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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인천

강화 철종 외가 와 찬우물

by phd100 2022. 4. 27.

 

강화도령 철종외가(哲宗外家)

철종외가(哲宗外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철종(재위1849∼1863)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던 집이다. 철종 4년(1853)에 지은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안(안채)과 밖(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으로 간단히 분리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철종외가묘(哲宗外家墓)는 철종외가에서 좌측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길 바로 옆에 있다. 묘역에는 염성화(廉星華)·염덕석(廉德碩)·염상임(廉尙任)의 묘역이 있다. 철종 외가는 1859년(철종10)에 강화유수 조충식(趙忠植)이 왕실의 위신을 세운다는 의미에서 철종 외숙 3인의 묘역을 정화하고 비석을 세웠다. 이에 철종의 외가 5대의 벼슬을 추증하고, 냉정리에 전답 10여 정보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제일 우측에 성화의 묘역이 있고, 가운데 덕석, 좌측에 상임의 묘역이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이중활개를 하였다. 묘역의 형태상을 보면 먼저 성화의 묘역을 조성한 뒷편 그 좌측의 빈 공간에 덕석과 상임의 묘역을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계체석이 일자의 형태를 하지 않고 'ㄱ'자나 'ㄴ'자 형태로 연이어 있다. 활개 역시 성화의 묘역에서 연이은 흔적이 보인다.

 

3기 모두 공통적으로 묘표 음기에 ‘용담‘이란 글씨가 움푹하게 파져서 새로 새겨 놓은 흔적이 보인다. 그것은 파평 염씨가 용담 염씨를 가칭하여 철종의 외가라고 속이기 위하여 글씨를 ‘파령’이라고 새긴 것을 새로 정비한 것이라고 한다.

 

<냉정리 찬우물>

한편 선원면 냉정리(찬우물)는 조선25대 임금 철종이 '강화도령'시절에 그 외가인 염씨 댁에 얹혀 살 때 이 마을 처녀(양순이)와 사랑을 맺었던 그 집에 '찬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또 동냥고개(찬우물 고개)는 강화도령이 철종으로 등극하기 전 빈한했던 그의 외숙 염씨가 동냥을 하기 위하여 넘어 다녔던 고개이기 때문이란다.

이곳 냉정리에는 지금도 '염부원군댁'(철종 외가: 철종4년에 재건축, 현재 보수․수리하여 보존하고 있으나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쓰레기, 문짝 등이 떨어져 나가 강화군의 문화재 보존의식을 의심케 한다)이 남아 있고,

또 강화읍성 내에는 왕자의 출생지를 뜻하는 '용흥궁' (龍興宮)이라는 이름의 철종 생가가 남아 있다.

哲宗 1831~1863(순조 31~철종 14)
조선 제25대 왕(1849~1863).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 광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 사이의 셋째아들이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순조의 비; 철종이 즉위하면서부터 수렴청정을 하여,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맞아들임으로써 이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절정에 올려놓았다.)의 명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철종은 형 회평군(懷平君) 명(明)의 옥사(獄事)로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어 농군으로 지낸 데다 나이도 어렸는데 별안간 명을 받아 6월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초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51년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고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득세를 하게 되었다.
정치는 안동 김씨 일족에 의해 좌우되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에 달하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삼남지방 등 여러 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민란의 수습에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런 사회상황에서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창도,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자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시킨다 하여 그를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재위 14년 만인 1863년 12월 3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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