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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남

완도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글씐바위

by phd100 2015. 4. 24.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글씐바위

보길도 동쪽 끝의 백도리 마을 해변 석벽에 글씨쓴바위(글씐바위)가 있다. 글씐바위의 유래는 조선시대 선조 ~ 숙종 때의 대유학자이며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1607 - 1689)이 1689년 (숙종15년 ) 장희빈이 낳은 왕세자 책봉문제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가 숙종의 비위에 거슬려 관직이 삭탈된 뒤 제주도로 귀양을 가다가, 보길도 어느 바위밑에 잠간 머물면서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을 시로 새기어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그때 나이 83세 인데도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이 치솟아 손수 글을 새겼다고 하지만 믿어 볼 수밖에... 주민들은 이 바위를 탄시암(嘆詩巖)이라고 했는데 요즘와서 글씐바위라 한다.

우암은 이곳에 며칠 머물면서도 부용동 세연정에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세연정 주인 윤선도는 송시열보다 20살이나 많지만, 같은 시대에 살면서 남인과 서인으로 당파가 달라 평생 정적(政寂)으로 지내온 사이)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우암은 조사를 받으러 서울로 가던 도중 정읍에서 숙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여든세살 늙은 몸이 만경창파를 해치며 바다를 가는구나...』로 시작된다.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시로 표현하여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이후 우암의 후학인 임관주라는 사람이 1707년 같은 바닷길로 유배를 가다 이곳에 들러 『동국의』라는 오언 절구를 남겨 오늘에 전하고 있다.

글씐바위는 보길도와 소안도 사이 해협으로 소안도가 손에 잡힐 듯이 바다에 떠있으며 주변은 해조류가 풍부하고 해식애가 발달한 천혜의 바다낚시터이다.

 

그가 바위에 남긴 글은

 

八十三歲翁(팔십삼세옹) 83세 늙은 이 몸이

蒼波萬里中(창파만리중)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 있구나

一言胡大罪(일언호대죄) 한마디 말이 어째 무슨 큰 죄가 되 길래

三黜亦云窮(삼출역운궁) 3번이나 쫓겨나니 신세가 궁하구나

北極空瞻日(북극공첨일) 북녘 하늘 님을 바라보며

南溟但信風(남명단신풍) 다만 남녘 바다의 훈풍만 믿을 수밖에

貂裘舊恩在(초구구은재) 담비 털옷 내리신 옛 은혜에

感激泣孤衷(감격읍고충)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우암 송시열의 글 바로 옆에는 정해년(丁亥年, 1707년) 7월 후학 임관주(任觀周)라는 사람이 새긴 한시가 있다.

성품이 강직한 임관주는 1767년 영조대왕에게 서울과 지방관리들의 비리적발 등 10여 가지 비판 상소를 올렸다가 당파에 밀려 제주도 창천리에서 두 달 동안 귀양을 가게 되는데,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이곳에 들려 송시열의 탄시암(嘆詩巖)을 찾았고 송시열을 찬탄하는 자신의 글을 우암 선생의 시 옆에다 남겼다.

이는 우암 송시열에 바위에 글을 남긴지 약 80년 뒤가 된다.

 

東國有尤翁(동국유우옹) 이 나라에 우암 선생이 계시니

題詩白島中(제시백도중) 백도에 시를 남겼네

斯文後古厄(사문후고액) 유도(儒道)는 하늘의 재앙이 따르는데

大老遭時窮(대노조시궁) 선생께서 어려움을 당했구나

留墨春秋筆(유묵춘추필) 춘추필법의 옳은 글을 남겼고

泣貂漢海風(읍초한해풍) 큰 바닷바람에 하사받은 털옷 생각에 눈물지음이여

孤臣無限感(고신무한감) 외로운 신하의 느낌은 한없고

天日照丹衷 (천일조단충) 하늘의 해만이 그 붉은 마음을 비추고 있네

 

丁亥秋七月後學任觀周(정해추칠월후학임관주) 정해년(1707) 7월 후학 임관주가

謫濟州登白島(적제주등백도) 제주도 유배가다가 백도에 올라

見尤庵先生候風時詠(견우암선생후풍시영) 우암선생의 후풍시를 읇고

追亥石面前(추해석면전) 바위면에 다시 이어 새깁니다

感激次亥金兌慶(감격차해김태경) 감격하여 김태경 저자 : 임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