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유배문학관(南海流配文學館)
경남 남해군 남해읍 남해대로에 있는 ‘남해유배문학관’은 국내 최대 문학관으로 유배문학을 연구하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010년 개관되었다.
권력도 부귀영화도 모두 빼앗긴 채 '유배'라는 백척간두에 선 절망적인 삶 속에서도 문학과 예술을 꽃 피웠던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불멸의 혼을 기리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로 건립된 남해유배문학관은 세월 속에 잊혀 져 가는 유배객들을 기리는 문학의 진한 향기가 피어나는 공간이다.
유배당한 선비의 독백으로, “모든 걸 버리고 왔으니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다."는 그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은 공간이다.
남해로 유배된 이들을 연대별로 나열해 놓은 공간에서는 너무 많은 이들이 이곳 남해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그중 우리들 귀에 익숙한 자암 김구, 악천 남구만, 서포 김만중, 소재 이이명, 후송 류의양, 김용 제씨(諸氏)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남해의 민속 생활을 재현해 놓은 공간에서는 척박한 이 땅에서의 고달픈 생활이 코끝을 찡하게 한다.
더욱이 서포 김만중의 문학관실에서는 서포의 모든 것을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해놨다. 또한 서포의 사친시(思親詩)는 어머니에게로 향한 효심으로 읽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문학관내에는 다양한 학습프로 그램이 있어 어린이들의 이해를 돕게 해 놨다.
야외 공간에는 귀양가는 선비의 모습을 재현 전시했고, 서포의 “구운몽”과 “사시남정기“를 만화와 함께 게시하고 있어 두 권의 책을 이곳에서 10분 만에 읽을 수 있게 했다.
<展示內容 參考>
천년느티나무
남해군 서면 성명초등학교의 교목으로 사랑받았던 느티나무를 로비에 전시하고 있다.
이번 전시되는 느티나무 괴목은 지난 1990년 태풍에 고사된 것으로 아리랑마을 아천문화관에서 다듬어 보관해왔다
남해상주리 석각(南海尙州里石刻)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하리의 자연암에 새겨진 그림문자로 1974년 경남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동양 최고(最古)의 문자로서 가로 7m, 세로 4m의 평평한 바위 위에 가로 1m, 세로 50㎝ 넓이로 새겨져 있다.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라고도 하는 그림문자로 상주면 양아리에서 금산(錦山) 부소암에 오르는 산중턱 평평한 자연암에 새겨진 특이한 형태의 조각이다.
전설에 의하면 중국 진시황(秦始皇) 때 삼신산(三神山)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시종인 서불(徐市)이 동남동녀(童男童女) 500여명을 거느리고 이곳 금산을 찾아 한동안 수렵 등으로 즐기다가, 떠나면서 자기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이 화상문자(畵像文字)를 새겼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석각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해독을 하지 못하고 있으나, 서불이 자기의 이름을 새겨둔 것이라고도 하며, 혹은 ‘서불기배일출(徐市起拜日出)’이라는 여섯자로 읽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각자가 있는 양하리 계곡에 이와 비슷한 고문자가 새겨진 바위가 또 발견되었고, 그 부근 밭언덕 받침돌에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새모양의 선화(線畫), 양하리 벽련마을 뒷산마루 바위에서도 고문자가 발견된 점으로 보아, 이 석각 또한 선사시대의 각화(刻畫) 내지 화상문자로 볼 수 있다.
예로부터 금산의 마애석각(磨崖石刻)이라고 불러왔으며, 암각은 주로 직선·곡선·점선 등으로 구성되었다. 남해지방 고대문화의 전래 및 형성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나 시황제 때는 이미 한문자(漢文字)가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그 이전의 고문자(古文字)로 추측되기도 한다. 아직 해독되지 않고 있다.
세존도(世尊島)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에 속하는 섬, 세존도는 남해 금산 정상 보리암에서 멀리 아득히 보이는 섬으로 석가모니가 보현. 문수보살을 양 옆에 앉히고 있는 모습으로 누구나 잡힐듯하고, 쉽게 갈것 같지만 풍랑 때문에 쉽게 갈 수 없는 섬이다.
<세존도의 전설>
조선시대에 상주부근의 바닷가 어촌 촌락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다.
장씨는 이웃나라와 보따리 장사를 하며 살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슬하에 아들이 둘이 있고, 후처(後妻)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둘다 본처 소생이고, 후처와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 아들한테는 계모였다. 후처는 성질은 못되기로 소문이 났으며 꼭 팥쥐 엄마나 뺑더어미와 그 성향이 빼 닮았다.
이런 점이 장씨에게 보통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한번 장사를 나가면 수 개월씩을 집을 비워야 하니 이 기간 동안 자식들이 계모한테 구박을 당할 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또한 재처는 남편이 자주 집을 비우니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이미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턱이 없는 장씨가 다시 장사를 떠나게 되었다.
남편이 떠나자 재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이들이 잠자는 틈을 타서 외간 남자와 모의를 했다. 그러든 중 아이들을 업어다 배에 실어 몰래 바다로 떠나보내 버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 아이들이 공포에 떨며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또 울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태운 배는 하염없이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해가 떠 오르자 배는 어느 조그만 한 섬에 닿아 파도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둘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섬이 온통 바위 뿐이었다.
두 아이는 섬으로 올라가 배가 흘러온 곳을 향해 절을 올렸다. 아버지에 대한 작별 인사였다. 그러고는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태어나면 이런 사람이 되겠노라고 원(願)을 세우고 바위에 새겼다.
큰 아이는 쉰 가지 원을 세웠고 막내 아들은 스물다섯 가지 원을 세웠다. 그러고는 자기들을 죽게 만든 계모를 용서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편 장씨는 장사길을 나가기는 했지만 자식들이 걱정 되어 일찍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본니 아들은 안보이고 재처도 도망가고 없었다. 이웃사람들한테서 자초지종을 듣고나니 억척이 무너지는 마음이 들었다. 바로 배를 저어 물결 흐르는 방향으로 나갔다.
몇 날 며칠을 허기를 참아가며 노를 저어 가다가 조그만 섬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자식들이 나란히 죽어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의 시신을 안고 통곡을 했다. 장사 나간 걸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그 아비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바위 벽에는 자식들이 원을 세운 글귀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자식들이 죽어 가면서 세운 눈물겨운 원을 읽고 장씨도 악처를 용서했다. 그러고는 자신도 오백가지 원을 세우고 그 섬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다음 세상에 세 사람이 태어났다. 오백가지 원을 세웠던 아버지는 석가모니로, 쉰 가지 원을 세웠던 큰아이는 보현보살, 스물다섯 가지 원을 세운한 작은아이는 문수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후세사람들은 이 섬을 세존도라 불렀다.
또 다른 전설에는 석가세존이 금산 상봉에서 득도를 한 후 돌로 배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을 지나 세존도의 바위섬을 뚫고 지나갔다고 하는데, 그 때 돌배가 지나간 흔적이 바로 금산의 쌍홍문과 세존도에 난 2 개의 동굴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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