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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북

정읍 내장사(內藏寺)

by phd100 2017. 4. 24.



(영은사(靈隱寺), 벽련사(碧蓮寺))로 옛 이름을 갖고 있는 내장사. 

  원래 내장사에는 636년(백제 무왕 37) 영은조사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영은사(靈隱寺)와 660년(백제 의자왕 20) 유해선사가 세운 내장사가 있었다.

 

1539년(중종 34)내장산의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나자, 중종은 내장사와 영은사가 도둑의 소굴이라 하여 절을 소각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장사와 영은사는 독립된 2개의 사찰이었다. 1557년(명종 12)희묵(希默)이 영은사의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으나,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다.

 

1923년 학명(鶴鳴)이 절을 벽련암(碧蓮庵)의 위치로 옮겨 짓고 벽련사라 하였으며, 옛 절터에는 영은암을 두었다.

1938년 매곡(梅谷)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채를 신축하였다.

 

1951년 1월 12일 불탄 뒤 중건을 보지 못하다가, 1957년 요사인 해운당을 건립하였고, 1958년 대웅전을 건립하였다.

이 대웅전도 2012.10 전기난로 과열로 또 소실되었다. 언제 복원될지는 모른다.

 

일주문(一柱門)에서 약수터를 지나 북쪽으로 오르면 옛 내장사의 자리인 벽련암지(碧蓮庵址)에 이르게 된다.

단풍나무 길을 오르면 절에 닿게 된다.

 

절 주위에는 빼어난 경치의 명승지가 많으며, 내장산 안에 있는 산성은 임진왜란 때 희묵이 제자 희천(希天)에게 쌓게 한 것이다.

 

<내장사 산삼약수의 전설>

옛날 내장사 가까운 마을에 살던 손씨 부부가 명산대찰을 찾아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다.

 

아들이 자라서 며느리감을 구하던 중 어떤 스님이 천생배필이라면서 추천한 규수는 가난한 집안에 다리까지 저는 불구였다.

 

손씨 부부는 어렵게 얻은 자식을 불구 처녀에게 장가 보내라고 한 스님에게 폭언을 했다.

그로부터 건장하던 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

 

어느 날 아들의 꿈에 부처님이 현몽하여 부모와 인연이 좋지 않으니 불자의 길을 가도록 권하였다.

 

아들은 내장산으로 들어가 공부도 하고 약수도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자리 잡고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약수를 받아 마시며 오직 불경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러기를 3년이 지나자 아들은 건강해졌고 이제 내장산을 떠나 세상에 불법을 전하기로 결심하고 암자 주변을 거닐던 중 깜짝 놀랐다.

 

지금껏 자신이 받아 마시던 약수터에서 가까운 산기슭에 산삼밭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산삼에서 스며나오는 약수를 먹고 살아온 것이었다.

 

이 세상의 인연을 끊고 부처님에게 귀의한 그에게 부처님의 은혜가 내린 것임을 깨닫고 더욱 정진하여 큰스님이 되었다.

 

이 산삼약수터는 지금의 원적암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도둑떼의 소굴(巢窟)과 도덕폭포(道德瀑布)>

백제가 망한 후 내장사지역은 백제유민들의 피난처였다. 그러자 유민들의 재산을 노리는 도둑떼들이 들끌었다.

 

이 도둑떼의 소굴이 도덕폭포와 가까운 바위굴이라 주민들은 아예 "도둑폭포"라 부르며 그곳을 피해 먼 길을 돌아다녔다.

 

어느 날 한 스님이 도술로써 도둑떼들을 제압하고 개과천선시켜, 모든 도둑들을 폭포로 내려가 목욕을 하게 했는데 이때부터 도둑폭포가 도덕(道德)폭포로 바뀌었다고 한다.

 

도승이 도둑떼를 혼내줄 때 나타난 제비와 까치, 사자와 코끼리를 기념하여 내장산에 제비봉(燕子峰), 까치봉, 사자봉, 코끼리봉(象王峰) 등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