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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남

여수 금오도(金鰲島)

by phd100 2014. 11. 19.

 

금오도(金鰲島)

  전남 여수시 남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26.99㎢, 인구 2,188명(2001)이다. 해안선 길이 64.5㎞이다. 여수만 남서쪽에 있으며, 북쪽에 돌산도, 북서쪽에 개도, 남쪽에 소리도가 있다.

  옹기종기 섬들이 무리 지은 다도해 가운데 형님뻘쯤 되는 어깨 널따란 섬으로 여수에서 뱃길로 한 시간 남짓, 그러나 서울에서는 꼬박 하루를 투자해야 닿을 수 있는 먼 곳. 그 모양새가 자라와 비슷하다 해서 ‘금오도(金鰲島)’라 불린다. 돌산도에서는 빤히 건너다보이는 가까운 거리지만, 바람이 거세어지고 물결이 헝클어지면 머물던 길손은 물론 주민들까지도 발이 묶이고 마는 섬이다.

 육지보다는 섬으로 남길 원하는 여수의 제일 큰 섬의 금오도의 지명유래는 섬의 생김새가 큰 자라와 같이 생겼다 하여 자라 오(鰲) 자를 써 ‘금오도(金鰲島)’라 하였다.

  또한 숲이 우거져 섬이 검게 보인다고 하여 ‘거무섬’이라고도 한다.

1861년 만들어딘 『대동여지도』에는 금오도가 거마도(巨磨島)로 표기되었는데 이 또한 ‘거무섬’을 음차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기암괴석들이 섬 주위에 흩어져 있고, 그 모습들이 천태만상으로 다양해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라 불린다.

최고점은 북쪽에 있는 대부산(382m)이며, 그밖에도 남쪽에 망산(344m), 동쪽의 옥녀봉(261m) 등 산이 많다. 대부분이 암석해안이며, 소규모의 만과 갑이 발달해 비교적 해안선의 드나듦이 심하다.

 

  금오도는 여수에서 돌산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 주변 섬에 비해 넓은 면적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소유하고 있지만, 사람이 들어와 산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봉산(封山)이란 나라에서 나무 벌채를 금한 산을 말하는데, 황장봉산이었던 금오도는 사슴 목장으로 이용되었고, 산에 무성한 아름드리나무는 육지로 실려 나가 목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선 말엽 대원군(1865, 고종 2년)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에는 금오도의 나무를 베어가 궁궐의 건축재로 이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884년 고종 21년 태풍으로 금오도의 소나무들이 쓰러져 버리자 봉산이 해제되었다. 이후 1885년 일반인의 개간을 허가하자 당시 관의 포수였던 박씨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섬에 들어와 두포(초포)에 정착하였고 이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다.

옛날에는 숲이 울창하고 사슴들이 떼지어 살아, 조선 고종 때 명성황후는 이 섬을 사슴목장으로 지정하여 출입 · 벌채를 금하는 봉산으로 삼기도 하였다. 1885년 봉산이 해제되자 당시 관의 포수였던 박씨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섬에 들어가 두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두모리에는 직포 해송림이 있는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옥녀봉에서 선녀들이 달밤에 베를 짜다가 무더위를 식히기 위하여 바닷가로 내려와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목욕을 하다가 승천하지 못하고 소나무로 변하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을 직포라 한 것도 이러한 전설과 관계가 있다.

 

<관광 명소>

 

* 금오도 망산 봉화대

다도해의 남쪽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봉화대가 축조된 것은 고려 시대 말로 당시에 왜구가 많이 출몰해서 이곳에서 봉화를 올리면 고흥의 팔영산을 거쳐 장흥의 천관산으로 이어져 한양까지 전달되어 갔다.

 

* 초분(草墳)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이엉 등으로 덮어 두었다가 2~3년 후 뼈를 골라 땅에 묻는 장례 풍습을 말한다. 남해와 서해의 섬 지역에서 주로 행해지던 장례 풍습으로, 초빈(草殯), 고빈(藁殯), 출빈(出殯), 외빈(外殯)이라고도 한다. 일단 땅 위에 올려놓았다가 2~3년 뒤 뼈를 씻어 다시 땅 속에 묻는 까닭으로 복장제(複葬制), 이중장제(二重葬制)라고도 하며, 현지에서는 빈수[殯所],최빈(초빈), 예빈(외빈)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 송광사 터

옛날 송광사 절터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세운 절터라고 전한다. 보조국사 지눌이 모후산 정상에서 기러기 세 마리를 날려 보내고 기러기가 내려앉은 곳을 찾으니 순천 조계산과 흥양 절이도(고흥 거금도)의 적대봉, 그리고 또 한 곳이 이곳 남면 금오도 용머리의 소나무에 자리를 잡으니 세 곳 모두에 암자를 짓고 송광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 조계산 송광암은 명찰이 되어 송광사가 되었고, 거금도의 송광암도 그대로 남아서 전해지고 있으나 남면의 송광암은 절터만 남아서 옛이야기를 전해준다.

 

* 신선대

 

* 미역널방

미역널방은 주민들이 바다에서 채취한 미역을 이곳까지 지게로 지고 올라와서 미역을 널어 말리던 장소로 해발 90m 의 수직 암벽위에 자리잡고 있다.

미역널방 한 가운데에는 바둑혈이라하여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는 작은 묘자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바둑돌 역할을 하던 돌들이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 수탈피령 전망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