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미술관(謙齋鄭敾美術館)
미술관은 서울시 강서구 양천로 47길 36에 위치한다.(9호선 양천향교역 2번 출구에서 도보 9분 소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 외침을 겪은 조선은 전쟁의 상흔을 씻고 조선 고유의 문화를 만들고자 했다. 이 시기를 우리는 ‘진경(眞景)시대’라 한다. 겸재 정선은 진경 문화의 선봉에 있었다. 정선의 예술혼을 오롯이 담고 있는 곳이 “겸재정선미술관”이다. 이곳에서 조선 후기 화풍을 엿보고 정선이 직접 답사하며 화폭에 담은 아름다운 우리 산하를 감상해 볼 수 있다.
지금은 시골 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천 원짜리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은 조선 중기의 학자 「퇴계 이황」이다. 그런데 지폐를 뒤집으면 산수가 어울린 옛 그림 한 장이 나온다. 바로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다. 퇴계 이황과 관련한 그림은 그의 유적만큼이나 많다. 그럼에도 정선의 그림이 천 원짜리 지폐에 있는 것은 그가 우리나라 고미술을 대표할 만한 화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선은 조선 후기 사람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를 보통 '삼원삼재(조선시대의 6대 대표 화가, ☆3원(三園): 단원(壇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 ☆3재(三齋): 긍재(兢齋) 김득신, 현재(玄齋) 심사정, 겸재(謙齋) 정선'라고 부른다. 호가 '원'으로 끝나는 세 명과 호가 '재'로 끝나는 세 명을 일컫는다)라고 하는데,
이들은 화가마다 다른 개성을 갖고 있어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초등학교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화가는 단연, 정선과 김홍도다. 정선은 기존에 익숙한 중국풍 그림에서 벗어나 우리 식의 산수화를 그렸다.
정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중국 시화에 나오는 풍경이나 중국 그림을 따라 그리는 관념산수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정선은 실제 우리나라 풍경을 직접 보고, 느껴지는 감흥을 그림에 담았다. 그것이 바로 '진경산수화'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등이 초등학교 미술 교과서에 꾸준히 언급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풍경화는 보통 풍경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만 정선은 달랐다. 풍경 속에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집어넣었다. 풍경의 일부를 실제보다 크게 그리기도 하고 붓 두 자루를 동시에 쥐고 그리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정선의 화풍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 후대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 〈계상정거도〉
정선은 퇴계 이황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안동의 '도산서당'을 그렸다. 이 그림이 바로 <계상정거도>다. 이 그림은 보물 585호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에 실려있다. 『퇴우이선생진적』은 겸재 정선 외에 이황, 송시열, 정선의 아들 정만수 등의 그림을 모아 엮은 그림첩이다.
☆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는 그의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는 당시 정선이 살던 동네(지금의 서촌)에서 그린 그림이다.
소나기가 내린 후 개기 시작하는 인왕산의 풍경을 담았다. 먹을 여러 번 덧칠하는 '적묵법'과 옆으로 뉘여 그린 '측필' 등 개성 넘치는 기법이 잘 드러난다. 그림 속의 집은 정선의 벗 이병연의 집이다. 그는 정선과 평생을 같이 한 벗으로, 〈인왕제색도〉는 죽음을 앞둔 친구를 위해 그린 그림이다.
국보 제 217호 〈금강전도〉는 눈 덮인 금강산을 그렸다. 금강산을 수직으로 죽죽 내려 그리는 '수직준법'을 썼다. 점을 찍는 '미점준'으로 소나무와 흙을 그렸다. 그는 실물과 똑같이 그리기보다는 특징을 잡아 그렸다. 잘 그리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그래서 〈금강전도〉는 더욱 명작으로 손꼽힌다.
미술관 입구에는 정선의 그림을 현대적을 재해석한 설치작품이 있다. 임옥상의 〈신新 진경산수화〉다. 높이 3m, 길이 30m의 초대형 작품이다. 장대한 크기가 관람객을 압도한다.
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규모다. 전시실은 1층 '기획전시실'과 '양천현아실', 2층 '겸재기념실'과 '체험학습실', 3층 '다목적실'과 '뮤지엄숍' 등으로 이루어졌다.
아쉽게도 정선의 원본 작품은 많지 않다. 〈청풍계도〉와 〈조어〉 정도가 그 아쉬움을 달랜다. 하지만 전시 구성은 알차다. 정선의 생애와 작품을 눈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만지고 재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1층은 정선이 양천에 머물던 시절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정선이 그린 양천현 일대는 현재 겸재정선미술관이 위치하고 있는 강서구다. 강서구의 현재 지도와 함께 위치별로 그림을 표시해서 전시한다. 2층은 좀 더 재미나다. 전국 지도를 펼쳐서 정선의 발자취와 그의 그림을 찾아본다. 시간순으로 그가 머물던 곳들을 나열했다.
특히 서울 한강 일대는 실제 지형을 모형으로 만들어놓았다. 지형에서 원하는 위치를 선택하면 정선이 그린 그림을 보여준다. 대략의 위치와 그림 속 풍경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겸재정선미술관이 위치한 양천 일대의 그림도 있다. 실제로 미술관 옆 궁산에 오르면 그림 속 풍경과 현재의 풍경을 비교할 수 있다.
정선의 금강산 그림도 한 축을 차지한다. 〈금강전도〉는 금강산의 일만이천봉이 한눈에 들어올 수 있는 부감법을 사용했다. 부감법은 마치 물고기의 시선처럼 둥근 어안렌즈로 보는 듯한 기법이다. 풍경을 직접 보고, 자신의 느낌을 잘 살린 정선의 화법을 느낄 수 있다.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전시물도 볼거리이다. 정선의 금강산 그림이 계절에 따라 변화한다. 꽃잎, 비, 눈 등의 애니메이션이 더해져 살아있는 풍경처럼 계절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체험학습실은 정선의 그림을 좀 더 꼼꼼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스크린과 디지털 터치 방식으로 체험 감상을 한다. '진경 속 여행'에서는 강아지나 새가 살아있는 듯 움직이고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 작품 속의 인물을 확대해 들여다볼 수도 있다.
☆ 겸재 정선은 조선시대 사람으로는 드물게 84세까지 장수했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그림도 완숙해졌는데, 그의 대표작 〈진경산수화〉도 중년 이후에 완성했다.
그는 60세에 모친상을 당하고 청하현감 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3년 상을 치르고 나서 그의 그림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건 65세 전후이다. 〈청풍계도〉(64세), 〈한양전경도〉(65세), 〈경교명승첩〉(66세), 〈양천팔경첩〉(67세) 등 모두 노년의 작품이다.
일대의 역작인 〈인왕제색도〉를 그린 것도 그로부터 10년 후인 76세의 일이다. 당시 양천현이 지금의 강서구 일대이다. 양천현청이 있던 자리가 바로 겸재정선미술관이 있는 궁산 아래이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정선이 나타나기 이전까지 중국의 그림을 보고 산수화를 따라 그렸다. 그러니까 굳이 밖으로 나가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었다. 정선이 다른 화가들과 다른 점은 우리나라의 풍경을 자신만의 느낌으로 그림에 담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제 풍경을 보러 다녀야 했다. 그러니 정선은 여행가였을 것이다. 정선의 그림이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도 37세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린 〈신묘년풍악도첩〉 이후였다.
조선시대 영조 때의 대신 원경하는 "김창흡의 시와 정선의 그림이 있으면 높은 곳에 수고로이 오르지 않고도……이 몸은 늘 금강산에 있고, 누워서 명산을 유람하니 옛사람이 부럽지 않다."고 했다.
정선은 하양현감, 청하현감 등 부임하는 지역마다 여행을 하며 그림을 많이 그렸다. 58세 때는 내연산에 다녀와 〈내연삼용추도〉를 그리고 62세 때는 청풍, 단양, 영춘, 영월 등을 여행하고 〈사군첩〉을 그렸다. 72세 때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해악전신첩〉을 그렸다. 그는 그림을 좋아해 여행을 많이 다녔지 만 또 한편으로는 여행을 좋아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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