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洛山寺)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오봉산(五峰山: 낙산)에 있는 통일신라 671년(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이다.
해변에 위치한 특이한 구조를 갖춘 사찰로,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 도량 중의 하나이다. 낙산은 범어 보타락가산(補陀落伽山, 범어 Potalaka를 음역)의 준말로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참고1.
신라 문무왕 때 의상은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낙산 동쪽 바닷가 굴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친견하기 위해서 찾아온 곳이 이곳이다.
굴 입구(현 의상대 자리)에서 7일 동안 재계하고 새벽에 좌구(座具)를 동해바다물 위에 띄우자 용중(龍衆: 용의 무리)과 천중(天衆: 하늘나라의 사람들) 등 8부신장이 굴속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예배드려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받아서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다시 의상에게 바쳤다.
의상은 이들을 가지고 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하여 기도하든 중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보았다.
관세음보살이 이르기를 “좌상(座上)의 오봉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였다.
의상은 그곳에 금당(金堂:법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신 뒤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그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聖殿: 金堂을 聖殿이라 하고, 金堂에 들어가는 문을 大聖門이라 함)에 모셨다.
창건 이후 원효(元曉)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이 절을 찾았는데, 원효(元曉)는 절에 이르기 전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나게 되었지만 알아보지 못하였고, 낙산사에 가서도 풍랑이 심해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참고2
- 홍예문은 반월형의 문루(門樓)인데, 낙산사 입구에 세워져 있다.
화강석 26개를 장방형으로 다듬어서 반월형의 문을 만들었는데, 이 26이라는 숫자는 당시 강원지부(江原之部)의 고을 숫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군수가 석재를 하나씩 모아서 세웠다는 속전이 있다.
(강원이란 명칭은 강원지부로 1395년(태조4년)에 나타난다. 지금과 같은 행정 구역이 아니고 고을이름이 곧 지방 이름이다.
강원감영은 원주에 설치되었고 조선 말기인 1895년 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무려 500년 동안 강원감영은 그 위치를 옮기지 않고 강원도의 26개 부, 목, 군, 현을 관할하였다. 따라서 강원감영이 있던 원주는 강원도의 중심 도시였다.)
- 이 낙산사의 관음상에는 승려 조신(調信)이 꿈을 꾸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참고3
(참조: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승려가 사랑이 맺어지기를 관음상 앞에서 염원하였는데, 해로하기 50여 년 만에 결국 고통을 안고 헤어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광수(李光洙)는 이것을 「꿈」이라는 소설로 발표하였다.)
- 절에서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건물을 원통전(원통보전)이라 하는데 낙산사의 경우 창건 설화부터 관세음보살과 관련이 있으므로 일반적인 절과 달리, 석가모니와 같은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이 없으며 이 원통보전이 절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원통보전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삼국시대가 아니라 조선시대에 만든 것이지만 조신의 꿈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원통보전을 더 눈여겨 보게 될 것이다.
- 원통보전 앞 칠층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었던 것을 1468년(조선 세조14)의 중창 때 7층으로 개축했다고 전한다.
- 원통보전 주변을 둘러싼 담장이 아름다워 담장이 따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에 등록되어 있다. 이 담장 역시 화재 때 상당부분이 소실됐으나 남아있는 부분들을 토대로 복원했다.
원통보전의 담장(원장:垣墻)은 적토(赤土)로 빚은 기와와 화강석을 배열한 것으로 전체 높이 3.7m, 길이 220m에 이르고 있다.
- 근년에는 화강암으로 다듬은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입상(海水觀音立像)을 조각하였는데, 석재는 전라북도 익산의 호남 채석장에서 반입한 것으로 750톤이 소요되었다. 조각가 권정환에 의해 1972년 5월 착수되어 5년 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點眼)되었다.
높이 16m, 둘레 3.3m, 좌대 넓이 6㎡이며, 좌대의 앞부분은 쌍룡상(雙龍像), 양 옆으로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 한 송이 연꽃으로 된 연봉(蓮峰) 위에 관음보살상을 안치하였다.
관음상은 왼손에 감로수병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천의(天衣) 자락을 살짝 잡고 있으며, 미간에는 백호(白毫)를 박아 온 누리에 퍼지는 자비의 광명을 상징하고 있다. 크기와 원만한 상호(相好), 균형 잡힌 체감미 등이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다.
- 이 밖에도 이 절 옆에는 의상이 홍련 위에 나타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파랑새가 굴속으로 들어간 곳에 불전을 지었다고 전하는 자리에 세운 홍련암이 있으며, 의상이 좌선했다는 의상대(義湘臺) 등이 있다. 도량 전체가 사적 제495호 양양 낙산사 일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다시 복원한 원통보전 · 종각 · 일주문 · 천왕문 · 선실 · 승당 · 객실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양양 낙산사 홍예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인 낙산사원장(洛山寺垣墻),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낙산사 홍련암(洛山寺 紅蓮庵) 등이 있다.
2005년 강풍을 타고 번진 산불로 낙산사는 큰 화재 피해를 입었다. 문화재청은 2007년까지 원통보전, 범종루, 심검당, 취숙헌, 선열당, 홍예문누각, 홍련암연화당, 해우소 등을 신축하였고 2009년에는 설선당, 근행당, 응향각, 정취전, 취숙헌, 고향실, 빈일루, 대성문 등을 신축하였다. 2015년 현재 화재로 손실된 사찰의 모습은 복원되었고, 주변 숲은 회복 중에 있다.
<참고>☆1.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곳
(인도에서 관세음보살 신앙이 형성된 시기는 1세기 말 무렵이다. 현세 이익을 주는 보살로서 영향력이 대단하여 인도는 물론 중국과 한국ㆍ일본ㆍ티베트에서 널리 신봉하였으며 그런 까닭에 관세음보살의 거주지는 곳곳에 등장한다.
인도에서는 남쪽 끝의 마라야산 동쪽 구릉지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엄경』「입법계품」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구도를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던 중 보타락가산에 도착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다에 접한 아름다운 곳이라 하였다.
중국의 승려인 현장도 인도에 다녀와서 스리랑카로 가는 바닷길 가까이에 이 산이 있다고 기록한 바 있다.)
<참고>☆2. 원효의 관음보살 친견 불발
원효가 낙산사를 찾아 남쪽 교외에 이르렀을 때, 논 가운데서 흰 옷을 입은 여자가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장난삼아 그 벼를 달라고 하자, 여자도 장난삼아 벼가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법사가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자 한 여인이 월경 수건을 빨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을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쳤다.
법사는 그 물을 엎질러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말하였다.
“불성을 깨닫지 못한 중놈!”
그리고는 홀연히 숨어서 보이지 않았고, 다만 그 소나무 아래에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법사가 절에 이르러보니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또 아까 보았던 신발 한 짝이 있었다. 그제서야 원효법사는 전에 만났던 여자가 관음의 진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하였다. 법사가 신성한 굴로 들어가 다시 관음의 진신을 보려고 하였지만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낙산사를 떠났다.
<참고>☆3 낙산사 조신의꿈
옛날 경주가 신라 서울이었을 때, 경주 세달사(世達寺: 지금의 흥교사(與敎寺))의 농장이 강원도 명주(강릉) 내리군(㮈李郡)에 있었다.
本寺에서 승려 조신(調信)을 농장 관리자로 삼았다. 이때 관리인 조신 스님은 20세를 갓 넘긴 젊은 스님이었다. 조신이 농장에 근무하든 중, 이곳 태수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좋아하게 되어 깊이 짝사랑에 빠져서,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행운을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몰래 기도하였다.
어느 날 낙산사 관세음보살 앞에 나아가 정진하던 조신 스님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어 다시 염불정진을 하려 해도 가슴만 뛸 뿐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조신스님은 여느 때와 달리 아침, 저녁으로 낙산사에 올랐다. 마침 태수의 딸이 낙산사에 와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조신은 기도보다는 태수의 딸을 먼발치서나마 바라보는 기쁨이 더 컸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던 날, 조신 스님은 낙산사에 다시 왔으나 낭자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기도를 마치고 떠난 것이었다.
침식을 잃을 정도로 사모의 정에 빠진 조신 스님은 그날부터 산사 관음보살님께 낭자와 혼인할 수 있기를 간곡히 기원했다.
『관세음보살님! 소승 출가한 신분으로 욕심을 내었으므로 다음 생에 축생이 될지언정 금생에 꼭 김태수의 딸과 연분을 맺고 싶사옵니다. 소승의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조신 스님이 애태우며 기도하는 가운데 무심한 세월은 수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태수의 딸 낭자는 혼인을 약속한 준수하면서도 늠름한 한 청년과 함께 낙산사 부처님께 인사드리러 왔다.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이 모습을 목격한 조신스님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조신은 해가 저물도록 관음상 앞에 앉아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관세음보살을 원망하면서 하루만이라도 낭자와 좋은 인연이 맺어지길 간곡히 발원했다.
어느덧 밤은 깊어 파도소리와 솔바람 소리만 들릴 뿐 주위는 적막한데, 울며 기도하던 조신은 그만 법당 안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조신은 문득 인기척을 느껴 둘레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꿈속에서도 그리던 낭자가 바로 옆에 와 있었다. 스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스님, 죄송합니다. 기도에 방해가 되실 줄 아오나 스님을 잠시 뵈온 이래 하루도 잊을 길이 없어 몰래 빠져나왔사오니 너무 나무라지 말아 주세요.』
『사모의 정으로 말한다면 소승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아가씨는 이미 정혼한 몸 아닙니까?』
『부모의 명을 거역 못해 억지로 정한 혼사입니다. 이렇게 밤중에 스님을 찾아왔사오니 속히 이 몸을 데리고 어디로든 가주세요.』
『어디로요?』
『어디로든 스님과 제가 단둘이만 살 수 있는 곳으로요.』
정녕 애타는 듯 발을 구르는 낭자를 보는 조신은 기뻐 어쩔 줄 몰라 관음보살을 향해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소원을 이렇게 들어주시다니….』
조신은 낭자와 함께 남의 눈을 피하느라 산속 길을 걷고 칡뿌리로 요기를 하며 향리로 돌아갔다.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은 비록 벽뿐인 집에서 입에 풀칠하기 바빴으나 내외의 금실은 더없이 좋았다. 그렇게 40년을 사는 동안 조신 내외는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 아이들이 커가매 내외는 좀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초야를 두루 돌아다니게 되었다.
때마침 명주 해현령을 지나는데 15세 된 큰아들이 이름 모를 열병과 배고픔을 못이겨 그만 죽고 말았다. 조신 내외는 통곡을 하며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아들을 묻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익현에 이르러 이들은 초가집을 짓고 정착했다.
그러나 설상가상이라더니 가난한 조신 내외는 병을 얻게 돼, 거동을 할 수 없어, 열두 살 된 딸아이가 밥을 얻어다 여섯 식구가 연명해야 하는 눈물겨운 살림에 봉착했다.
어느 날 딸아이가 마을 개에게 물려 다리를 절룩거리며 돌아와 몸져 눕게 되자 조신의 아내는 목이 메어 흐느껴 울었다. 슬피 울던 조신의 아내는 무슨 결심이나 한 듯 입을 열었다.
『여보, 이제 우리 헤어집시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사모의 정이 깊어 어떤 고생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지요. 그로 인해 5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두터운 인연을 맺게 됐으나 이제 늙고 병들고 가난에 쪼들려 아이들을 추위와 굶주림에서 구하지 못하다 보니 지난 세월이 그저 무상하기만 합니다.
형색 좋던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위의 이슬처럼 사라지고 지란(芝蘭)같은 백년가약도 버들가지가 바람에 날아간 듯 없어져 버렸으니, 당신은 나 때문에 괴롭고, 나도 또한 당신 때문에 근심을 하게 되는군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지난날의 기쁨이 바로 우환의 터전이었어요. 만나고 헤어짐이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오니 제발 지금이라도 헤어집시다.』
이 말을 들은 조신은 같은 생각이었는지 크게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아이를 둘씩 나누고 헤어졌다.
『저는 고향으로 갈 터이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부인의 말을 듣고 막 작별을 하려는데 조신은 그만 꿈에서 깨어났다.
날은 거의 다 밝았는데 법당 안에는 등잔불만 깜빡이고 있었다. 조신은 한 생을 다 살은 듯 세상사가 싫어지고 망연할 뿐이었다.
탐욕의 마음도 그리움도 눈 녹듯 깨끗이 녹아버리고 말았다. 앞에 앉아 계신 관세음보살 뵙기가 면구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날이 밝자 조신은 명주(강릉) 해현령(蟹縣嶺)에 가서 꿈에 아들을 묻었던 곳을 파 보았다.
그곳에선 돌 미륵불이 출현했다. 조신은 삼배를 한 후 물로 말끔히 씻어 부근의 절에 모셨다. 그 후 조신은 장사의 소임을 그만두고 서라벌에 돌아가 사재를 털어 정토사를 세우고 수행에 전념하여 낙산사 聖중의 한 스님인 조신대사가 되었다.
<참고>☆<낙산사의 소실 및 복원의 오랜 흔적이 남긴 역사>
858년(헌안왕 2)에는 사굴산파의 개산조 범일(梵日)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낙산 위에 3칸의 건물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였다.
이 절은 고려 초기에 산불로 소실되었으나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면하였다. 고려 태조는 고려를 세운 직후 봄·가을로 낙산사에 사자를 보내어 재를 올렸을 뿐 아니라, 이것을 갑령(甲令)으로 삼았다.
그리고 속인들은 이 낙산의 굴 앞에서 예배하면 청조(靑鳥 : 파랑새)가 나타난다고 믿었는데, 1185년(고려 명종 15) 당시의 병마사였던 유자량(庾資諒)이 굴 앞에서 예배하자 파랑새가 꽃을 물고 날아와 갓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유자량이 청조의 영험을 보고 지은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몽고의 침략으로 이 절이 전소될 때 두 성상(聖像)을 모신 건물도 불타 버렸고, 여의주와 수정염주는 이 절의 노비가 땅에 묻고 도망쳤다가 난이 평정된 뒤 파내어 명주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쳤다.
명주 감창사 이녹수(李祿綏)는 1258년(고려 23대 고종 45)에 각유(覺猷)에게 어부(御府)에 모시도록 하였다. 그러나 관음상은 이때 화를 당하여 형체만 남았고, 복장(腹藏: 불상의 복부 부분에 넣어 놓는 성스러운 물건) 속의 보물은 몽고병에게 약탈당하였다.
이규보(李奎報) 등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관음상을 봉안할 때 심원경(心圓鏡) 2개, 오향(五香) · 오약(五藥) · 색실 · 비단주머니 등을 관음상의 복중에 넣고 겉모습도 복구하였다. 1468년(조선 세조 14) 세조는 학열(學悅)을 중창주로 삼아 이 절을 중창하게 하였다.
1471년(조선 성종 2) 선학(仙學)이 용선전(龍船殿)·영산전(靈山殿)·어제루(御製樓)·승당(僧堂) 등을 보수하고 단청하였다. 4년 뒤 불탔으나 선학이 복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관음전과 관음상·정취전·금불상이 모두 소실되었다.
1631년(조선 인조 9) 종밀(宗密)이 중창하였고, 1643년 도원(道源)이 중건하였으며, 1905년 경은(敬隱)이 선당(禪堂)과 후각(後閣) 등을 복구하였다.
신라 시대의 헌안왕 2년(858년)에 범일 대사의 주도하에 중창하였으나, 고려 고종 18년(1231년)에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큰 손상을 입었다.
조선의 억불 군주였던 태종은 이를 복원하기 위한 법회를 주최하였고, 세조 13년(1467년)에는 왕의 명령으로 다시 한번 크게 복원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화재의 피해를 다시 한번 받았다.
인조 시기에도 여러 차례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고, 정조 원년(1777년)에 화재로 다시 한번 파괴된 후, 이듬해에는 다시 중건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6.25 전쟁으로 인해 다시 소실되었으나, 1953년에는 완전히 재건립되었다.
2005년 낙산사 화재 때 건물 전체가 소실됐다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원래 청기와 건물이었던 원통보전이 일반적인 기와를 올린 건물로 바꼈다. 내부에는 보물 제1362호에 지정된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원통보전까지 불이 번지기 전에 옮겨놔 다행히 화를 면했다.
이 화재로 인해,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던 낙산사의 동종은 녹아버려 소실되었다. 원래 금속 종이 녹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되지만, 산불의 온도는 생각 이상으로 매우 높다. 이렇게 높은 온도 아래에서는 천°C 근반의 녹는점을 가진 구리나 청동조차도 쉽게 녹을 수 있다.
불행히도, 종이 떨어져서 땅에 닿았다면 덜 피해를 볼 수도 있었겠지만, 종루가 화재에 타고 종이 덮여 화덕 상태가 되어버린 탓에 종은 완전히 녹아버린 것으로 추측된다.
낙산사 화재는 2005년에 일어난 산불 중 가장 큰 것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 화재로 인해, 낙산사에 있는 여러 건물들이 타버렸다.
이 중에는 원통보전, 홍련암, 백련암, 석조탑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피해로 인해, 낙산사의 복원 작업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낙산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신앙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많은 신도들이 찾아와 관음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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