측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길 바로 옆에 있다. 묘역에는 염성화(廉星華)·염덕석(廉德碩)·염상임(廉尙任)의 묘역이 있다. 철종 외가는 1859년(철종10)에 강화유수 조충식(趙忠植)이 왕실의 위신을 세운다는 의미에서 철종 외숙 3인의 묘역을 정화하고 비석을 세웠다. 이에 철종의 외가 5대의 벼슬을 추증하고, 냉정리에 전답 10여 정보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제일 우측에 성화의 묘역이 있고, 가운데 덕석, 좌측에 상임의 묘역이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이중활개를 하였다. 묘역의 형태상을 보면 먼저 성화의 묘역을 조성한 뒷편 그 좌측의 빈 공간에 덕석과 상임의 묘역을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계체석이 일자의 형태를 하지 않고 'ㄱ'자나 'ㄴ'자 형태로 연이어 있다. 활개 역시 성화의 묘역에서 연이은 흔적이 보인다.

 

3기 모두 공통적으로 묘표 음기에 ‘용담‘이란 글씨가 움푹하게 파져서 새로 새겨 놓은 흔적이 보인다. 그것은 파평 염씨가 용담 염씨를 가칭하여 철종의 외가라고 속이기 위하여 글씨를 ‘파령’이라고 새긴 것을 새로 정비한 것이라고 한다.

 

 

◇냉정리 찬우물

한편 선원면 냉정리(찬우물)는 조선25대 임금 철종이 '강화도령'시절에 그 외가인 염씨 댁에 얹혀 살 때 이 마을 처녀(양순이)와 사랑을 맺었던 그 집에 '찬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또 동냥고개(찬우물 고개)는 강화도령이 철종으로 등극하기 전 빈한했던 그의 외숙 염씨가 동냥을 하기 위하여 넘어 다녔던 고개이기 때문이란다.

이곳 냉정리에는 지금도 '염부원군댁'(철종 외가: 철종4년에 재건축, 현재 보수․수리하여 보존하고 있으나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쓰레기, 문짝 등이 떨어져 나가 강화군의 문화재 보존의식을 의심케 한다)이 남아 있고,

또 강화읍성 내에는 왕자의 출생지를 뜻하는 '용흥궁' (龍興宮)이라는 이름의 철종 생가가 남아 있다.

 

선원면과 김상용, 김상헌.(김상용의 아우)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잡혀갔고, 김상용 또한 그 자신도 오랑캐를 방비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화약에 불을 붙여 자폭한 두 형제의 행적은 불의에 굴하지 않는 고결한 선비의 기상을 잘 보여주고 있어, 인물과 산천과 역사가 빚어낸 한편의 드라마 같기도 하다. 또 강화도령이었던 철종의 행적은 맹랑한 역사의 뒤안을 보는 것 같다.

 

哲宗 1831~1863(순조 31~철종 14)
조선 제25대 왕(1849~1863).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 광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 사이의 셋째아들이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순조의 비; 철종이 즉위하면서부터 수렴청정을 하여,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맞아들임으로써 이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절정에 올려놓았다.)의 명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철종은 형 회평군(懷平君) 명(明)의 옥사(獄事)로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어 농군으로 지낸 데다 나이도 어렸는데 별안간 명을 받아 6월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초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51년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고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득세를 하게 되었다.
정치는 안동 김씨 일족에 의해 좌우되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에 달하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삼남지방 등 여러 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민란의 수습에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런 사회상황에서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창도,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자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시킨다 하여 그를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재위 14년 만인 1863년 12월 3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갑곶돈대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며,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 (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갑곶돈대는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 조선 인조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돈대로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조선 고종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 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갑곶리 탱자나무(江華 甲串里 탱자나무)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江華 甲串里 탱자나무)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전쟁박물관 옆에 서 있는 탱자나무이다. 1962년 12월 3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었다.

 

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하며 일본·중국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과수원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박물관 옆에 서 있는 갑곶리의 탱자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2.12m이다.

 

강화도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몽고의 침입을 해 있었던 곳이며, 조선 인조(재위 1623∼1649)가 정묘호란(1627) 때 난을 피했던 장소이다. 이 때 외적을 막는 수단으로 강화도에 성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외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탱자나무는 그 때 심은 것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어서, 탱자나무를 처음 심었을 때 조정에서는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자세히 보고하게 하였다고 한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심은 국토방위의 유물로서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한계선인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강화전쟁박물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18

강화전쟁박물관은 강화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 보존, 수집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강화역사박물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적 제137호 강화 부근리 지석묘에 위치한 강화역사박물관은 소중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유물을 전시 · 연구 · 수집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선사시대 화살촉에서부터 고려시대 청자, 조선시대 백자, 근현대 목가구 등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유물을 상설전시 및 기획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다채로운 체험프로그램 및 문화행사 등을 개최하여 박물관에서 직접 보고

체험하며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강화자연사박물관

세계문화유산인 강화고인돌유적지 부근에 위치한 이곳은 강화역사박물관과 가까이에 있어 함께 관람하기에 좋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올바른 인식, 지구를 구성하는 광물과 생물에 대한 탐구를 돕기 위해 2015년에 문을 열었다. 강화자연사박물관 로비에는 2009년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에서 발견되었던 길이 14.5m, 무게 20톤의 향유고래가 전시되어 있다.

 

○강화문학관.

강화읍 관청길 용흥궁공원 내에 위치한 강화문학관은 강화 출신의 수필가 조경희 선생에 의해 건립되었다. 조경희 선생이 강화도에 기증한 소장품 8,000여 점을 보관하며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문인들의 다양한 작품을 소개한다.

 

◇갑곶순교성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에 갑곶순교성지가 있다.

1866년 조선이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프랑스 함대가 갑곶돈대로 상륙했다.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됐고 갑곶 성지가 보이는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또 1871년에는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등이 갑곶 진두에서 순교했다. 후에 천주교 인천교구는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지금의 갑곶 순교성지를 조성하고 2004년 2월 10일 갑곶 순교성지 첫 미사를 드렸다.

강화도 성지로 일만 위 순교자 현양 동산, 진무영(鎭武營) 순교성지, 관청리 형방이 있으며, 십자가의 길, 순교자 삼위비, 박순집 베드로 묘 등을 순례할 수 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예약해야 한다.

 

 

◇마니산(摩尼山): 강화하면 마니산을 빼고는 얘기가 안 된다. 강화도 남쪽 화도면에 옛날부터 국태민안을 비는 제천(祭天)의 성화(聖火)가 올려 졌던 높이 468m의 마니산이 자리 잡고 있다.

전해지는 바로는 마니산이 어떤 산맥의 줄기도 이어받지 않고 독특하게 이루어진 산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산세가 아닌 고유한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렸다고 하며, 국토의 중앙이자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의 중간에 위치한 영산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는 지구상에서 기(氣)가 제일 센 곳이며, 두 번째는 바이칼호라고 한다. 이 사실은 아폴로11호 우주선 부선장 올드린이 간증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암스트롱을 달에 착륙시키고 혼자 지구 주위를 돌고 있을 때 우연히 지구를 내려다보니 마니산 정상에서 우주공간으로 불기둥 같은 것이 솟아오르는 광경을 목격했고, 또 바이칼호 위를 지날 때 우주공간에서 불기둥이 바이칼호를 향하여 쏟아 내리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높이 468m 마리산은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또 우리나라 어느 산맥에서도 파생되지 않은 독보적인 산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신성시한 데서 머리산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마니산은 본래 마리산(摩利山) 또는 두악산(頭岳山)이라 하였는데, 대개 마니산(摩尼山: 마니산의 '마니'는 곧 여의주를 뜻하는 불교식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이 산의 본래 이름은 마리산(摩利山: 마리, 머리는 글자 그대로 우두머리, 머리를 뜻), 또는 머리산(頭岳)이다.

이는「머리산」 또는 「거룩한 산」의 뜻이라고 하며 아직까지 이 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다치거나 불상사가 일어난 적이 없어 더욱 성역의 이적(異蹟)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본래의 마니산은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으로 바다 가운데 솟아 있었던 것인데, 가릉포(嘉陵浦:능내리)와 선두포(船頭浦:선두리)에 둑을 쌓은 뒤로 육지가 되었다.

 

북쪽 양도면(良道面)의 진강산(鎭江山)과 동쪽 길상면(吉祥面)의 길상산(吉祥山)과 마니산 사이는 매우 낮아 과거 지질시대에는 지각이나 해면의 융기․침강운동을 조금만 받아도 섬이 되었거나 육계가 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니산 일대는 이른바 마니산 화강암이라 칭하는 선캄브리아대의 오래된 암석의 대표적인 지역이다. 또 변성암인 결정편암계의 편암이 마니산 동쪽지대에서 시작하여 정족산의 전등사 일대에까지 있다.

북쪽 기슭에는 굳은 화강암 암반이 넓게 깔려 있는 곳도 있고 길 양측의 노두(露頭)에서는 풍화되어 부스러진 사질토와 박리현상(剝離現象)을 볼 수 있다. 또 중턱에는 화강암의 거대한 판상절리(板狀節理)가 있다.

 

이 산의 꼭대기에는 국조 단군께서 단군기원 51년(기원전 2282년)에 민족 만대의 영화와 번영을 위해 친히 삼신상제(三神上帝)에게 단을 쌓고 10월 상달에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참성단(塹星壇)이 있다.

 

참성단은 고구려의 유리왕과 백제의 비류왕 10년에도 왕이 친히 나와 제사를 지냈으며, 신라와 고려를 이어 구한말까지 춘추로 제사를 지냈었는데,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정책과 함께 중단되었었다.

 

참성단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에 의하여 제단의 기초를 둥글게 쌓고 위는 네모로 쌓았다. 지금도 개천절에 이곳에서 행사가 베풀어지고 전국체육대회 때에는 7선녀에 의하여 참성단 아래 향단에서 태양열을 화경(火鏡)으로 인화, 성화를 채화하여 경기장으로 옳기고 있다.

 

단군이 참성단을 쌓던 해에 세 아들 부우(夫宇), 부루(夫婁), 부여(夫餘) 등 세 아들을 정족산(지금의 전등사 뒷산)에 보내 삼랑성을 쌓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신라시대 성곽 구조를 보임으로 삼국시대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강화(江華)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세 강(江) 어구에 자리잡고 있으니 강(江)이요, 참성단에서 겨레의 영화를 빌고 또 성화의 불을 밝혔으니 화(華)이다.

마리산이라는 이름 역시 겨레의 머리가 되는 국조 단군께서 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 지낸 바로 그 머리산인 것이니 참으로 그 이름과 부합되는 것이다.

 

마리산을 오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화도면 마리산 입구에서 매표하여 바로 단군로로 방향을 잡든지, 아니면 15분 정도 큰길을 따라 오르면 마리산 기도원이 나오고 여기서 왼쪽 계단길과 오른쪽 숲길(약수터길)을 따라 등산 할 수 있는데 필자는 보통 올라갈 때 계단 길, 내려올 때는 숲길 또는 단군로를 이용한다.

내려가는 숲길은 참성단 앞으로 돌아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약수터로 가는 푯말이 보이고 단군로, 선수로를 따라 더 가면 단군로로 내려간다. 계속 종주를 하고 싶으면 선수로를 따라 계속가면 선수리 횟집 촌까지 갈 수 있다.

그래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수사에서 시작하여 선수까지 완전 종주를 한다.(쉬엄쉬엄 4시간) 이 코스는 강화에도 이런 아름다운 길이 있다는 걸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여기 이 ‘계단’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코스이다. 어떤 이는 ‘마리산’하면 떠오르는 것이 계단이라고 한다.

그러나 계단을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으니 싫으면 오르지 말 것을 부탁한다. 계단을 만들어 참성단까지 올라가는 길을 만든 때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꽤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참성단에서 ‘하늘에 계신 님’(하느님, 천주님, 천제님, 부처님, 하늘님 누구도 좋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기서 만나 제사도 지내고, 기도도하고, 대화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계단의 의미를 아십니까? 그런 성스러운 곳을 갈 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가야된다는 의미를... ‘기독교에는 하늘가는 계단’이라는 비유를 가끔 합니다. 이런 연유로 만들어진 계단이 현대식 화강암으로 근사하게 깍아 만들어진 것은 해방 후 최근의 일이다.

 

강화군에서는 계단을 다시 만들 때에 이 계단의 수를 몇 개로 할까? 하고 생각한 결과 하늘 천(天)과 음이 같은 천(千)계단으로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짝수는 신(神)의 수(數)입니다. 인간(人間)의 수(數)는 홀수입니다.

항상 인간은 신(神)보다 하나가 모자랍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계단이 제단까지 999계단입니다. 제가 ‘88년도에 세어 보았을 때 997계단 이였습니다. 일부 세 계단이 유실 되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997계단이였는 지는 모릅니다. 지금은 많은 곳이 유실되어 새로운 계단이 아무런 생각 없이 만들어져 오르는 이로 하여금 오르는 의미도 찾지 못하게 힘만 들게 합니다.(왕복: 화도 마리산입구→참성단→입구 매표소: 2시간)

 

또 마리산을 오르는 방법은 정수사 또는 함허동천에서 시작하여 마리산을 종주하는 것입니다. 이 코스의 스릴과 장관의 묘미를 글로 표현하는 것이 마리산을 찾는 이에게 죄송할 것 같아 생략합니다.(정수사→참성단→화도 마리산입구: 2시간 30분)

강화 참성단(江華 塹星壇)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摩尼山)에 있는 단군이 하늘에 제를 올리기 위해 쌓은 것으로 전하는 제단이다.
사적 제136호. 면적 5,603㎡. 단군 관련 문헌기록에 의하면 단군이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으로 전해지며, 실제로는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서 고려·조선시대에는 국가제사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즉 단군이 366가지에 이르는 나라 다스린 공을 세우면서 아울러 제천의 대례를 행하고 보본(報本: 생겨나거나 자라난 근본을 잊지 아니하고 그 은혜를 갚음)의 뜻을 드높였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 제천의식은 1955년 전국 체전의 성화 채화를 계기로 부활되어 개천대제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매년 양력 10월 3일 개천절에 거행되고 있다.


이곳을 민족 제1의 성적(聖蹟)으로, 마니산 제천단(摩尼山祭天壇)이라고도 한다.
참성단에 관한 기록은 고려 때의 문헌 여러 곳에서 이미 나타난다. 고려 후기에 이암(李嵒)이 엮었다는 단군조선의 연대기인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이 분이 단군이다. …제천단을 쌓고(강화도 마니산에 있음.) 삼랑성(三郎城)을 쌓으시다(성이 강화 전등산에 있고 세 아들을 보내어 쌓았기 때문에 삼랑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시대 학자 이종휘(李種徽)의 시문집인 『수산집(修山集)』의 「동사(東史)」에는 “제천단은 강화도 마니산에 있으니, 단군이 혈구(穴口: 강화의 옛 이름)의 바다와 마니산 언덕에 성을 돌리어 쌓고 단을 만들어서 제천단이라 이름하였다. 단은 높이가 17척인데 돌로 쌓아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다.
위의 네모는 각 변이 6자 6치요 아래는 둘레가 60자이다. 혹자에 의하면 마니는 강과 바다의 모퉁이라, 땅이 따로 동떨어지고 깨끗하며 고요하여 신명(神明)의 집이 된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제천단에 관한 본래의 연혁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문헌비고』에는 “고려 고종 46년에 교서랑(校書郎) 경유(景瑜)가 말하기를 ‘대궐을 마니산에 세우면 가히 나라의 복조(福祚)를 늘게 하리라.’ 함에 명령하여 이궁(離宮)을 그 산 남쪽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639년(인조 17)에 개수축(改修築)하였으며, 1700년(숙종 26)에 또 개수축하여 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에
“동녘땅 수천리 전체를 둘러서 강도(江都)가 보장지중지(保障之重地)가 되고, 강도 수백리 전체를 둘러서 마니가 으뜸가는 명산이라. 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드니 이른바 참성단이라. 세상에서 전하되 단군께서 쌓아 제단으로 하여 한얼께 제사지낸 곳이라 하니, 돌이켜보건대 오랜 연대가 흘러 비바람에 깎이고 허물어져서 서북쪽 태반이 무너지고 동쪽 층계가 또한 많이 기울어져서…선두포별장(船頭浦別將) 김덕하(金德夏)와 전등사총섭(傳燈寺總攝) 승 신묵(愼默)이 주로 맡아 고쳐 쌓으니 20일 만에 일을 마쳤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참성단이라는 명칭이 붙은 내력과 여러 번 고쳐 쌓은 일을 알 수 있으며, 제천단에 대한 선인들의 뜻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여러 번 고쳐 쌓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국가제사의 제단으로 활용되었다. 참성단 제사로는 임시제와 정기제가 있었다.
임시제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이를 해결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치러졌고, 정기제는 매년 봄과 가을에 거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정기적 제사의 목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찾아볼 수 없지만, 국가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것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참성단의 제사는 조선시대의 대부분의 국가의례가 유교식 의례였던 것과는 달리, 도교의례 중 초제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참성단에서 초제가 베풀어진 것은 고려시대부터 확인된다. 1264년(원종 5)에 거행된 것도 국왕의 친초였고, 공민왕 때 문신 경복흥(慶復興)이 마리산 참성에서 초제를 지냈다는 기록과 1379년(우왕 5년) 사신을 보내어 마니산에서 초제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교에서 마니(Mani 摩尼)는 악을 제거하고 탁한 물을 맑게 하며 염화(炎禍)를 없애는 보주(寶珠), 즉 여의주를 맡한다. 본래 마리산이, 이 곳에 절이 들어서면서 불교적으로 음역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산(高麗山) 과 적석사: 강화읍(江華邑)과 내가면․하점면․송해면 경계에 있는 산. 높이 436.3m. 강화도 6대산(마니산, 고려산, 봉천산, 혈구산, 해명산, 진강산)의 하나이다.

강화 불국의 진산이 되며, 고구려 때는 둘레 5.8㎞가 되는 토성을 쌓았다. 고려산 북편 시루미산 꼭대기에 치마대(馳馬臺)가 있어서 연개소문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말을 달려 무술을 연마하였다고 한다.

또 적련사(적석사) 동편 돌틈에서 나오는 샘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영천(靈泉)으로 이 물을 마신 아래 동네에서는 장상(將相)이 많이 난다 하여, 중국의 술사가 쇠말뚝을 우물 가운데 박고 흙으로 메워서 그 기운을 눌렀다고 전한다. 또 신기한 것은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물이 마르거나 물이 흐려지게 된다.(1916 한일 합방, 6․동란 등) 지금은 적석사에서 메꾸어 佛乳閣을 세워 거북이 입을 통해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고려산은 그 인근에 130여기의 고인돌을 품고 있다.

 

고려산(436m)의 옛 명칭은 오련산이다. 고구려 장수왕 4년(416)에 천축국 스님(인도의 승려)이 고려산 정상에 올라 오색의 연꽃이 피어있는 영천(靈泉)인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 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는데 적, 백, 청, 황, 흑색의 다섯 색깔의 연꽃이 떨어진 자리에 적련사(적석사), 백련사, 청련사, 황련사, 흑련사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현재 적련사․백련사․청련사 만 남아있다.(아직도 정상에는 이 우물이 있다)

 

적석사를 바라보아 왼편 서쪽으로 5분 정도 오르면 산신을 모신 제단인 산신각이 있고 (왜 이곳에 산신각을 세웠을까? 산신인 호랑이가 분명히 여기 있으니, 낙조대에서 호랑이를 찾아 볼 수 있다) 계속 산마루에 올라서면 바로 낙조대, 이곳에서 멀리 수평선으로 지는 저녁햇빛을 바라보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므로 <적석낙조(積石落照)>라 하여 강화도 8경의 하나로 꼽힌다.

 

여기서 10분 정도 능선을 따라 오르면 낙조봉이 있는데 이곳은 발아래 내가 저수지가 발을 담글 정도로 가까이 보이고, 멀리 트인 서해 바다를 향하면 왼편엔 석모도, 오른편엔 연산군의 넋이 잠들어 있는 교동도(중종 때 연산군묘는 부인의 간청으로 서울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 현재 아파트 숲속에 일반인 묘와 다름없이 있다)가 아스라히 보인다.

 

능선을 따라 고려산 정상(레이다 기지 있는 곳)을 향하는 길에는 갈대밭이 넓게 분포되어 있어 추억의 사진을 담는 곳이기도 하고, 10분 정도 걷노라면 어찌 강화에도 이런 소나무 숲이 있었을까? 놀랄 정도의 50년 생 이상 되는 소나무 숲이 1km이상 펼쳐져 천천히 걸으면 향긋한 솔 내음이 옷깃을 파고든다. 이 길만은 혼자 가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길목에는 100여기의 고인돌 무덤(支石墓)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산이 예사 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추측컨대 이 고려산의 정 북쪽 건너편에 봉천산(봉천대: 하늘로 가는 길)과 정 남쪽에 단군이 제사를 지냈다는 마니산이 있어 감히 이곳을 생명이 있는 땅, 영적인 땅이라고 할 수 있다.

 

능선을 따라 40분 정도 가면 누군가가 약1m높이의 돌탑을 쌓아 놓은 삼거리를 만난다. 여기서 직진하여 정상 헬기장과 레이다 기지까지 갔다가 다시 적석사까지 돌아와서 하산해야 만 하는데, 교통편이 괜찮다면 청련사로 내려갈 수 있고, 백련사로도 내려 갈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총 산행은 2시간이 소요된다. 고려산 정상 만 등산하려면 청련사에서, 백련사에서 출발하면 가깝다.

 

서울에서 적석사 가는 길은 강화읍내를 가로질러지나 서문에서 좌회전, 강화고교 앞을 지나면 국화저수지가 나온다. 이 저수지를 끼고 군도 4번 도로를 계속 따라 가면 고비고개를 넘게 된다. 이 고개를 넘어서 평지부분에 서면 바로 오른쪽으로 고천리, 적석사 입구 표시가 있다. 적석사 마당 까진 4륜 구동차는 갈 수 있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경사가 급하기 때문에 승용차로는 갈 수 있지만 험하다.

 

적석사(積石寺)
인천광역시 강화군(江華郡) 내가면(內加面) 고려산(高麗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416년(장수왕 4) 인도 승려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적련(赤蓮)이 떨어진 자리에 사찰을 지어 적련사라 하였다가, 뒤에 적석사로 바뀌었다. 1714년 일연(一衍)이 사적비(事蹟碑)를 건립한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사적비는 사찰 입구에 비각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산신각․범종각․요사 등이 있다.

 

 

◇혈구산(穴口山) : 혈구산(466m)은 고려산 남쪽으로 빤히 보이는 우뚝 선(고려산 보다) 높은 산이다. 혈구산 가는 길은 강화시내에서 고려산 가는 길 도중 고비고개를 넘게 되는 데 고비고개 정상 바로 너머에 승용차를 왼쪽 빈터에 세우고 고개 정상 절개지를 따라 오르면 등산로가 나타난다.

산줄기가 크고 험준하며 구비 구비에 많은 골짜기가 있어 옛날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찰이 있었다 한다.

 

산행 10분 만에 정상을 빤히 바라 볼 수 있어 희망이 보이는 산이다. 정상까지 다섯 개의 작은 봉우리를 지나야 하는데, 네 개의 봉우리만 지나면 정상에 도착한다. 왠 일일까? 다섯 봉우리가 아니잖아..... 그런데 이 네 개의 봉우리를 지나오는 동안에 꽃 봉우리를 지나온 것을 몰랐던 것이다.

 

혈구산의 진달래꽃은 4월 말, 5월 초순이면 피는 데 온통 산이 빨갛게 물들어 불붙은 산을 연상케 한다. 서울 근교에서 보기 드문 진달래 밭이다.

그리고 이름에서 보듯이 정상에 올라서면 가슴이 벅차고 힘이 저절로 솟구치는 살아 숨쉬는 산으로 모든 정기(精氣)가 산 정상으로 항상 넘쳐흐르고 있다. 이 산은 강화 중앙부에 있어 강화 전경을 골고루 볼 수 있다.

왕복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되므로 가족등산, 초보 등산자에게 적당한 기(氣)체험 등산로이다.

 

 

◇봉천산(奉天山: 291m): 봉천산은 민간인이 갈 수 있는 곳 중, 강화 최북단에 위치한 산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 조선시대에는 한 때 봉화를 밝혔던 곳으로, 이 곳 역시 강화의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싶게 넘어 갈 산이 아니다. 이 산의 정 남쪽으로 고려산, 혈구산, 마니산이 일렬로 서 있어 마니산에서의 제사, 혈구산의 기(氣), 고려산의 무덤, 그렇다면 봉천산은 하늘로 가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봉천대가 있어 그 모양이 조선시대의 봉화대(烽火臺)와는 그 형태가 완연히 다르다. 그리고 이 봉천대 네 귀퉁이를 신기하게도 물이 마르지 않은 홈이 파인 돌로 받쳤다는 데(지금은 1999년 한 개가 발견되어 갔다 놓았음) 신비스러움이 서려있는 곳이다.

 

정상에서는 개풍군에서 황해도 연백군까지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 등산로이다. 또 정상에 작은 팔각정이 있는데 동남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라 눈에 거슬린다. 그러나 “청산은 나를 두고 말없이 살라하네…”의 싯귀를 적은 표시판이 자연에 묻혀 나를 살라하라고 유혹하고 있다. 그리고 정상에서 북쪽으로 30분 더 등산 할 수 있는 능선길이 빤히 보여 나그네를 유혹하고 있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야 한다.)

 

등산의 시작은 하점면사무소 바로 옆 삼림욕장으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갔던 길을 도로 돌아오지 않는 다면 고려시대 5층석탑, 석조여래 입상도 볼 수 있다. 승용차로 가신다면 승용차는 하점면사무소 마당 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다.

그러면 하점면사무소는 어떻게 찾아 갈까? 강화읍내를 지나 서문에서 좌회전이 고려산, 혈구산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 가면 48번 국도. 서문에서 약7km쯤에 부근리 강화고인돌 유적지가 오른쪽에 있고, 여기서 1km를 더 가면 오른쪽 길옆에 하점면사무소가 있다.

 

 

살창리(殺昌里): 강화읍 관청리에 '살채이' 또는 '살창리(殺昌里)'라는 마을이 있다. 고려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죽이고 일거에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새 왕을 세우게 되었다. 이때 “마땅히 그 전 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명분론에 밀려 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뒤이어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 자손이 아닌 중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창왕을 평민으로 강등시켜 강화로 귀양보냈다가 며칠 안 가서 신하를 보내 이곳에서 살해하였으니 그 때 창왕의 나이 10세였다. 그 때부터 창왕이 살해된 이곳을 살창리라 부르게 되었다.

 

또 다른 얘기로는 조선 광해군 때의 이야기로, 대북파의 모략에 의해 어린 영창(永昌)대군도 폐서인이 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 당시 대군의 죽임을 반대하던 원로대신 이덕형이 귀양 가자 조정의 밀지에 의해 강화부사는 대군을 굶기다가 마지막에는 방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방에 불을 지피게 하였다. 펄펄 끓는 뜨거운 방바닥에서 시달리며 어머니를 부르던 영창대군은 벽을 뜯으며 손톱이 벗겨진 채 죽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 7세였다.

이곳 살창리에서 이름 그대로 고려의 창왕에 이어 두 번째의 창(昌)이 살해된 것이다.

 

강화민요에 "살채이 묻거들랑 대답을 마오" 하는 대목이 있는데 영창대군 살해사건은 그 파동이 컸던 만큼 관에서도 살채이 묻거든 알리지 말라고 금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또 영창대군을 불에 달구어 죽인 음력 2월 9일을 전후하여 비가 내리는 데 이 비를 '살창우'라 부른다고 하였다.

 

<야사> 신돈의 비첩 반야의 소생이라 하여 강릉에서 처형된 창왕의 부친 우왕은 처형 직전 관리들에게 “너희들은 보라! 내가 용의 후손인 왕씨의 소생임을”하고 팔을 들어 겨드랑이에 난 비늘을 보이며 그의 억울함을 증명하고 죽었다고 야사는 전하고 있다.
또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삼척군에 있는 한 고개에서 그를 따르던 일가족 및 신하들과 함께 살해됨으로써 살해치(殺害峙)라는 으시시한 고개 이름을 남겼다. 공양왕의 묘도 삼척 국도변에 있다.

 

永昌大君(1606~1614)(선조 39~광해군 6)
선조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선조의 유일한 적자(嫡子)로서 소북파(小北派)의 지지로 이미 세자가 된 광해군(光海君) 대신 세자에 책봉될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나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 대북파(大北派)에 의해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로 지목되었다.
1613년(광해군5) 서양갑(徐羊甲)․박응서(朴應犀) 등의 이른바 <칠서(七庶)의 옥(獄)>이 발생하자, 대북파의 이이첨(李爾贍) 등은 이들에게 영창대군 추대음모를 조작하여 고변(告變)하도록 사주(使嗾)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江華)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다. 이듬해 대북파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증살(蒸殺)되었다. 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족실방죽(足失防築): 화도면 덕포리(마니산입구 화도에서 온수리쪽 2km쯤)에 족실(足失)방죽과 선두포(船頭浦)가 있다. 조선 말기에 왜병 40여 명이 몰래 상륙하여 마리산(마니산)을 점령하고 부녀자를 욕보이는 등 노략질을 자행하므로 강화군수는 본토에 의병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때 의병대장 이능권이 의병을 이끌고 왜병을 기습하여 이들을 모두 생포하였다. 그는 왜적을 끌고 내려와 이 방죽에 이르자 모두 발목을 자른 뒤 물에 던져 죽였다고 한다.

그 때부터 이 방죽을 족실방죽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의병대장 이능권은 자신이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을 속죄하려고 마리산 중턱의 정수사에 올라가 부처님께 지성으로 공양을 하였다.

그때 주지스님이 그들을 죽인 곳의 이름을 선두포(船頭浦: 배에 머리를 실어 일본으로 보낸 곳)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 인근의 흥왕리(마니산 바로 남쪽)에는 떡봉․밥봉․죽봉의 세 산봉우리가 있다.

흥왕리의 동쪽에 있는 세 봉우리는 정월 대보름날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풍․흉년을 점쳤는데, 맨 위쪽(북쪽) 봉우리로 달이 떠오르면 풍년이 들어 떡을 먹을 수 있고, 가운데로 달이 떠오르면 평년작이 되어 밥을 먹을 수 있으며, 맨 남쪽 봉우리로 떠오르면 그 해에 흉년이 들어 죽을 먹게 된다고 하여 떡봉․밥봉․죽봉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온수리(溫水里): 강화군 길상면의 정족산 밑에 있는 온수리 마을은 근래에 온천이 발견되어 한동안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였고 땅 투기를 노리는 업자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던 곳이다.

물론 이곳의 마을 이름이 온수리이기 때문에 뜨거운 물이 솟아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쩐지 온수리라는 땅 이름보다 뒤에 있는 정족산(鼎足山)이라는 그 산 이름 때문에 뜨거운 물이 솟아 나온 듯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솥(鼎)은 곧 물을 덥히는 곳이니 솥 밑(속)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나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거니와, 마을 이름과 산 이름 모두가 뜨거운 물이 솟을 것을 암시하였던 곳이니 온천이 개발된 것 자체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 온천은 아직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진강산 감수천(甘水泉): 양도면 하일리 동광중학교 뒷산 진강산(443m) 꼭대기에 감수천(甘水泉)이라는 샘이 있다. 본래 '감'은 "물이 달다"는 뜻도 있지만 신성하고 으뜸을 나타내는 옛말 '감'에서 새끼친 '감' 계통의 말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감”으로 비유해 사찰에서 부처님께서 내리는 우물물을 “감로수”라 한다.

이 우물은 '단물샘'을 뜻하며, 특히 조선조 때 명마(名馬)로 유명한 벌대총(伐代總)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면서 '말난우물'이라고도 부른다.

 

이 진강산은 1239년 고려 고종 임금(1236년 몽골항쟁 당시 불교의 힘으로 몽골군을 격퇴하고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再刻)에 착수한 임금: 고종 능도 강화에 있음)이 목장을 개설했다고 하며,

 

강화도는 그 후에도 제주도 다음가는 종마(種馬) 양육 장소로 되었으니, 진강산 남쪽 기슭에는 진강목장이 있었고, 건너 마니산 남쪽 기슭에는 북일(北一) 목장, 삼산면에는 해명산 아래 매음도(煤音島) 목장이 있었으며, 길상산(吉祥山: 장흥리 가천의대 뒷산) 아래에도 있었다.

 

조선 태조의 팔준마(八駿馬: 이성계의 8준마는 추풍오(追風烏)․ 발전자(發電赭)․ 용등자(龍藤紫)․ 사자황(獅子黃)․ 현표(玄豹)․ 응상백(凝霜白))나, 효종의 대준마(大駿馬)인 벌대총도 모두 여기서 낳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병자호란 때 효종이 세자로서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갈 때도 진강목장의 말을 썼다고 하며, 돌아올 때 의주까지 가서 모셔온 말 또한 이 목장의 말이었다고 한다. 효종이 등극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이 목장의 말을 사랑하여 썼으며 그때에 그 말의 이름을 벌대총(伐代總)이라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이 벌대총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효종이 강화도에 올 일이 있으면 진강목장에 있는 말 총(總)이 먼저 알고서 강을 건너가 대기하고 있다가 효종을 태우고서 강을 뛰어넘었다 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말 총(總)은 효종을 강화도에서 대궐로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다가 양천(陽川 지금 양천향교가 있는 자리, 강서구 마곡동) 땅에 이르렀다. 그러나 너무 늙고 지친 나머지 졸도한 채 3일 동안이나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방 주민들은 명마 총(總)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임금님께 알릴 수가 없었다. 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언제까지고 알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한 백성이 단단히 각오를 하고 "총불식이삼일 와이불기삼일"(總不食而三日 臥而不起三日: 총이 먹지 아니한 지 3일이요, 누워 일어나지 않은 지 3일)이라고 아뢰었다.

그 소식을 들은 효종이 크게 놀라 "그러면 총이 죽었단 말이냐 ? " 하고 다시 물으니 "상지의여시 신역지기연" (上旨疑如是 臣亦知其然: 임금님께서 의심하시는 그대로 신 역시 그러한 줄 아옵니다)이 라고 아뢰자 효종께서는 크게 슬퍼했다. 그후에 "양천사람 죽은 말 지키듯 한다"는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이 명마 벌대총이 났다는 감수천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내를 용마천(龍馬川)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 있으며, 그 내는 지금도 장지포를 향해 유유히 흐르고 있다.

孝宗 1619~1659(광해군 11~효종 10)
조선 제17대 왕(1649~59). 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한씨(韓氏)이며,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신하였으나 청(淸)나라와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1645년에 소현세자가 먼저 귀국하였으나 2개월만에 죽자 곧 귀국하여 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북벌(北伐)을 위한 준비에 착수, 친청파를 파직시키고 김상헌(金尙憲)․송시열(宋時烈) 등 반청파를 등용시켰다.
1651년(효종2) 인조의 후궁 조귀인(趙貴人)의 옥사를 계기로 친청파를 완전히 숙청, 또한 조선에 표류해 온 H.하멜 등을 훈련도감에 배치하여 조총․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보수하도록 하였다. 능은 경기도여주군(驪州郡) 능서면(陵西面)에 있는 영릉(寧陵)이다.

 

 

◇선원면(仙源面): 산천은 인물을 낳고 인물은 산천을 키운다. 강화군 '선원면'은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호를 딴 이름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청나라를 배척)를 주장하였다가 청나라에 잡혀갔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친형이다.

 

이 선원(仙源)면에는 또 동냥고개(덩녕고개)와 냉정(冷井 ,찬우물)이라는 샘도 있다.

본래 '선원면'은 고려 고종 때의 권신 최우(崔瑀)가 이곳에 절을 세우고 절이름을 선원사(禪源寺)라 하였으며, 불상 500개에 모두 금을 입혀 이 절에 안치하였다. 그후 충렬왕 때에는 거란병이 침입하자 왕이 이 절로 피난하기도 하였다.

조선 광해군 때 김상용은 선원사(禪源寺) 부근에 살았다. 그는 인조 때 이조․예조판서를 지냈고, 병자호란 때 왕족과 비빈(妃嬪)들을 시종(侍從)하여 이곳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오랑캐가 강화성을 함락하자 왕족을 지켜내지 못한 것에 통분한 김상용은 화약을 가져오게 하여 성문루에 올라 성문과 함께 자폭해버린다.

 

자폭의 내력은 그 김상용은 대묘신위(=종묘신위:宗廟神位)와 왕세자를 모시지 못한 죄를 통감하고, 집안 사람들을 모아놓고 영결한 뒤 옷을 벗어 하인에게 넘겨주며, "네가 만일 살아나거든 이 옷을 가져다가 내 몸을 대신하여 장사지내게 하라" 하였다.

곧 강화성의 남문으로 가서 화약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이때 종묘 제조 윤방이 문앞에 와서 "대감이 꼭 돌아가시려 한다면 나도 같이 죽게 하여 주시오" 하니, 김상용은 "대감은 종묘의 신주를 모시는 터에 하필 그럴 필요가 어디 있소" 하였다.

 

김상용은 아랫 사람들에게 담배 필 불을 가져오라 하였다. 그러나 김상용이 본래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하인은 불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재촉하여 기어이 불을 가져오게 하였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멀리 가게 하였으나 이때 김상용의 열세 살 난 손자 수전은 물러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마땅히 할아버지를 따라 죽으리라" 하였고, 생원 김익겸과 별좌 권순장은 "대감 혼자서 만 좋은 일을 하시렵니까 ? " 하며 그 자리에서 함께 죽었다.

(잠깐 여기 생원 김익겸은 누구인가? 생원 김익겸(金益兼)은 참판 김반(金槃)의 아들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재명(才名)이 있었다. 어미를 모시고 강도에 피난 중 적이 이르자 남문루에서 김상용을 따랐다. 그의 어머니가 곧 자결하려고 김익겸을 불러 다 서로 이별하자 익겸이 울면서 ‘내가 어찌 차마 어미가 죽는 것을 보겠는가.’ 하고, 마침내 떠나지 않고 함께 타죽었다. 김익겸의 둘째아들이 “구운몽”으로 유명한 서포 김만중이다.)

마침내 김상용이 화약상자에 불을 대니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사람과 문루가 다 날아가서 아무 것도 남지 아니하였다.

 

선원 김상용의 순절 직후 그의 육신을 찾으려 하였으나 산산이 흩어져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폭발 현장인 남문에서 3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선원면 선행리에 김상용의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기이하게 여겨 그곳에 사당을 지었으니 그것이 '충렬사'이다.(냉정고개 바로 전 우회전) 또 이곳에 있는 선생의 비석은 나라에 재난이 있을 때면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 강화군 선원면의 이름은 그 전에 '선원'(禪源)이었으나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호를 따서 선원(仙源)으로 바꾼 것이다.

 

 

강화바다에서 시작하고 남해에서 끝맺은 생애
(생원 김익겸의 둘째아들 서포 김만중)


병자호란 이듬해 1월 22일은 호란 중 가장 참혹한 날이었다. 강화성이 청군의 서양식 대포에 맥없이 무너지자 수많은 백성이 학살당하고 포로로 잡혀갔다. 김상용은 대세가 기울자 문루 위에서 담뱃대의 불을 화약에 당겨 자폭함으로써 비장한 최후를 맞았는데 생원 김익겸도 함께 순절의 길을 택했다.
김익겸의 부인 해평 윤씨는 그때 21세로 만삭의 몸이었다. 난리가 나자, 다섯살 짜리 철모르는 아들 만기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란하는 도중 2월 10일에 남편의 순절 소식을 듣고 놀랜 몸으로 배 위에서 유복자를 낳았으니 곧 김만중이다.
김익겸의 부인 해평 윤씨는 난이 끝난 뒤 위로는 친정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만기, 만중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궁핍한 살림살이를 도맡아야 했다. 두 아들은 스승을 모실 형편이 못되어 어머니가 손수 가르쳤는데 평소에는 자애롭기 그지없었으나 글공부를 조금만 게을리 하면 엄격하게 꾸짖고 매질하며 훈육했다.
어머니는 두 아들에게 늘 이렇게 타일렀다고 서포는 ‘정경부인 해평 윤씨 행장’에서 회고했다.
"너희 둘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으니 반드시 다음에 남보다 재주가 한 등 높아야 겨우 남의 대열에 들게 되리라. 사람들은 행실 없는 자를 두고 꾸짖을 때 이르기를 '과부의 자식' 이라 하니 너희 둘은 이 점을 뼈저리게 생각하라."
지아비를 여의고 청상이 되어 두 아들을 키우면서 어머니는 평생토록 소박한 옷을 입었으며 잔치나 풍악을 멀리 했다. 맏아들 만기가 영달하여 생신잔치를 베풀어 드리고자 해도 마다하던 어머니였으나 오직 자식들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만은 "이는 진실로 우리 문중의 경사요 내 한 몸의 기쁨에서 그치지 않는다“면서 잔치와 음악을 허용했다.
서포는 1653년(효종 4년)에 과거에 급제한 형의 뒤를 이어 1667년(현종 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만기, 만중 형제는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고 아버지 없이 홀몸으로 온갖 고생을 마다 않고 자신들을 키워주신 어머니께 효성이 지극했다.
성균관전적으로 파란 많은 벼슬살이를 시작한 서포는 처음 10년간은 예조좌랑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며 벼슬길이 순탄한 편이었다. 그러나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으며 할 말은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 탓에 마침내 가시밭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백발의 노모가 귀양가는 50객 아들에게 타일렀다. "애야, 귀양살이 간다는 것은 옛날 훌륭한 어른들도 오히려 면치 못한 일이었으니 가거들랑 스스로 몸을 돌보고 이 어미 걱정일랑 말거라." 서포는 돌아서서 뜨거운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때 맏아들 만기를 잃은지 얼마 안되어 또다시 막내마저 먼 북녘 땅으로 귀양살이를 보내야 했으니 어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미어지게 아팠을까.
서포는 선천에서 2년간 귀양살며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한편 옛이야기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구운몽)을 짓기도 했다.
1688년 11월 후궁 장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나라의 경사라며 영의정에 오른 김수홍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포를 풀어주었다. 그런데 조정은 장희빈에게 홀딱 빠진 숙종은 반대파는 모조리 숙청하고 인현왕후 민 중전은 폐위시키는 등 자신의 뜻대로 했던 때, 숙종의 어리석은 처사에 반대하던 서포도 먼 남쪽 절해고도 남해 노도로 생애 세 번째이며 마지막인 유배 길에 올랐다. 어머니는 잇따른 불행에 충격을 받아 병석에 누운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구운몽(九雲夢)
아홉개의 구름, 구운(九雲)은 성진과 팔선녀 아홉 사람이 꾼 꿈을 가리킨다. 이 작품은 인생무상, 일장춘몽, 즉 인생의 덧없음이라는 주제를 성진(性眞)의 하룻밤 꿈으로 나타내는 듯 보인다.
성진(性眞)은 당나라 회남 수주현 양 처사의 아들 양소유(楊少遊)로 태어난다. 양소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여인과의 애정행각으로 양소유는 전 생애를 통해 두 명의 처와 여섯 명의 첩을 거느리게 되는데, 모두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빼어난 여성들이다.
성진은 당나라 고승 육관대사의 제자 중 가장 총명하고 지혜로운 승려였다. 스승의 명으로 수부(水府)에 간 성진은 용왕이 대접하는 술을 마시고 어지러워 연화봉 아래서 낯을 씻다가 육관대사를 찾았던 팔선녀와 마주한다.
팔선녀와 수작질하다 돌아온 뒤로 성진은 속세의 욕망이 일어 괴로워한다. 성진이 스승의 꾸짖음을 받고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니 팔선녀도 잡혀 와 있다. 이들은 모두 인간계로 영솔된다.
그중 성진은 양소유라는 사내로 환생해 장수가 되고, 재상이 되고, 공훈을 세우고, 여덟 명의 여인과 생을 즐기다 결국 이 모든 것이 하룻밤 꿈임을 깨닫는다.
깨달아 본래의 성진으로 돌아와 전죄를 뉘우치고 육관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팔선녀도 찾아와 대사의 가르침을 구한다. 이에 대사가 설법을 베푸니, 성진과 팔선녀는 본성을 깨우치고 적멸(寂滅:번거로움을 떠난 열반의 경지를 이르는 말)의 대도를 얻어 극락세계에 돌아갔다.

 

 

 

어머니에게 들려드리려던(사씨남정기)- 서포 김만중
서포가 남해 노도에서 외로운 귀양살이를 하며 “사씨남정기”를 지은 까닭은 어머니에게 들려 드리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한 가정이 두 여자 때문에 겪어야 하는 풍파는 왕가나 민가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어리석은 임금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는 뜻도 있다.
숙종이 ‘사씨남정기’를 읽어보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어쨌든 서포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694년(숙종 20년) 임금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민 중전을 복위시킨다.
1689년 12월 어머니 윤씨 부인이 파란 많은 73년의 이승살이를 마치자 부음을 들은 서포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 된 무죄의 죄인으로서 홀어머니의 임종도 못한 불효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노모를 즐겁게 해 드리려고 해마다 생신이면 두 형제가 색동옷 입고, 형이 피리 불면 아우는 춤추던 그토록 즐거웠던 시절도 있었건만 이제 우리 어머니 차가운 지하에 말없이 누워 계시겠구나. 어머니! 어머니! 서포는 한바탕 통곡을 했다.
그리고 눈물을 거둔 뒤 붓을 들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어머니의 생애를 기록한 “정경부인 해평 윤씨 행장”을 지었다.
그리고 해가 다시 두 번 바뀐 1692년 (숙종 18년) 4월의 마지막날, 먼 북쪽 하늘을 그리며 서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56세.
함께 유배되었던 이들이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는데, 그해 9월에 외아들 진화가 찾아와 영구를 모시고 경기도 광주군 노치면 형의 산소 아래에 장사지냈다.(현재 남해 노도에는 이장 후 가묘를 만들어 놨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1711년(숙종 37년)에는 임진강 북쪽 장단 땅으로 이장했다. 그에게는 나중에 효자 문효공이란 정려문이 내리고 문효공이란 시호도 있었다.
그의 고매한 인품을 그리고 유덕을 추앙하는 우리 후생들에게야 “구운몽”, “사씨남정기” 같은 작품들이 더욱 뜻깊고 값진 유산이다.


남해 상주해수욕장에서 남해읍 쪽으로 굽이 길을 돌면 서쪽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길가에 '서포 김만중 선생 유배지 노도 입구'라고 새긴 표지석이 서 있다. 그 아랫길로 내려서면 남해군 상주면 노도리 백련마을, 마을 앞은 속칭 앵강바다인데 그 한가운데 마치 삿갓을 엎어놓은 듯한 모습의 작은 섬 하나가 있으니 곧 노도이다(배를 타고 들어 갈 수 있다). 노도는 서포 김만중 선생이 쓸쓸한 귀양살이를 하다가 이승살이의 막을 내린 마지막 유배지이다

 

 

◇전등사(傳燈寺): 인천광역시 강화군(江華郡)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 정족산성(鼎足山城) 안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고 이름을 진종사(眞宗寺)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1266년(고려 원종7) 중창하였으며, 1282년(고려 충렬왕8)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하여 송(宋)나라의 대장경을 가져와 이 절에 두게 하고 옥등(玉燈)을 시주하고, 전등사(傳燈寺)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1337년(고려 충숙왕 복위6)과 41년에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 절의 가람(伽藍)배치는 전형적인 산지(山地)가람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절 입구의 대조루(對潮樓)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전이 있고, 그 주위에 약사전․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강설당․범종각(梵鐘閣) 등이 있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내부에 석가여래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한 《법화경(法華經)》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고, 대웅전 네 귀퉁이의 기둥 위에는 나녀상(裸女像)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다.

 

 

◇정족산성(鼎足山城)=삼랑성(三郎城):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둘레 약 1000m. 축성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으며, 다만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로 인해 삼랑성이라고 하며,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그 후 삼국시대에 재 축조한 것으로 추정한다.

성곽의 축조는 거친 할석(割石)으로 되어 있으며 성내도 할석으로 채워 안팍을 겹축하여, 보은(報恩)의 삼년산성(三年山城)이나 경주의 명활산성(明活山城)과 같이 삼국시대의 석성구조를 보이고 있다.

고려 고종은 1259년 풍수설에 따라 이 성내에다 가궐(假闕)을 지었다. 1660년(조선 현종1)에는 마니산사고에 보존해오던 조선왕조실록을 성내의 정족산사고로 옮겼다. 이때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譜閣)이 같이 건립되었다. 현재 사고와 선원보각은 모두 없어지고 전등사(傳燈寺)가 남아 있다.

 

삼랑성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계속적인 보수가 있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첩지로 유명하다. 사적 제130호.

 

전등사 나녀상
전등사 대웅전의 네 추녀 끝을 보면 다른 사찰과 좀 다르게 "나녀상" 즉 벌거벗은 여자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전설 하나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절의 대웅전을 중수할 당시 절을 맡아 짓던 도편수(대목수) 동량이라는 분이 온갖 정성을 다해 절을 짓기 시작한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회포를 달래길 없어 절 아랫마을 주막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막의 주모는 젊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과부였기에 동량은 그 주모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주 이 주막을 찾게 되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어 새살림까지 차리게 되었다.
도편수 동량은 그 동안 벌었던 돈을 모두 주모에게 맡기고 전등사 대웅전 중수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편수는 산아래 주모에게 가서 방안에 들어가 보니 여인은 이미 옷가지며 돈, 패물을 챙겨 도망가고 말았다.
수일간 수소문하여 여자를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고 도편수 동량의 사랑은 미움과 증오로 변하여 그 여자로 하여금 평생토록 전등사 대웅전의 무거운 추녀를 받드는 벌을 받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녀(裸女)" 즉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여 추녀 끝에 넣었다고 한다.
오늘도 향냄새 그윽한 법당에서 들려오는 독경소리에 추녀를 떠 받들고 있는 여인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죄를 사하여 줄 것을 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왜 하필 사람들이 올려다 볼 수 있는 추녀 끝에 나녀상일까? 오늘도 사람들은 위를 보면서…?)

 

 

◇정수사(淨水寺): 인천광역시 강화군(江華郡) 화도면(華道面) 사기리. 마니산(摩尼山)에 있는 절(032-937-3611).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본래 이름은 정수사(精修寺)로, 639년(신라 선덕여왕 8) 회정대사(懷正大師)가 창건하였다.

석모도 낙가산 보문사의 회정선사가 마니산 참선단을 배관(拜觀)한 뒤 그 동쪽 기슭에 앞이 훤히 트이고 밝은 땅을 보고 불제자가 가히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정수(精修)할 곳이라 하면서 사찰을 짓고 정수사라 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 1426년(세종 8) 함허화상(涵虛和尙)이 중건할 때,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정수사(精修寺)에서 정수사(淨水寺)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정수사에는 대웅보전과 삼성각이 있다. 법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집이며, 훗날 달아낸 1칸은 툇간(退間)으로 되어 청판(廳板)을 깔고 있다. 현존하는 중요문화재로는 아미타불을 비롯한 불상 4위와 탱화 7점, 부도(浮屠;사리탑) 1기 등이 있다.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모니불(다른 곳과 색다르게 선정삼매의 자세)과 관음보살좌상(괴로울 때 중생이 그의 이름을 외면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내리고, 해탈하게 해 준다고 함) 지장보살좌상(저승에 있는 이들에게 특히 도움을 준다고 하는 보살), 또 별도의 대세지보살좌상(서방 극락세계에 있는 지혜 및 광명이 으뜸인 보살)이 관음보살 옆에 밀려난 듯이 앉아 있다. 왜 그럴까? 이런 식으로 보살을 모신 사찰은 아직은 없다.

 

그리고 삼성각(三聖閣)에는

산신탱화(산신도는 산의 신령으로 존경하다가 마침내는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여기게 된 호랑이를 통해 불교의 토착화를 꾀하기 위해서 그린 그림. 백발이 성성한 신선이 그려지는 데 이때 호랑이의 변화신인 신선(神仙)이 가운데에 큼직하게 그려지고 진짜 호랑이의 모습은 애교 있고 무섭지 않게 그려짐),

독성탱화(독성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으로 독성은 석가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수도하면서 부처님 열반 뒤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아라한이다. 따라서 보통은 갖가지 과일이 열린 천태산을 배경으로 늙은 비구가 석장(錫杖)을 짚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칠성탱화(칠성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칠성을 말한 신으로, 주로 자손의 수명장수를 발원했던 칠성신앙은 한국불교 신앙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경우의 하나)

가 있고 100m 쯤 떨어진 동편 언덕에는 부도인 함허대사 승탑이 있다.

 

대웅보전 외벽에는 현재 편액 4점이 달려 있는 데 1848년(헌종 14)기년명의 “보탑중수기” “정수사불상개금후불칠성독성산신탱화기” 시주기 2개“ 이다.

대웅보전 전면의 문 중앙에 사분합문(四分閤門)이 있는 데 그 조각이 마치 요술단지 꽃병에서 소담스러운 목단(양쪽 두장)과 연꽃(중앙 두장)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듯 화려하고 아름답다.

잘 조각된 목단과 연꽃 줄기들이 창살의 역할을 하고 있고, 꽃병은 청자와 진사도자기로 네 개의 꽃병 문양이 다르다. 다양성을 추구한 결과다. 마당으로 내려서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생화를 꽂은 것처럼 곱고 화려하다.

가운데 한 칸 문에만 이렇게 화려하게 장식했을 뿐 양쪽 두 칸 문은 격자형의 소박한 창호문이다. 세 칸 모두 꽃장식을 했다면 이 건물과의 조화가 어떠했을까를 생각게 한다. 옛 선인들은 이렇듯 문 창살 하나에도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았다.

대웅보전에는 다른 여늬 사찰의 대웅전과 달리 앞에는 마루가 놓여 져 있음이 특이하다.

 

정수사 대웅보전 위에 다른 여느 사찰처럼 청기와를 한 개가 아니고 네 개를 올려놓았다. 왜 그럴까? 보통은 대웅전 용마루에는 청기와를 올릴 때 한 개를 올린다. 이것은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불에 청기와를 덮어서 예를 갖추는 뜻으로 올린다.

그런데 정수사에는 대웅보전에 네 분(석가모니불. 관음보살 지장보살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어 청기와를 넉 장 올렸다.

 

여기 오기 바로 전에 함허동천 수련야영장을 지나 왔을 텐데, 그 이름을 딴 법난 극복의 스님 함허당은 누구일까?

함허당기화(涵虛堂己和) 스님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출가했던 시대는 고려왕조와 조선왕조가 교체되던 고려 말인 우왕 2년(1376녀) 이었다. 충청도 중원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수이(守伊)’이고 출가 후 법명은 ‘기화(己和)이다. 스님이 주로 있었던 자모산에서는 당호를 함허당이라 했다. 부도가 이곳 정수사에 있고 절 앞의 계곡은 스님의 당호를 빌어 함허동천계곡이라 하니 곳곳에 스님의 얼이 베어있다.

 

<각시바위 얘기>

고려말 원나라 승려이자 한림학사였던 한 스님(閣氏)이 함허기화 스님과 함께 이곳 정수사에서 도를 닦고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자 그의 부인이 바다를 건너 이 곳에 찾아와 함께 돌아 갈 것을 애원했지만, 이 스님은 해돋이와 낙조를 함께 볼 수 있는 이곳, 선정삼매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이 곳에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니,

그 부인은 남편 없는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님을 항상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바다에 투신하였다. 빠져죽은 곳에 바위하나가 생겨났으니 그 바위가 지금 절 앞 극포(極浦) 앞바다에 멀리보이는 세칭 각씨암(閣氏巖)이 바로 그 것이다.

 

지금도 삼성각 앞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각씨암이 외로이 떠있어 이 정수사를 지키고 있다. 어쩌면 삼성각에서는 용왕신도 함께 모시고 있는 셈이다.

 

 

◎ 모든 이들이 강화에 오면 석모도를 좋아하고 가고 싶어 한다. 그건 잠깐이나마 배를 탈 수 있고 그기에 가면 볼 것이 있을 것 같아서 이다. 과연 그곳에 볼 것이 많은 가? 지금은 다리가 놓여있어 배를 타는 낭만이 없어진지 오래다.

 

 

◇석모도 :

배를 타는 옛길을 더듬어 보면, 석모도에 가는 배는 강화도 서쪽 끝에 있는 외포리 선착장에서 출발한다.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들어가 강화 사거리 - 창리 - 냉정 - 호박 삼거리(우회전) - 외포리 선착장으로 찾아가면 된다.

서울에서는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외포리 선착장에서 여객선을 이용해 석모도로 들어가면 되는데, 선박 요금은 1,500원 정도이고 자동차까지 배에 실어 석모도로 날라준다. 자동차 도선 요금은 약 14,000원 정도.

석모도는 외포리 선착장에서 빤히 바라다 보일 정도로 가깝다.

외포리 선착장에는 두 개의 해운회사가 있는데 삼보해운 여객선을 타면 5분이 걸리고, 풍양인터내셔널 여객선을 타면 약 10분 정도 걸린다. 출발지는 비슷한데 도착하는 곳이 서로 틀리기 때문이다.

배가 출발함과 동시에 수백마리의 갈매기들이 배를 에워싼다. 새우깡 때문이다. 승객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이 이 갈매기들의 주식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에 있는 갈매기들보다 왜소하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새우깡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은 용맹스럽기까지 하다. 이 갈매기들에게 새우깡을 던져주며 가다보면 금방 석모도에 닿는다. 석모도에서 나오는 막배는 저녁 8시 30분에 있다.

 

석모도는 강화도의 서편 바다 위에 길게 누운 섬이다. 석모도에는 농촌의 모습과 어촌의 모습, 관광지의 모습이 혼재한다.

섬을 한바퀴 휘감고 도는 일주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를 모두 볼 수 있다.

파릇파릇한 벼가 익어가는 논 사잇길을 달려 고개 하나를 넘으면 갯벌이 있는 바다가 나온다. 바다를 보며 가다보면 고기잡이 배들이 있는 어촌에 다다른다.

석모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광지라기보다 기도를 하기 위해 찾아오는 신도들의 기도처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3~4년 전부터는 섬 일대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알려지면서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강화도는 이제 섬이라고 하기엔 육지의 냄새가 너무 짙게 배어버린 느낌이지만 석모도는 강화도 바로 옆에 있으면서 섬 정취가 아직도 남아있는 곳이다.

행정구역상 석모도는 인천광역시 강화도 삼산면 석모도.

석모도에는 상봉산, 해명산, 상주산 등 3개의 산이 있어 삼산면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보문사 : 석모도 선착장에 한시간 간격으로 보문사에 가는 버스가 있다.

석모도 최고의 여행 포인트는 역시 보문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의 하나라고 하는 보문사는 관광지라기보다는 기도도량으로 더 유명하다.

전해오기는 신라 선덕여왕 4년인 635년에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이곳에 와서 절을 창건하고 산 이름을 낙가산, 절 이름을 보문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낙가는 관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이름이고, 보문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 수없이 몸을 낮추시는 관세음보살의 원령이 광대무현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절 뒤 산 중턱에는 1천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해서 천인대로 불리는 눈썹바위가 있고 보문사 주지 배선주스님이 금강산 표훈사의 이화응스님과 더불어 1928년 암벽에 조각한 것으로 알려진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다.

높이 920cm, 너비 330cm로 웅대하고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기도 성지로 더 중요시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하여 지금도 신도들의 발길 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는 천연동굴 안에 석불상 22구를 모신 굴법당이 있다.

넓이가 97평인 이 석실은 입구에 3개의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22개소의 감실을 마련하여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 제화갈라보살과 나한상들을 안치하고 있다.

이 석불들은 신라 선덕여왕 때 한 어부가 고기를 잡다가 그물에 걸려 올려 진 것들이라 하는데, 현몽대로 안치했더니 큰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외에 천년이 됐다는 화강암 맷돌이 굴법당 바로 앞에 있고, 600년이나 됐다는 향나무, 대웅전 앞뜰의 범종이 유명하다.

 

새벽 동틀 무렵 듣는 절 앞바다의 파도소리와 눈썹바위의 마애관음보살상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명승지로 꼽혔다고 한다.

저녁, 눈썹바위에 올라가 서해바다 섬들 사이로 떨어지는 낙조를 보는 건 강화 8경에 드는 절경이다.

 

 

◇ 보문사(普門寺)의 그 전설을 따라 가보면...

양양낙산사와 금산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도량이다.(여수 향일암)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이 곳에 와서 절을 창건하였는데,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산의 이름을 낙가산이라고 하였고,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하여 절의 이름을 보문사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인 이 곳 전설은....

창건주 회정은 누구인가? 그가 여기까지 온 연유는,

낙가산에서 바라다 보이는 바다. 물이 빠진 갯벌 저만치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 몇개가 서해의 한낮을 지키고 있었다.

회정은 오늘도 관음기도를 하고 있었다. 작은 암자에 홀로 기거하며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천수천안의 대비행을 배우고자 이 산마루에 묻혀 지낸지도 어느덧 10년 세월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세월과는 상관 없이 기도는 한결 같았다. 회정은 아스라히 금강산을 생각했다. 그리고 보덕각시를 생각했다.

 

꿈같은 일들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무관세음보살 …" 그는 원래 금강산에서 수행을 했었다. 치솟은 바위 자락에 단칸 움막을 짓고 관음보살의 원행을 온몸으로 배우고 실천 할 것을 원력 세우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소원은 관세음보살님을 꼭 한 번 친견하는 것이었다. 백일기도 천일기도를 번갈아 가며 하고 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꿈을 꾸었다. 한 노파를 만나는 꿈. 그리고 그 노파가 들려 준 생생한 이야기.

그는 꿈속에서 비를 맞으며 바닷가 염전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폭우 속 등대처럼 만나 소금막에서 그 노파는 물었다. "왠 스님이 이렇게 비를 맞으며 다니시우." "금강산의 회정이라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만나고자 …"

"이런 곳에서 찾으면 되는가? 강원도 양구땅에 가서 ‘몰골옹’을 만나 ‘해명방’ 노인의 안부를 물어야지." "여기는 어디입니까" "여기? 어디긴 어디야. 낙가산이지." 생각할수록 신기한 꿈이었다.

 

또렷한 노파의 이야기와 그 이름들. 낙가산이라면 관세음보살이 머무시는 산이 아닌가. 회정은 그 꿈이 혹 관세음보살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일 수도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끝자락에서 이미 그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 등짐 하나에 지팡이 하나. 그는 물어 물어 양구 땅을 찾았고 우연히 만난 노인이 바로 몰골옹이었다.

 

몇날을 걸은 피로를 짊어져야 했던 석양녘, 양구의 험준한 산자락 어느 초가에서 만났던 몰골옹은 깡마른 체구와는 달리 유연하고 그윽한 눈매로 다감한 느낌을 주었다.

"저물었는데 어딜 그렇게 가십니까." "아, 예. 사람을 좀 찾고 있습니다." "누구를?" "몰골옹이라면 아실지 모릅니다만." "남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지요."

이렇게 만난 몰골옹은 회정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글쎄 해명방을 만나면, 관음을 친견하는 일도 성취가 되긴 할 테지만 그 법음(法音)을 들을 수는 있을런지 …"라며 말끝을 흐렸다.

 

회정은 관음을 친견할 수 있다는 말에 흥분되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만나기만 한다면 법음을 들을 수는 있을 것"이라 장담하며 그 길을 가르쳐 달라고 어린 아이처럼 졸랐다.

몰골옹이 가르쳐 준 길은 험했다. 산을 넘고 계곡을 돌아 한참을 간 곳에서 회정은 조촐한 숯막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숯막에는 나이 든 노인이 열여덟 살이나 되었음직한 어여쁜 딸 하나와 살고 있었다. 회정이 먼저 만난 사람은 딸이었다.

 

"소승은 금강산에서 온 회정이라 합니다. 해명방 어른을 만나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산너머에서 만난 몰골옹께서 이리로 안내하셨지요." "해명방, 그분은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이렇게 만난 해명방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싶다는 회정의 말을 듣고 의외의 서약을 강요했다.

 

"모든 일을 내가 시키는 대로 복종할 것을 약속해라." "네. 분부 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대성을 친견할 때까지 나를 부모 모시듯 시봉할 것이며 또 내 딸과 결혼을 하여 살아라."

회정은 어이가 없었다. 노인을 시봉하는 일이야 할 수 있었지만 어떻게 출가남자에게 결혼을 요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 분부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관음을 친견하고자 하는 절절한 소망과 그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에 서있는 자신의 현재를 생각하면 파계는 이미 파계가 아닐 수 있었다. 회정은 숯막 일을 거들었고 해명방의 딸 보덕각시와 부부가 되어 살았다.

천만다행이었다. 보덕각시는 여자구실을 못했으므로 여념집의 부부와는 달랐다. 서로눈빛으로 부부 였을뿐 애욕의 그늘로 빠져 들지는 않았다.

그런 세월로 3년. 회정은 금강산에서 3년 기도를 한 뒤 꿈을 꾸고 여기까지 왔었는데 여기서 다시 3년이 지난 것이었다.

"아, 허망하도다. 이제 기도는 뒷전이고 숯일 만하고 또 보덕과 부부의 인연을 맺었으니 나는 참으로 기구하도다. 한낱 꿈을 믿고 너무 많은 것을 던져버린 것은 아닐까."

지난 세월을 더듬으며 회정은 후회스런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산을 내려가기로 헸다.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가 기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뒤도 돌아보지않으며 그간의 세월을 잊어버리고자 했다. 돌아가는 길은 찾아왔던 길 그대로였다.

 

그 길에서 회정은 다시 몰골옹을 만났다. "그래 관음대성은 친견 하셨는가?" "친견은 커녕, 죽도록 일만 했습니다. 거기에 파계까지 해야 했고 …" 회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벼락이 쳤다. 몰골옹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에잇, 미련하고 어리석은 놈아. 3년이나 대성을 모시고도 만나지 못했다니. 내 뭐라더냐. 만날 수는 있어도 법음은 못들을 것이라 하지 않았더냐.

해명방은 문수대성이고 네 색시 보덕은 관음대성이다. 이 몸은 문수의 도반 보현이고.."

회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겁지겁 돌아가보니 숯막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돌아온 몰골옹의 집도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 3년 세월이 통채로 꿈속에 갇혀 있었던 것인가. 회정은 금강산과 양구 땅에서의 기막힌 경험을 뒤로하고 꿈속에서 들었던 낙가산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정착한 곳이 서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 바로 석모도였다. 그는 이 산의 이름을 낙가산이라 부르고 다시 관음보살을 친견할 것을 서원했다. 절 이름도 보문사라 짓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635년(선덕여왕 4)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

회정이 지난 날을 회상하며 다시금 기도정진력을 가다듬고 있는 한 낮에 어부한 사람이 찾아 왔다.

635년(선덕여왕 4)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고 들고 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스님, 돌 부처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어부는 전날 한 자 남짓의 돌불상 스물 두 개를 그물로 건져 올렸다.

고기가 아닌 돌불상이었으므로 그는 바다에 다시 던지고 다른 곳에서 그물질을 했다.

또 그 돌불상들이 올라와 다시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왜 성인들을 바다에 버리느냐. 그 분들은 서역에서 오신 나한님들이다.

내일 다시 건져 낙가산 길지에 잘 모셔라."라고 말했다. 과연 그는 다시 돌불상을 건져 올렸고 낙가산을 오르다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 '여기가 그 길지인가'라 생각했는데 그곳이 바로 회정이 기도하는 움막 근처의 석굴 앞이었다.

 

회정은 어부와 함께 석굴로 들어갔다. 석굴안에는 불상을 모시기 좋게 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스물두 나한상을 모시고 나니 굴 가득 서기가 어렸다.

"이 관음도량을 지키고 복락을 베풀 위해 나한님들이 오신 것이 분명하다." 회정은 솟구치는 감격과 환희심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낙가산 보문사는 이렇게 천수천안 관음의 온기와 나한님들의 선선한 가피복락이 서려 있는 도량으로 피어올랐다.

 

금강산 보덕굴(普德窟)에서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회정(懷正)은 이곳 석실에 불상을 모셨다.

가운데 좌상은 석가모니불, 좌보처는 미륵보살, 우보처는 제화갈라보살이었고, 나머지는 19나한상과 송자관음보살(23상)과 관세음보살(후에 조성)이다.(총 24분)

회정은 이 24존 중 삼존불과 관세음보살과 19나한은 굴속에 모시고 특별이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에 모셨다.

 

보문사의 전설들은 '불씨 얻어 온 나한님' 등 수두룩하다. 낙가산 보문사는 그 신앙적 배경만큼이나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에서 얘기한 석굴법당에 나한님이 모셔진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고려 왕실에서 시주한 옥등을 어린 사미가 깨어 버렸는데 두 조각이 났던 등잔이 감쪽 같이 붙어 걱정하던 사미가 나한님들의 가피에 감복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또 흉년의 굶주림을 참지 못한 한 사람이 도둑이 되어 석굴법당에 들어와 촛대며 향로 등 물건을 훔쳤다.

그는 훔친 물건을 한자루 등에 짊어지고 도망쳤다. 밤새 달리고 또 달렸는데 아침에 보니 그는 석굴법당 앞을 맴돌고 있었다.

나한님의 위대한 신통력에 감복된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착하게 살아갈 것을 발원했다고 한다.

 

100여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동짓날 아침 공양주가 팥죽을 쑤기 위해 아궁이를 헤쳐 보니 불씨가 다 죽어 있었다.

장등불도 꺼졌고 절에는 어느 곳에도 불씨가 없었다. 공양주는 가슴이 콱 막혔다.

동짓날 부처님께 공양 올릴 팥죽을 못 쑤다니, 대중 스님들에게 혼날 일도 걱정이지만 불보살님께 죄송한 마음에 조바심을 쳤다.

하는 수없이 석굴법당에 들어가 잘못을 뉘우쳤다. 그리고 터덜터덜 돌아온 공양간, 왠일인가, 아궁이에서는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우선은 팥죽을 쑤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나한님이 아이로 화현해 아랫마을에서 불씨를 얻어 왔음을 공양주는 나중에 알게 됐다.

 

또 다른 깨어진 옥등잔 전설로,

옛날에, 보문사의 어린 사미승이 부처님께 등공양을 하기 위해 법당에 들어갔다. 나한전에는 보문사에 전해내려오는 귀중한 보물인 옥등잔이 있었는데, 사미승은 옥등잔에 기름을 부으러 가는 것이다.

 

사미승은 옥등잔을 내리고, 등잔에 기름을 붓다가 실수로 등잔을 떨어뜨리게 된다. 떨어진 옥등잔은 두조각이 나게 되고, 사미승은 혼비백산하여 법당을 빠져나와 구석에 주저앉아 훌쩍이게 된다.

 

마침 지나던 노스님이 사미승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슨일인지 물어보자, 사미승은 옥등잔을 깨게 된 일을말하게 된다.

 

사미승과 노스님은 깨진 옥등잔이 있는 나한전으로 들어갔는데, 두동강난 옥등잔은 멀쩡히 불빛만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노스님은 옥등잔을 자세히 살펴 보았지만, 깨진 흔적조차 없이 멀쩡하였다. 이에 노스님은 "이것은 분명 나한의 신통력 때문이로다" 하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의 역사는 사찰의 격에 비하여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조선시대 후기부터의 역사만이 전해지고 있다. 1812년(순조 12)에는 이 절의 승려들이 홍봉장(洪鳳章)의 도움을 받아 중건하였고, 1867년(고종 4)에는 경산(京山)이 석굴 안에 처마를 이어 나한전을 건조하였으며, 1893년(고종 30)에는 명성왕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하였다.

 

1911년 일제가 30본·말사를 제정하면서 전등사 말사가 되었다. 1918년에 대원(大圓)이 관음전을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주지 배선주(裵善周)가 객실 7칸을 새로 지었으며, 1935년에는 나한전을 중창하였다. 그 뒤 관음전을 중건하고 대범종을 조성하였으며, 1976년 범종각과 요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관음전·대방(大房)·종각·석실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석실 굴 안에는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석굴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을 설치하였고, 동굴 안에는 반원형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撐柱)를 설치하였으며, 탱주 사이에 21개 소의 감실이 있어 석불을 안치하였다.

 

이 밖에 이 절에는 마애석불좌상과 천인대(千人臺)가 있다.

마애석불좌상은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승려인 이화응(李華應)이 보문사 주지 배선주와 함께 조각한 것으로, 높이 9.2m, 폭 3.3m이다. 석불좌상의 상부에는 거대한 눈썹바위가 있고, 좌측에는 비명(碑銘)이 있으며, 불상 앞에는 소규모의 석등이 있다. 이 석불과 석굴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또 천인대는 길이 40m, 폭 5m의 큰 바위이다. 이 절의 창건 당시 서역(西域)의 고승이 이 천인대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 뒤 이 바위는 법회 때 설법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바위 위에 1,000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여 천인대라고 명명하였다. 1994년 10월 대한불교조계종 직영 사찰이 되었다

 

◇보문사의 극락보전(아미타전)

극락전 혹은 극락보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시는 아미타부처님과 그 협시보살들을 모신 법당이다.

사찰에 따라서 미타전, 아미타전, 무량수전, 수광전이라고도 하는데, 일부사찰의 경우에는 극락전이 사찰의 주된 전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극락보전의 부처님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부처님과 그분의 협시보살로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혹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진다.

일찍이 아미타부처님이 법장비구로 수행하던 시절에 그 유명한 48대원을 세워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건설하셨다고 한다.

그때 세웠던 서원에 따라 누구나 일념으로 ‘아미타불’이란 명호만을 불러도 극락에 왕생시켜 괴로움을 물리치고 불도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대자대비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아미타불신앙은 예로부터 사후신앙과 관련하여 서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아 왔다.

따라서 전국의 사찰에는 아미타부처님이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많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부처님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거나 미타정인(九品印)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수인을 하고 계신다.

 

극락보전, 극락전의 후불탱화에는 주존이 설법인이나 미타정인을 취한 아미타부처님이며 좌우 협시보살로서 관세음보살(바라보아 우측)과 대세지보살(바라보아 좌측), 혹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배치된다.

그런데 아미타불탱화는 석가모니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의 주존상과 협시보살만 다를 뿐 대웅전의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통례이다.

왜냐하면 아미타신앙은 『정토 3부경』에 의한 신앙인데, 이 경전들을 설하신 분이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이고 듣는 이가 『법화경』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중이기 때문이다.

현재 보문사 아미타불은 하품중생인 수인이다.

 

 

◇석모도 염전 : 선착장에 일주도로를 타고 섬을 반 바퀴를 돌면 일주도로 바로 옆에 거대한 천일염전이 보인다.

우리나라 몇 개 안 남은 천일염전 중 하나인 이곳에서 정제된 소금이 아닌 햇볕에 바닷물을 건조시켜 얻는 천일염을 직접 볼 수 있다.

뙈약볕 아래서 일하는 검게 그을린 일꾼들의 모습도 건강하고, 드넓은 염전의 모습도 장관이다.

우리나라 천일염은 중국 것과 달리 농도가 낮고 깨끗하다고 한다. 소금은 짜다는 게 상식이지만 염분 농도가 낮을수록 좋은 소금이라고 한다.

요즘 중국산 소금이 시중에 많지만 우리나라 바다에서 나는 천일염을 싼 값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석모도 여행의 맛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은 수협에서 판매한다. 가까운 수협은 외포리 선착장 바로 옆에 있다.

 

 

◇민머루 해수욕장과 갯벌: 염전을 지나 작은 고개 하나를 넘으면 석모도에서 하나밖에 없는 민머루 해수욕장이 나온다.

석모도 바다는 모래보다는 돌이 많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해수욕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다물 밑은 거의 1킬로미터나 되는 갯벌. 이 때문에 얕은 수심이 멀리까지 이어져 있어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오기에는 적당하다.

바닷물이 빠지면 거대한 갯벌이 드러난다. 한국관광공사에 지정한 생태관광지일 정도로 게, 조개 등 해산물이 풍부하다.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가족들이 해산물 채취나 진흙 체험을 하는 것도 일석이조의 여행이 될 듯하다.

 

 

◇해암약수 : 일주도로를 타고 가다가 한가라지 고개를 만나면 근처 바닷가에서 해암약수를 찾을 수 있다.

갯벌 중간에 바위들이 있고 그 중간에 600m해저에서 솟아오르는 천연약수가 바로 그것이다.

이 때문에 밀물 때는 약수가 물에 잠긴다. 따라서 이 신기한 해암약수의 시원한 맛을 보려면 물때를 살피는 게 우선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이 해암약수 물을 길으러 수만리 길을 배를 타고 왔다고 한다.

 

*먹거리 : 석모도는 밴댕이회, 꽃게탕, 왕새우 소금구이 등이 유명하다. 꽃게나 밴댕이는 4,5,6월이 제철. 다른 기간은 이 기간에 잡은 것들을 냉동시켰다가 요리해주니까 아무래도 제철에 가서 먹는 것이 좋다.

밴댕이는 속에 내장이 거의 없는 게 특징이고 회를 떠서 거의 통째로 먹는 생선이다. 밴댕이회에 야채와 참기름, 깨, 초고추장을 넣고 버무려 먹는 밴댕이회 무침도 별미. 그리고 밴댕이 구이나 밴댕이 젓갈도 입맛을 돋운다.

이 지역에 인삼이 유명한 탓인지 인삼 막걸리가 또 제맛이다. 걸죽하고 컬컬한 맛이 여름에 한 사발 들이키면 보약이 따로 없다.

 

*숙박 : 숙박은 여관이나 민박을 이용하면 된다. 최근에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통나무 민박집들이 여기저기 지어지고 있어 석모도에서의 하룻밤도 점점 운치있어 질 듯 싶다. 사실 석모도는 석양이 유명하다. 석양을 여유있게 즐기고 하룻밤을 잔 뒤 느긋하게 다음날 나오는 것도 괜찮다.

보문사(普門寺)
인천광역시 강화군(江華郡) 삼산면(三山面) 매음리(煤音里) 낙가산(洛迦山) 서쪽 중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본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며, 한국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이다.
635년(선덕여왕 4) 한 어부가 바다에서 건진 22개의 불상을 낙가산에 모시면서 창건되었다는 연기(緣起)가 전한다. 그 뒤 고려 초기에 회정(懷正, 정수사를 중건한 승려)이 22존 중 삼존불과 18나한은 굴속에 모시고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을 지어 봉안한 뒤에 절을 낙가산 보문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절의 역사는 조선 후기부터의 것만 전해지고 있다. 1812년(순조 12)에 중건한 뒤로 수 차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법당․관음전․대방(大房)․종각․석실 등이 있는데, 이 중 석실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밖에 절에는 마애석불좌상과 천인대(千人臺)가 있고, 마애석불좌상의 상부에는 거대한 눈썹바위가 있다. 석불좌상은 1921년에 조각된 것으로 높이 9.2m, 나비 3.3m이다. 이 석불과 석굴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들이 많다. 천인대는 길이 40m, 나비 5m의 큰 바위로 설법하는 장소로도 쓰였는데, 1000명이 앉을 수 있다 해서 천인대라고 하였다.

 

 

◇해명산은 석모도 선착장에서 보문사까지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전득이 고개(운전기사에게 부탁)에서 내려 우측으로 산행을 하면 해발 308m 해명산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계속가면 방개고개, 새가리고개를 지나면 보문사 뒷산인 낙가산에 닿고, 계속 직진하면 상봉산(316m)까지 갈 수 있다. 이 모든 시간이 2시간 남짓 소요되고 능선을 따라 가기 때문에 그리 힘들지는 않은 코스이다.

산행을 하다보면 주변 섬들이 오밀조밀하게 파노라마처럼 바다 위에 펼쳐져 있어 ‘나는 바다 위를 걸어가는 구나’ 할 정도로 착각에 빠진다. 또한 주위에는 기암괴석들이 생긴 그대로 있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귐을 들으면서 사색을 할 수 있는 절묘한 강화의 멋이다. 종착이 보문사이기 때문에 절간의 포근함을 느끼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는 곳이다.

 

 

◇문수산성(文殊山城): 강화가 아니지만 문수산성을 소개하는 것은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 꼭 거쳐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월곶면(月串面) 포내리(浦內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산성. 둘레 약 2400m. 강화의 갑곶진(甲串鎭)을 마주보고 있는 문수산의 험준한 줄기에서 해안지대를 연결한 성으로,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門樓)가 새로이 복원되었고,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도 남아 있다.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입구를 지키는 성으로 1694년 (숙종 20)에 축성되었고, 1812년 (순조 12)에 중수되었다.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여장(女墻)을 둘렀다. 당시 성문은 3개의 문루와 3개의 암문(暗門)이 있었다. 1866년 (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격전을 치른 지역으로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었고 지금은 마을이 되었다. 사적 제139호.

가는 길은 올림픽 도로에서 제방도로로 가는 길과 김포공항에서 왕복 4차선 도로48번 국도를 따라 강화대교 앞까지 가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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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강화대교를 건너지 말고, 우측으로 삼림욕장 안내판을 보고서 진입하여 1km 남짓 가면 우측으로 삼림욕장입구가 있다. 삼림욕장 길을 따라 계속 산행을 하면 문수산성 성곽허리쯤에 도착한다. 대부분은 그냥 도로 내려오지만 좌측으로 오르면 문수산 정상으로 가고, 우측으로 조금 내려가면 출발했던 삼림욕장 주차장으로 올 수 있다.

 

좌측으로 10분쯤 가면 정상 못 미쳐, 좌측 아래에 문수사가 있고, 오른쪽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 데 이 길은 김포 조각공원 쪽으로 내려가는 트레킹 코스이다. 문수산 정상에는 군인이 주둔하지만 요즈음 들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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