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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북

김천 섬계서원(剡溪書院)

by phd100 2015. 1. 27.

섬계서원(剡溪書院)

 

 

경북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에 있는 서원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선생을 기념하고, 제향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1802년(순조 2년)에 창건하였다. 1868년(고종 5년)에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899년 강당을 새로 세웠다.

서원의 정침(正寢)인 세충사(世忠祠)에는 백촌 김문기 선생과 그의 맏아들 영월군수 여병재(如甁齋) 현석공(玄錫公)을 제사하고, 동별묘(東別廟)에는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 · 절효(節孝) 윤은보(尹殷保) · 남계(南溪) 서질(徐騭)을 배향한다.

 

1959년 향유 이만영(李晩永) · 박원동(朴元東) · 이현돈(李鉉墩) 등이 전국 각지의 유림에 복원을 호소하고 본손인 김연직(金淵直) · 김철규(金哲圭)가 세충사를 세웠지만 동별묘를 세우지 못하자 세충사를 가로막아 위패를 봉안하였다. 1995년 도비를 지원받아 1996년 11월에 동별묘를 세우고 예전과 같이 3현을 봉안하였다.

 

서원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300호로 지정된 ‘금릉 조룡리(金陵釣龍里)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금릉 조룡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42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24.8m, 둘레 12.93m로 섬계서원 안에 있다. 섬계서원은 조선 순조 2년(1802)에 문신 김문기(金文起) 선생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금릉 김씨 집안에서 세운 것이기 때문에, 서원이 세워진 후에 은행나무가 심어졌으리라고 생각된다.

 

금릉 조룡리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김문기(金文起)>

본관은 김녕(金寧).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할아버지는 호조판서를 지낸 순(順)이며, 아버지는 증 영의정 관(觀)이다.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예문관검열·사간원헌납·병조정랑·의정부사인 등을 지냈다.

1445년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 1450년에는 병조참의를 역임했다.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로 있을 때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했다.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에 오른 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1456년(세조 2) 박팽년(朴彭年) ·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과 단종복위를 계획한 뒤 병력동원을 맡았다.

그러나 김질(金礩)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어, 모의에 가담한 사육신, 아들 현석(玄錫)과 함께 처형당했다.

사육신은 그뒤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 秋江集〉에 육신전(六臣傳)이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뒤, 1691년(숙종 17) 복관되었다.

그도 1731년(영조 7)에 복관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정조가 규장각과 홍문관에 명하여 〈어정배식록 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삼중신(三重臣:민신 · 조극관 · 김문기)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금릉군 지례 섬계서원(剡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는 사육신 문제를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고, 그의 가묘를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설치했다. 그러나 종래의 사육신 구성은 변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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