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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남

남해 노도 서포유배지

by phd100 2013. 12. 11.

노도(櫓島)

노도는 남해군에 있는 다섯 개 섬 중 유인도로 있는 하나의 섬이다.

상주면 백련마을 선착장에서 통통배를 빌려 타고 잔잔하고 비단결 같은 푸른바다 '앵강만'을 바라보면서 약 10분정도 물살을 가르면 동백꽃들이 섬 둘레를 감싸고 있는 노도마을 선착장에 도착하여 내리면 서포 김만중의 넋을 기리는 비가 서있다.

 

옛날 이곳에서 배의 노를 많이 생산했다 하여 노도(櫓島)라 부른다. 현재는 16가구에 43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배를 타고 청정해역에 나가 고기를 잡기도 하고, 좁은 땅에 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바다가 넓어 거의 어업으로 삶을 엮어 가고 있다.

1997년 남해문화원에서 서포가 유배생활을 하던 유허와 주변을 정비하고 안내문을 설치했다. 초옥 터와 유허비, 허묘, 우물지, 안내문 등을 구경하면서 서포 김만중의 문학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물고기가 훤히 들여다보이게 물이 맑으며 볼락, 농어, 감성돔이 잘 잡히는 섬이기는 하지만,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서포는 이곳에서 ‘구운몽’ ‘사씨남정기’ 와 ‘서포만필’ 등을 집필했다.

노도는 0.41㎢ 넓이의 작은 섬으로 서포는 1689년부터 3년간 이 섬에서 유배생활을 한 뒤,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 곳에서 자기가 파 놓은 옹달샘의 물을 마시고, 솔잎 피죽을 먹으며 근근이 연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포 김만중 그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萬基)의 아우로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숙부가 된다. 그의 어머니는 인조의 장인인 해남부원군(海南府院君) 윤두수(尹斗壽)의 4대손이다.

 

1637년 2월 10일, 김만중은 병자호란의 와중에 강화, 교동도로 피란 가던 배 위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 김익겸(金益兼)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스스로 화약을 지고 불에 타 산화(散華)하였다. 그 후 대부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관직에 나간 후 말년엔 남해 노도에서 돌아 가셨으니 섬과는 끈질긴 운명이다.

 

김만중은 그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인 1650년(효종 1)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16세인 1652년(효종 3)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 그 뒤 1665년(현종 6)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으나,

1675년(숙종 1)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에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상복문제로 서인이 패배하자 관작을 삭탈당한 후 사면 복권을 반복하다가, 1689년(숙종 15) 집의(執義) 박진규(朴鎭圭), 장령(掌令)이윤수(李允修) 등의 논핵(論刻)을 입어 극변(極邊)에 안치되었다가 곧 남해(南海) 노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기까지 장장 15년을 세상과 싸웠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의 어머니인 윤씨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다(1617년(광해군9) 9월 25일에 태어나 1689년(숙종 15) 12월 22일에 사망)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로 1692년(숙종 18)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98년(숙종 24) 그의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1706년(숙종 32)에는 효행에 대하여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노도에서의 김만중의 시신은 그가 거처하던 초옥 왼편 산언덕에 묻혔다.

부인과 아들을 멀리 두고 외로운 죽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해 5월이 되어서야 아들 김진화가 내려오게 되고 목사공 김진화는 예를 갖추어 다시 염습하고 관을 모시고 북으로 향했다.

증조부 사계 김장생과 큰할아버지 신독재 김집의 묘가 있는 논산시 연산면에 상여를 멈추고 장지를 구했으나 얻지 못하고 서울 동쪽 교외의 전농동에서 다시 상여를 멈추고 경기도 일원의 가까운 산을 찾았지만 또 얻지 못했다.

 

김만중의 유해는 4개월이 넘는 고행 끝에 9월 27일 결국 경기도 광주에 있는 노치고개 정남향 언덕에 하관하고 형 서석공 김만기의 무덤 아래였고, 서포 김만중의 묘는 9년 후인 1711년 다시 경기도 장단부 서쪽 대덕산 아래 동향 언덕으로 옮겨졌다.

 

다시 3년 후 강화유수를 지내던 조카 죽천 김진규가 강화도에서 표석을 만들어 배로 실어다 세우고 도암 이재가 묘표음기(墓表陰記)하고, 영정을 만들어 대전에 있는 가묘에 봉안했다. 지금은 대전 유성구 전민동에 서포 부친 충정공의 묘와 서포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그 때 묘 터가 있던 그 산언덕은 무척 가팔랐는데, 막상 그곳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양편 소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바다 풍경이 그림 같다.

현재 노도의 김만중의 묘 터는 아직도 빈자리로 남아 있다. 이상하게도 40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 그 자리에는 나무 하나 자라지 않고 잡풀만 드문드문 자라나고 있었다. 한이 서려 있는 자리라 나무조차 그곳으로 뿌리내리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구운몽(九雲夢)

유배지에서 어머님이 심심하실까봐 하룻밤 사이에 창작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김만중의 “구운몽”은 한글 소설의 대표작에 속하면서, 유불선 사상을 아우르고 있다. 김만중 선생은 작품을 통해 기본적으로는 유학자의 올바른 자세를 말하고 있지만 '꿈' 속의 이야기는 염정소설적 요소도 갖추고 있다.

 

*** 줄거리의 요약은

1) 당나라 시대 육관도사 불제자 성진이 꿈을 꾼 이야기로 시작 되어 성진이 꿈을 깨어 이야기가 끝을 맺는 것으로 구운몽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진의 꿈 속 이야기이다.

2) 꿈속에서 성진이 육관도사 법회에 참석한 8선녀 미모에 마음이 빼앗겨 불심을 소홀히 하고 유교 공부로 과거시험을 보아 큰 벼슬을 얻어 부귀영화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 버린 육관대사는 이를 괘씸하게 여겨 성진과 8선녀를 죽여 지옥에 보냄.

3) 지옥에서 성진과 8선녀는 다시 인간으로 환생. 성진은 양소유로 환생하여 과거에 합격하고 높은 고위직에 올라 인간으로 환생한 8선녀와 모두 차례로 결혼하고 당나라 황제의 사위(부마)가 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다.

4) 환생하여 결혼한 8선녀와 가무를 즐기던 양소유는 영웅호걸들 무덤을 보고 인생 무상을 깊이 느끼고 모든 걸 다 포기하고 결혼한 8선녀와 함께 다시 불교에 귀의하여 8선녀와 함께 극락세계에 간다는 내용의 꿈을 꾸고 깨어나 성진은 더욱 불도에 정진하여 육관대사 후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 결론적으로 인간은 세상적인 출세로는 영혼이 결코 구원 받을 수 없고 종교를 통해서 만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소설 구운몽은 전하고 있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와 당시 정국(政局)

조선시대 숙종때 17세기 후반에 김만중에 의해서 창작된 고전소설로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키고 희빈장씨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하다가 마침내 남해도(南海島)로 유배. 유배지에서도 흐려진 임금의 마음을 참회시키고자 이 작품을 썼다고 하므로, 1689년(숙종 15)에서 작자가 세상을 뜬 1692년(숙종 18) 사이에 썼을 것으로 본다.

처첩갈등을 다룬 가정소설로써 국문으로 창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며, 권선징악의 수법을 고도로 원용하여서 쓴 폭로, 풍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고대소설의 획기적인 전기를 이룬 작품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그 줄거리는

중국 명(明)나라 때 유현(劉炫)의 아들 연수(延壽)는 15세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된다.

유한림은 그후 숙덕(淑德)과 재학(才學)을 겸비한 사씨(謝氏)와 혼인하였으나, 9년이 지나도록 소생이 없자 교씨(喬氏)를 후실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간악하고 시기심이 많은 교씨는 간계로써 사씨부인을 모함하여 그녀를 폐출시키고 자기가 정실이 된다. 그후 교씨는 간부(姦夫)와 밀통하며 남편인 유한림을 조정에 모함하여 유배 보내게 한 다음 재산을 가지고 간부와 도망치다가 도둑을 만나 재물을 모두 빼앗기고 궁지에 빠진다.

한편 유한림은 혐의가 풀려 배소에서 풀려나와 방황하는 본처 사씨를 찾아 다시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교씨와 간부를 잡아 처형한다.

 

 

소설의 작중인물 중의 사씨부인은 인현왕후를, 유한림은 숙종을, 요첩(妖妾) 교씨는 희빈장씨를 각각 대비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작품은 가정소설이라기 보다는, 인간에 있어서의 덕성을 강조함으로써 민비폐출의 부당성을 풍간하기 위한 풍간소설이다.

 

인물구성을 보면, 사부인은 고매한 부덕의 소유자로 설정해 놓은 반면, 첩은 간교한 여인으로 등장시켜서 악녀를 선녀에 대립시킴으로써 여주인공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다.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 김만중의 수필집으로, 2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중국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학설 중에서 의문시되는 대목을 번역 · 해명하고 신라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는 명시(名詩)들을 비평하였다.

특히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을 평한 문장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국어를 버리고 남의 말을 배우고 있음을 개탄하고, 한문 문장에 비하여 국문 문학의 우수성을 주장하였다.

서포의 숨결이 동백으로 피어나는 남해의 최남단 외로운 노도에서 고향을 그리며 효자 이였던 그 분이 어머니 생신일을 맞이하여 남해 유배지에서 “사친시”(思親詩)를 지어 올린 애절한 시...

今朝浴寫思親語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립다고 글로 쓰려고 하니)

字未成時㴃巳滋 (글자도 되기도 전에 눈물이 이미 흥건하다)

幾度濡毫還復擲 (몇 번이나 붓을 적셨다가 도로 던져 버렸던가)

集中應缺南海詩 (문집에서 남해에서 지은 시는 반드시 빼버려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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