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의 무덤으로 시조묘이다.
김주원의 생애와 활동을 찾기 위해 조선 선조 때 김주원의 후손인 김첨경(金添慶)은 강릉부사 재임 시, 김주원의 현몽(現夢)으로 선대(先代)부터 실전(失傳)된 시조 묘소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그 뒤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한 끝에 지금의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그때 능묘(陵墓) 앞과 사면(斜面: 비탈면)은 돌로 만든 층계가 있었고, 그것의 네 모퉁이에는 1척 남짓한 돌 동자상(童子像)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 무덤 속에서 유해를 담은 백사(白沙) 항아리가 나왔는데, 그 뚜껑에는 북두칠성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김주원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5대손으로 혜공왕 13년(777)에 이찬(伊飡)으로 시중(侍中: 국무총리)이 된 인물이었다.
선덕여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당시 왕의 선출이나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던 화백회의에서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이때 상대등(上大等: 국회의장)이었던 김경신(金敬信: 원성왕)이 화백회의의 의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해 비상수단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먼저 왕실에 들어가 즉위식을 올려 왕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경신이 알천신(閼川神)의 도움으로 즉위하게 되었다고 한 것과, 하늘의 뜻으로 비를 내려 재선출한 결과, 왕이 되었다고 한 표현은 김경신의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꾸며진 말로 이해된다.
한편, 김경신의 전횡에 위협을 느낀 김주원은 강릉으로 퇴거하였다. 그는 강릉으로 낙향한 이듬 해에 원성왕에 의해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명주 관하의 3개 군과 1개 읍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김주원이 받은 식읍은 그의 후손들이 강릉 지역에서 독자적인 지방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경제적 기반이 되어 주었다. 강릉 지방에서 김주원 직계손들의 반독립적인 세력은 신라 말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신라 말기에는 오늘날 영동 지역에 속하는 어떤 세력도 이들과 연고 없이는 존립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위세가 강성하였다.
현재의 묘역은 주차장에서 홍살문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능앞에 능향전(陵享展: 제사를 지내는 전각)이 있고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2기의 능이 있다.
봉분 아랫부분에는 긴 사각형의 둘레돌을 두른 묘 2기(앞前:왕릉, 뒤後:왕비릉)가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묘 앞에는 "명주군왕 김주원묘(溟州郡王金周元墓)"라고 새긴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 동물 석상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특이하게 릉의 첫 번째 석물로 승려석상이 서 있는 게 현존 어느 릉에서도 볼 수 없는 석상이다. 陵이 앉은 자리가 佛國의 세상을 이루기 위함일까...
강릉(江: 하천강. 陵: 무덤릉)이란 명칭도 명주군왕 김주원이 통치한 이후 통일신라, 후삼국시대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명주군(溟洲郡)이 강릉으로 바뀌어 부르는 것은, 원한 서린 경주 알천강의 강과 명주군왕릉이 있는 지역의 릉이 합처져 강릉이란 지역명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강원도의 명칭도 강릉과 원주의 첫 글자임이 강릉이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왕릉 입구에는 1942년 후손들이 기적비(紀蹟碑)를 세웠고, 또한 1960년 이승만 대통령 때 신도비(神道碑)가 금산리 능소 앞에 세워졌다.
<명주군왕 김주원과 그 후손의 얘기>
김주원은 통일신라의 진골 귀족이자 무열왕계 강릉 김씨의 시조로 김헌창의 난을 일으켰던 김헌창의 아버지였다. 현대의 신라계 김씨 대부분이 내물왕계인 것과 달리 김주원은 태종 무열왕 직계였다.
작위인 '명주군왕' 중 명주는 현 강릉시 일대의 옛 이름으로 여기서 따온 이름의 행정구역도 있었다. 군왕(郡王)은 제후왕이라는 뜻이다.
학계에서는 이 작위가 실제 내려졌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본다.
명주군왕이란 작위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가장 이른 명주군왕에 관한 기록이 조선 시대에 쓰여진 《동국여지승람》인데, 지리서의 특성상 당대까지 내려오던 전설을 참고하여 집어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에서 갈문왕 같이 명예직으로서 왕작을 내린 흔적은 있어도 군왕같은 제후왕의 작위를 내린 기록 역시 전혀 없다.
또한 태종 무열왕의 5세손이라는 것만 확실할 뿐, 김주원의 가계가 정확히 어떤지는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무열왕의 차남 김인문의 후손이라는 점뿐인데, 이는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서 김주원의 증손자 김흔이 자기 조상이 김인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전국을 유람하며 수련하던 중 명주의 명문가 박씨의 딸 연화부인과 인연을 맺어 결혼했던 일화가 있는데, 후에 정계에서 세력을 잃게 된 김주원은 자신의 외가가 있는 명주로 물러나게 된다.
이때 원성왕은 비록 왕위에서 밀렸지만 여전히 큰 세력을 지닌 김주원을 달래기 위해 '명주군왕'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명주, 익령(양양군), 삼척, 근을어(평해), 울진 등을 떼어 식읍으로 내주는 등 명주 지역을 거의 김주원의 봉토로 인정해주었다. 물론 이 또한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명주군왕이라는 작위는 사료와 교차검증이 안 된다.
《삼국유사》 <탑상>편의 조신의 꿈에서 김주원의 증손 김흔의 작위가 명주 태수로 나온다. 명주 지역을 거점으로 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이후 김주원의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바로 강릉 김씨의 시작이라고 한다.
《강릉 김씨 족보》에서는 무열왕의 3남 김문왕의 아들 김대충의 아들 김사인(金思仁)의 아들 김유정(金惟正)의 아들이 바로 김주원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족보가 으레 그러하듯 교차 검증이 불가능하므로 신뢰에 신중해야 한다.
본래 중대 신라 왕위는 무열왕계가 계승하다가, 혜공왕과 그 일가가 김지정의 난으로 몰살당하면서 김양상이 선덕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다만 선덕여왕은 모계로 무열왕의 혈통을 잇고 있었고, 이후 하대 왕들과도 혈통이 따로 놀기 때문에 과도기적 왕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무열왕계와 원성왕 이후의 신라 왕들은 무열왕부터 이미 갈라졌지만, 선덕여왕은 성덕왕 때 갈라졌다.
선덕여왕도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 뒤를 먼 왕족 중에서 찾아야 했는데, 애초 혜공왕과 같은 무열왕계인 김주원은 본디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선덕왕의 뒤를 이을 왕위 계승권자였고, 선덕여왕이 죽자 귀족들은 김주원을 불러서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침 그날 금성(경주)에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났다. 김주원의 집에서 궁에 가려면 알천(閼川: 현재는 북천이라 부른다)이란 강을 건너야 했는데, 물이 불어버린 바람에 며칠 동안 알천을 건너지 못해 김주원은 화백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결국 뒤늦게 홍수가 잦아들고 나서 왕궁에 가보니, 그 사이에 왕위는 내물왕계인 정적 상대등 김경신이 집어삼켜 원성왕으로 즉위한 이후였다.
옛날에는 왕도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며, 자연재해 때문에 즉위식에 가지 못한다면 하늘이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를 들어 부여에선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물어서 왕을 죽였다고 하고 조선에서도 큰 문제가 생기면 왕이 덕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선덕여왕이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논의한 후에 왕의 족자(族子, 친족) 주원(周元)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그때 주원은 수도(경주)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진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동생으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경신에게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 원성왕
그러나 기록상의 계절은 정월 13일, 양력 2~3월인데 이 계절은 태풍도 없고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가장 건조한 시기라 홍수가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김주원이 홍수 때문에 왕위를 포기했다는 것도 납득되지 않는 설명이다.
학자들은 김주원의 정적이었던 김경신이 먼저 자신의 지지세력과 함께 궁을 점령,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여 김주원의 세력을 약화시켰기에 김주원이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것이라고 본다. 아무튼 김경신은 즉위해서 원성왕이 된다.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김주원이 명주(강릉)로 일가를 이끌고 갈 때 그 행렬이 아주 크고 성대해 볼 만했다고 한다. 왕위를 다투던 최고 귀족 가문이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이주하던 중 어떤 산에 머물렀는데 그 산이 지금의 경북 청송 주왕산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주왕산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고려의 군사를 막기 위해 주왕산성을 쌓았다는 전설도 있다.
다만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났음에도 그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이는 것은, 아들들은 수도 금성의 정계에 계속 남았다.
첫째 김종기는 시중을 지내는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하지만 둘째 김헌창이 김헌창의 난을 일으키고 그 아들 김범문의 난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무열왕계는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첫째 김종기의 후손은 김종기의 손자로 신무왕 옹립에 공을 세우고 문성왕 대 권신으로 자리 매김했던 김양 및 그의 사촌인 김흔 때 대가 끊겼고
둘째 김헌창의 후손은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반란으로 그 아들인 김범문 때 멸족된다.
다만 김주원 본인 및 나머지 일가는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웅천주(웅주: 지금의 공주)와는 완전히 국토 반대편인 하서주(명주)에 있었고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달리 처벌받지는 않았다.
후삼국시대 명주의 호족이었던 김예(金乂)가 그의 후손이다. 김예는 고려 건국 과정에서 공을 세워 왕씨 성을 하사받아 왕예가 되었다. 단 고려에서 왕씨를 사성받은 사람들은 고려 멸망 이후 조선에서 본래 성 강릉 김씨로 복성했다.
초기 조선은 왕씨를 숙청했는데 실제 왕씨가 아닌 사성 왕씨까지 그럴 필요는 당연히 없었기 때문으로 살아 남았다.
한편 김예 이외에 궁예를 지지했던 명주의 호족 왕순식이 김주원 후손이라고 태조 왕건 드라마를 비롯한 여러 매체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는데, 순식이 김주원의 후손이라는 당시 기록은 없다.
고려 대에 왕건에게 신뢰의 증표로 개성 왕씨를 하사받아(사성정책) 왕순식으로 개명했던 것인데 명주의 호족이라는 점과 원래 왕씨가 아니었다는 점, 위의 김예와 같은 명주 지방 호족이었기 때문에 김주원의 후손이지 않았겠냐는 의심이 있으나 사서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김주원의 셋째 아들의 후손이라는 서술은 일단 셋째 아들의 존재부터가 정식 사서와 교차검증되지 않은 정보이다.
◆ [경북 청송 周王山과 강릉 溟洲郡王陵과의 關聯]
周王山은 전설이 많은 산이다. 그중에서도 주왕산 주왕굴에 얽힌 전설이 단연 으뜸이다. 周王山은 雪嶽山, 月嶽山, 雉嶽山, 月出山과 더불어 오대 암산(巖山)에다, 淸凉山, 馬耳山, 伽倻山, 龍華長城과 더불어 오대 기암(奇巖)에 속하며 폭포 또한 설악산 비룡, 토왕성, 대승폭포內延山 12폭포만큼은 아니지만 뛰어난 오대 폭포를 자랑하는 산이다 보니 전설이 많을 만도 하다.
<자하성 수달래의 전설>
주왕굴 가는 길은 수달래의 전설과 돌무더기만 남은 자하성의 전설로부터 시작된다.
산철쭉으로도 불리는 이 꽃이 유난히 붉은 것은 주왕의 죽음으로 흘러내린 핏물을 타고 피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한다. 또 화살을 맞고 명을 끊었기에 수단화(壽斷花)라고도 불린다.
주왕굴로 가는 입구에는 주왕암이 세워져 있다. 주왕을 기리기 위한 암자인데 온통 거대한 기암이 둘러쌓고 있는 곳에 주왕굴로 가는 작은 오솔길에 철계단이 조성되어 있다.
주왕암의 첫 정자는 주왕을 기리는 가학루(駕鶴樓)다. 가학(駕鶴)이란 천자가 타는 수레를 일컫는 말이다. 주왕암의 당우라야 요사채와 가학루와 나한전이 전부다.
<주왕산의 주왕굴의 주인인 주왕(周王)괴 주왕산>
사찰 안내서에 따르면 '주왕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중국 당나라 때의 주도(周鍍)는 자신을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당나라 수도 장안을 공격했으나 안녹산의 난을 평정한 곽자의(郭子儀) 장군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도망쳐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주도(周鍍)는 진(秦)나라 때 복야상서 벼슬을 지낸 주의라는 사람의 9대손으로 태어나 대단히 총명했다고 한다)
후주(後周)라는 나라는 중국의 고대국가 역사를 보면 907년부터 송이 건국된 960년까지 5대 10국이 난립했는데 오대(五代 또는 5호) 10국의 마지막 왕조다. 오대(五代)의 마지막 왕조로 951년에 후한을 무너뜨리고 곽위(郭威)가 개봉(開封)에 세운 국가이다.
국호는 주(周)이지만 과거 무왕(武王)이 세운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후주(後周), 성씨를 따라 곽주(郭周), 시주(柴周)라고 부른다.
곽위(郭威)는 황제가 되었지만 거병할 때 자식이 모두 살해되어서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954년에 죽을 때 처남의 아들인 시영(柴榮)을 양자로 세워 제위를 잇게 하니 이가 후주(後周) 세종(世宗, 954년 ~ 959년)이다. 그러나 세종 역시 959년, 겨우 39살에 병사하고 그의 어린 아들인 시종훈에게 제위를 잇게 하였지만 군대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서 장군 조광윤(趙匡胤)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통일 왕조의 초석을 닦은 후주도 겨우 9년 만에 멸망하고, 조씨에 의한 송(宋)이 개창되었다. 그러나 이 오대 최후의 왕조인 후주의 황족인 시(柴)씨는 조광윤의 쿠데타 때에 선양(宣讓)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대귀족으로서 대우받았고, 시종훈 본인도 조광윤의 후한 대우와 보호를 받았다.
그런데 주왕의 전설은 당나라 때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명장 중 한 분인 곽부의 장군에게 패하여 신라의 석병산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안록산의 난은 755년경에 발발했는데 망하지도 않은 나라의 부흥도 그렇고 인물과 시대 또한 맞지 않는다.
대전사에서 발견된 낭공대사(郞空大師)의 비전(祕傳)인 <주왕사적>의 비기(祕記)에 의하면
인물과 연대가 왜곡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암튼 주왕은 반란이 실패하자 멀리 한반도의 신라 땅 석병산으로 피신했다. 그는 산 입구가 되는 주방천 협곡에 산성(자하성)을 쌓고 재기를 노린다. 나중에 주왕이 신라 땅에 숨어 들어간 것을 안 당나라에서는 그를 잡아달라고 신라에 요청했다.
신라는 마일성 장군의 형제들을 필두로 진압군을 이곳 석병산으로 보내 주왕과 그의 군사들을 격퇴했다.
신라군과의 싸움에서 패한 주왕은 폭포수가 입구를 가리고 있는 주왕굴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몰래 세수하러 나왔던 주왕은 그만 마장군의 낚시에 걸려 생포되어 당나라 장안에서 참수되었다고 하고, 또 주왕이 마장군의 화살과 철퇴를 맞고 최후를 맞았다고도 전한다.
주왕이 신라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흘린 피가 주방천을 물들인 뒤 붉은 꽃망울을 피웠다는 꽃이 주왕산 수달래이다. 그래서 수달래는 주왕의 넋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무장굴은 주왕이 갑옷과 무기를 숨긴 곳으로 전해진다. 기봉은 주왕이 적과 대치할 때 대장기를 세웠다고도 전해지고, 군량미처럼 보이기 위해 낱가리를 돌렸다고도 전해진다.
주왕산 초입의 대전사(大典寺)는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을 위해 고려 태조 2년 보조국사 지눌이 세웠다고 전해지고, 백련암은 주왕의 딸 백련공주의 이름을 딴 암자라고 한다.
연화굴은 백련공주가 성불한 곳이라고도 하고 주왕이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라고도 한다.
주왕굴 앞의 주왕암은 주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곳이라고 한다. 이것이 주왕산에 전해지는 주왕의 전설이다.
주왕산에는 이런 전설이 많이 배어 있다. 달기폭포니 달기약수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는 주(周)나라와는 상관도 없는 지명이다. 이 이름은 중국의 옛 상고시대의 은(殷)나라 시대
폭군으로 불리는 주(紂)왕 애첩인 <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달기라는 이름만 따온 것이다.
☆ 주왕산에는 신라의 마일성장군과 관계되다 보니, 신라의 왕위 쟁탈 사건과 연계된 이런 전설도 전한다. 강릉 명주군왕릉과 관계있는 전설이다.
신라 시대의 원성왕(김경신)과 왕위 계승을 다투었던 김주원이 당시 이 산에서 군사를 이끌고 농성하여 그 이름을 따 주왕산이라 했다는 가설이 있다.
이 전설은 제1폭포를 오르다 보면 급수대를 만나는데 그 급수대의 안내판에 적혀 있는 내용에 따르면 김주원(金周元)이 김경신(金敬信)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이곳 주왕산에 대궐을 건립하였다는데, 당시 산 위에는 우물이 없어 계곡의 물을 퍼 올려 우물물을 대신하였는데 그 후 이곳을 급수대라 불렸다고 한다.
전해지는 역사를 보면 왕위 계승 싸움에서 패배한 김주원은 원성왕에게 정치적 위협을 느꼈던지 서라벌 정계를 떠나 본인의 장원(莊園)과 친족 세력이 있는 명주(오늘날의 강릉시)지방으로 물러나게 되고 원성왕 2년(786)에는 원성왕이 그의 세력을 달래기 위해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하였다. 후에 김주원은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만으로 보면 김주원이 이곳 주왕산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김주원이 사후 그의 아들 김헌창이 822년 3월 18일(신라 헌덕왕 14년), 웅천주 도독으로 재임 중이던 신라 진골 귀족으로 난을 일으켰는데 <삼국사기>에는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것은 김주원이 왕위쟁탈전에서 밀려난 지 무려 37년 후로 원성왕 이후 세 번이나 왕이 바뀐 뒤니,
아버지의 왕위를 이유로 난을 일으켰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다.
이는 김헌창이 본인의 권력욕과 야심 때문에 난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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