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국 사찰 & 함께 가고 싶은 곳
여행-전남

강진 영랑생가(永郞生家)

by phd100 2015. 6. 11.

 강진 사람들은 자기 고장에서 태어난 시인 영랑 김윤식을 자랑하고 사랑한다. 강진 사람이 아니라도 영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우리 시에 보탠 윤기 나는 서정의 물줄기를 잘 기억할 것이다.

동백나무 몇 그루가 집안으로 쏟아져 내릴 듯 둘러선 그의 생가에는 복원된 초가 안채와 마루 가장자리에 나지막한 난간을 두른 사랑채가 있고 그 사이에 좀 너무 튼튼한 시비가 하나, 그리고 사랑채 앞에 자연석으로 만든 화단과 연못이 있다.

초여름이 되면 그를 상기시키듯 시비 주변과 마당 구석에서 모란도 피어난다.

 

영랑 김윤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대지주 집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에 서울 휘문의숙에 들어갔는데 당시 휘문의숙에는 그의 선배로 홍사용 · 안석주 · 박종화가 있었고 또 후배로는 정지용 · 이태준 등이 있었다.

3학년 때 3·1 운동이 일어나자 영랑은 고향으로 내려와 강진 장날에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에 다니며 용아 박용철 시인과 사귀었다.

1921년에 잠시 귀국했다가 1922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에 들어갔으나 관동대지진이 나자 그만두고 귀국했다.

 

1930년에 박용철 · 정지용 · 이하윤 · 정인보 · 변형윤 등과 『시문학』지를 창간하고 그 지면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등 시를 발표하면서 영랑은 본격적인 시작 활동에 들어갔고 여러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다.

1935년에 『영랑시집』이 나왔다. 그후에도 시편들을 내놓았으나 영랑의 시 세계는 주로 1930년대의 작품들로 대변된다.

 

광복 후에는 강진에서 대한청년회 단장을 맡는 등 우익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에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는 등, 강진의 자연처럼 따사로운 시를 통해서만 그를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의외로 느껴지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48년에 서울로 이사했고 이듬해에는 이승만 정권 밑에서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일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울에 숨어 있었는데 9·28 수복 때 포탄 파편을 맞고 이튿날 돌아갔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북도에 소월이라면 남도에 영랑’이라는 말도 있듯이 영랑은 우리나라 순수시, 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힌다.

193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순수’시의 대표주자였다는 말은 물론 ‘순수’한 찬사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매끄러운 운율과 세련된 시어로써 개척한 시 세계가 독보적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