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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얘기

進禮面의 역사 요약

by phd100 2017. 11. 10.

◇ 進禮面의 歷史

신석기 시대부터 進禮에는 선인들이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초기 수렵 생활에서 청동기시대(BC2세기 : 예수가 태어나기 200년 전)부터 농경문화가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가락국시대(서기 42년-532년)에는 진례에서 가야 토기 파편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점으로 보아 완전한 촌락을 형성하고 쌀 농사 위주의 생활을 영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예종(睿宗)때의 경상도지리지(1469)에 의하면 부서 진례촌(府西 進禮村)으로 나와 있었다. 가락국 때 수로왕이 셋째왕자(三子 許明)를 진례성주(進禮城主)로 봉했다고 하고, 통일신라말에는 김인광(金仁匡)이 진례성 제군사(諸軍事)가 되어 이곳을 지켰다고 한다. (현, 산월마을 남쪽)

 

임진왜란(1592-1598) 때는 왜병이 처음 김해성을 함락하고 주촌면 천곡리에서 냉정고개로 해서 지금의 시례리 뒷산 고개로 이동 북상한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왜병의 점령하에 있었다.

 

 

(進禮面의 歷史)

1919년 3월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우리 고장에서도 담안리 송세탁(宋世卓), 송세희(宋世禧), 송상진(宋相振) 등이 조선 독립을 위해 줄기차게 항쟁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청천면(菁川面)으로서 청내(晴川)라 속칭하였다. 진례면 열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두 청천(晴川)에 모여 북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열두청내'라고 불렸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왜적의 재침을 방비하기 위에 광해군 8년(1616년) 청천면에 청천소모진(晴川召募鎭)이 세워졌는데, 청천소모진(晴川召募鎭)은 7진관(鎭管)의 병마도호(兵馬都護)가 습열(習閱)하던 곳으로 지금의 예비군 훈련장 같은 곳이 창원으로부터 이곳에 이설되어, 뒤에 웅천현(현 웅동면 청천)으로 옮겨 갔다. (광해군 8년(1616)부터 효종 7년(1656)까지 이곳에 있었음)

 

1894년 갑오경장 때 진례면 5리(청천.시례.송정.초전.신안)와 율리면(栗里)9리(산본.신월.송현.담안.고모.고령.관동.성법.개동)로 나누었다가,

1914년에 중북면(中北面)의 의전리 일부와 죽곡리 일부를 합병하여 진례면(進禮面)이 되었다가, 그후(1942년)진영면이 읍으로 승격하기위해 죽곡리와 의전리가 진영으로 편입되었다. <계속>

 

 

진례면 소재의 地名(山)由來

O 황새봉

진례면 고모리에 있는 상우뒷산으로 높이는 313m이다

옛날 진례 천지가 온통 물에 잠겼을 때 황새 한 마리가 앉을 곳을 찾아 헤매다가 앉은 곳이 황새봉 정상으로 그 후로 산 이름이 황새봉으로 불리운다

 

O 도재산

청천리 뒷산으로 진영읍과 경계에 있으며 높이는 285m 이다

중턱에 있는 함박등은 겨울에도 함박꽃이 핀는 명산이라 하여 함박산이라고도 하고 산이 함지박 처럼 생겼다고 함박산이라고도 한다

 

O 대암산

평지 뒤에 있는 산으로 창원시 대방동과 경계를 이루며 높이는 659m이다

일제 말기에 일본군은 대암산에 항공감시 초소를 설치하여 미공군 공습을 감시하던 곳으로 공습을 감시하던 일본군 병사들이 창원이나 진례로 수시로 놀러가 밤을 지내고 올라가고는 하다가,

어느 날 하루는 여자들 집에 놀러 갔던 날 밤 미 공군기가 진해를 공습하여 초소병들은 모두 전방으로 좌천당한 웃지못할 일화가 있는 곳이다

 

O 비음산

평지뒤애 위치하며 창원시와 경계가 나누어 지는 곳으로 높이는 650m 이다

산 이쪽에서 말을 하면 소리가 날아(飛) 고개넘어 저쪽에서 들렸다하여 날음산이라고도 한다

 

○ 용지봉

산이름은 용의 발자국 전설이 담긴 '용제봉'이 변이된 것으로 추정 된다.

용지봉 정상에는 정상석에 '룡제봉(龍蹄峯)'이라 적혀 있다.

바로 옆 '용제봉 유래'라 적힌 비석에는 용에게 기우제를 지내는 봉우리라 하여 용제봉(龍祭峯),

산아래 진례면 신안리 무송마을의 용소에서 용이 승천하면서 잠깐 쉬었다 간 발자국이 바위에 남아 있다 하여 용제봉(龍蹄峯)이라 불리게 됐다고 적혀 있다.

. 그리고 또 다른 구전으로는 천지가 개벽될 때 용지봉 봉우리에는 용이 앉을 자리만 큼 물에 잠기지 않았다는 전설도 있다.

 

○붙티재고개

송현리 오룡 뒷산으로 해서 주촌으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가 있다.

옛날 천지개벽 대홍수 때 불티 한 개정도 만 보일 정도의 땅이 보였다하여 붙혀진 고개이다. 이런 전설이 있는 불티재 고개 넘어 엔 주촌내삼리가 있고, 넘는 길엔 삼내산성(양동산성 또는 내삼산성)이 있다.

 

 

진례면 관련의 傳說

O 외톨바위

신안마을에서 앞산 용지봉으로 가는 중턱에 있는 집채만 한 큰 바위로 전설에 의하면 선녀들이 형제 정하기 공기돌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선녀들의 손바닥에서 노는 공기 돌은 외톨바위 만큼 큰 돌이었다.

백번만 먼저 올리면 언니가 되는데 한 선녀가 99번째 돌을 올릴 때 옥황상제께서 부르신다고 하므로 당황한 선녀는 100번째의 공기 돌을 마음이 조급해서 실수로 떨어 뜨렸는 데, 그것이 이곳에 떨어져 외톨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O 탑골

고모리 마을 입구에 작은 돌로 쌓은 돌탑이 있는데, 하나는 허물어지고 한 곳에만 남아 있다.

옛날 고모마을에 어떤 사내아이가 출생할 때 산모의 배를 뚫고 출생하니 산모는 죽고 사내아이는 수일 만에 장대한 큰아이로 자라 마을을 떠나고, 마을사람들은 산모의 비참한 죽음과 아이가 역적이라도 되면 마을에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지나가는 도사에게 이 사정을 애도하니 마을 입구 이곳에 자그마한 돌탑을 쌓으면 좋을 것이라 하여 돌탑을 세웠는데, 그후로는 그러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O 탁발승의 수난

송정리 송정마을은 청주송씨의 집성촌인데, 청주송씨에게 앙심을 품은 명월사(녹산 明月寺)의 중이 송정의 송씨를 망(亡)하게 할 생각으로 해박한 풍수설로 마을 어른들을 설득하기를,

앞산 백학권익형(白鶴卷翼形)의 명당에 쓰인 산소를 아래 쪽으로 옮기고 학의 머리에 해당되는 조그마한 앞산 둑뫼의 양쪽에 못을 파면 마을이 흥해진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이후로 송정이 크게 쇠퇴하였으므로 뒤늦게 중에게 속은 줄 알고, 탁발승이 마을에 올 때를 기다렸다가, 코를 끼여 나무에 달아 메는 고초를 주었으며, 일제시대 까지 탁발승이 오기만하면 수난을 당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못이 메꾸어 졌다.)

 

 

진례면 관련의 忠臣과 孝子

O 송담서원에 향사된 忠臣 송빈(宋賓)

청주인으로 임진왜란 때 백의 창의하여 성의 함락과 동시 순절하여 송담서원에 향사 되었음.

 

O 孝子 반석철(潘碩澈)

기성인(기성반씨. 기성은 거제의 옛이름. 거제반씨라고도 함)으로 세조 때 승의랑 장흥고 주부를 지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6년 시묘에 저녁마다 호랑이가 곁에 지켰으며, 효자에 얽힌 많은 전설이 지금도 전해 오며 성종 원년(1470년)에 정려와 복호의 은전이 내려 정려는 현재 지방도변에서 훼철되어 2002.3.23일 시례리 하촌마을 입구에 이건하였음.

 

O 烈女 조처녀

효자 반석철의 외손으로 창녕인 조문한의 딸이며,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길쌈을 짜, 고기와 술을 사서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으며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허벅지의 살을 베어 약과 함께 달여 드려 어머니가 소생케 하는 등 지극한 효성으로 정묘년에 정려 되었음.

정려각(旌閭閣.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은 반석철 효자 곁에 있음. 그 외 김두암 등이 있다. <계속>

 

 

진례면의 遺蹟

O 진례성(進禮城)

비음령의 북쪽 진례 평지와 창원 토월동에 걸쳐 계곡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토성으로 가락국의 초기에 축성된 옛성으로 현재 동서간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성곽관리는 진례성이면서 진례면에서 관리하지 못하고 창원시에서 관리한다.

 

O 토성(土城)

가락국의 수로왕이 셋째왕자를 진례성주로 봉하고 왕궁을 지었는데,

지금의 송정리 산월마을 일부와 신안리 신안마을의 일부인 토성마을 일대를 흙으로 성을 쌓았다고 하여 지금도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O 첨성대(瞻星臺)

가락국 수로왕이 토성마을 위 첨성산의 상봉에 천문을 보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하여 지금도 별을 보는 곳으로 비비당이라 부르며,

토석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음. 현재 경주 첨성대 보다 약 600년 앞서 축조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O 송담서원지(松潭書院址)

임진왜란 충신인 송빈, 이대형, 김득기 세분을 향사하기 위하여 신안마을의 무송에 숙종42년(1716년)에 송담서원을 창건하고, 순조원년(1801년)에 훼철 되었다가 24년(1824년)에 복설되고 고종5년(1868년)국금으로 훼철되어 빈터만 남아 있다가 근래에 일부 復設되었다.

 

O 삼충대(三忠臺)

고종5년에 송담서원이 훼철되자 건양원년(1896년)에 후손들이 송담서원 삼충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경치 좋은 신안 세심포의 암벽 바위 위에 단비를 세웠다.

( 1784년(정조 8) 경상도 유림(儒林)의 표충사 재건 상소로 김해 진례면 신안리 무송마을에 복설되어 이대형(李大亨), 김득기(金得器)를 더하여 삼충(三忠)이라 하여 향사하고 사호(祠號)를 송담사(松潭祠)라 하였다. 송담은 송빈선생의 호(號)에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송담(松潭)'은 진례면 신안리 무송(茂松)마을의 용담(龍潭, 이칭별칭 ; 용지:龍池, 용소:龍沼)에서 비롯된 것으로 삼충신과 관련된 태생지이다.)

 

 

마을별 由來

◇청천리(晴川里)

O 관곡(冠谷)

옛날 진례 동쪽을 율리면 서쪽을 청내면이라 불렸는데 지금의 진례면 청천리라는 말로 일정 때 바뀌었고, 오늘날 청천리 안에 관곡 다곡 곤법이 있다. 청천(晴川)은 맑은 내를 말한다. 관곡은 오래전부터 다곡에 속해 있다가 1982년 남해고속도로가 동네를 갈라놓아 다곡에서 관곡으로 법정동으로 분동되었고 조그만 시내를 사이에 두고 진영읍 의전리와 접경하고 있다.

 

O 다곡(茶谷)

옛날 가락국 때 텃골에 태씨가 터를 잡아 살다가 큰불로 동리가 불에 타서 태씨(太氏)는 텃골을 떠나고 임진왜란 때 김해 사충신의 한 분인 류식공의 아드님인 수홍공이 대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고부터 다곡은 류씨의 집성촌으로 사백여 년을 이어온다.

 

O 상곤법(上昆法)

곤법이라는 마을 이름 전에 화법(花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마을의 형상이 마치 꽃봉오리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곤법의 명칭은 인륜과 예의 법도를 으뜸으로 숭상한다 하여 곤법이라고 부서 고법야촌(경상도지리지에서 나옴)에서 개칭된 것 같다. 지형상 윗마을을 상곤법이라 한다. 1951년 상 하곤법으로 나누어졌다.

 

O 하곤법(下昆法)

마을 명칭을 화법이라 한 것은 산등성이가 꽃의 형상과 같다고 화법이라 명칭 한 것 같으며, 먼저 입촌한 성씨는 파평윤씨, 능성구씨, 경주최씨가 살았다고 전하나 지금은 살고 있지 않으며 광주안씨, 청도김씨, 창녕성씨 순으로 여러 성씨가 있다.

새터의 광주안씨 족보에 1592년(임진왜란 때)에 선조가 거주한 것으로 보아 400여 년이나 된다.

 

 

◇시례리(詩禮里)

O 상촌(上村)

마을뒤 주봉인 시루봉 때문에 시루골이 되고 시례골로 바뀐 듯 하다. 목면봉의 내맥이 주용으로 비파등 정자등이 청용등이 되고 등대와 원등이 내외 백호등으로 마을을 좌우로 감싸 유수한적하고 물은 맑고 당은 비옥한 마을이다.

마을이 이룩되기는 조선인조때 근제처사 안경지가 이곳에 처음 자리 잡은 지 사백여 년 광주안씨의 집성촌으로 그간 유행(儒行)과 문한(文翰)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도문화재 염수당과 고문서가 동네 한 가운데 있다.

 

O 하촌(下村)

임진왜란 전에 광산 김씨가 살았다고 전해오며 시례리의 마을 이름은 논어의 홍어시입어예에서 나온 동명이라고도 하고 마을 뒤 주봉인 시루봉 때문에 시루골이 되고 시례골로 바뀐 듯하다.

 

O 신기(新基)

노현에서 뻗어 내린 내맥이 마을의 주용으로 마을위에서 좌우로 갈라져 청용등과 백호등이 되어 좌우에서 마을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고 300여년 전에 입향조(入鄕祖)인 노강 박뢰의 조고인 지산 박령의 후손인 밀양 박씨의 집성촌이다.

 

 

◇송정리(松亭里)

O 송정(松亭)

임진왜란전에 한골에 곽씨가 마을을 이루어 살았는데 꽤많이 살았고 행세도 한 것으로 마을 이름이 대동마을이었고 뒷산도 대동산으로 불렀으나 모두 떠나고 벽송정이라 불리어 오다 송정으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 한다. 소나무가 많다는 뜻으로 송정이라고 한다함(전해들은 내용 추가)

가야시대의 유물과 고분군이 있었으나 도굴되고 그 흔적과 우물들의 파편만 널려 있다.

김해 임란 충신의 한분인 송빈(宋賓) 공의 차자인 사천공이 처음으로 송정에 터를 잡아온지 어언400여년, 지금은 청주송씨의 집성촌이다. 송씨가 득세할 때는 망골과 한골은 송씨의 노비들이 살던 마을로 100여세대가 되었으나 송정이 쇠하기 시작하자 노비촌이 망하기 시작한 곳이 망골, 노비촌의 한가운데 마을이라고 한골이라 불렀는데 지금 대원사가 있는 일대의 골이다.

 

O 청곡(淸谷)

청곡에는 조선 중엽부터 옹기굴이 생기면서 점차 번성하여 경남에서는 알아주는 옹기점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전부터 마을이 이룩돼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 초에 면사무소가 초전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오면서 파출소도 함께 옮겨 오고 해방 후에 5일장, 우체국, 농협, 보건지소, 소방파출소 등이 생기면서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아파트도 생기고 하여 1996년 1구와 2구로 법정 분동되었다. ‘점에’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옹기를 셀 때 한점두점에서 나왔다고 한다.

점터(옹기를 굽는 가마가 있던 곳)가 위치한 뒷산은 분청도예촌이 조성 중이며 2003년 가을에는 청곡 일원에서 제8회 김해도자기 축제가 개최되어 30여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등 성대히 거행되었다.

 

O 상둔덕(上屯德)

시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약 300여 년 전 경북 달성군 논공면에서 김해김씨 김창택의 3형제분이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고 그 후로 다른 성씨들이 이주해 와 살고부터 마을이 이룩되었다고 전해온다.

 

O 하둔덕(下屯德)

지금부터 약 300여 년 전에 청주송씨, 김해김씨, 남양흥씨, 전주이씨 등의 성씨들이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1948년 둔덕마을이 상둔덕과 하둔덕으로 법정 분동되었고 마을 앞에 마을을 상징하는 희양나무가 3그루 있었는데 수령은 약 200여 년으로 명절에는 동민들이 그네를 뛰는 등 민속놀이를 즐기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2그루만 남아있다.

 

O 산월(山越)

옛 문헌에 충훈리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이룩되기는 오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마을 앞 충훈천변의 충훈사지는 고려시대의 사찰로 부지가 수천 평으로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발굴조사단이 내려와 금동불상 1좌와 기타 많은 유물을 발굴한 것으로 전해 온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점된 후 일본인들이 송정리 716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많은 뽕나무를 심어 집단거주하면서 농막, 산넘어(山越) 춘비골 등으로 불리어 경남도에서도 양잠으로 알려진 마을이 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산월부락으로 불리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초전리(棗田里)

O 초전(棗田)

초전이란 이름은 옛날 대추나무(棗:대추나무 조)가 많은 곳에 임 김 박 최 송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전해 오며, 조선조 때는 자여도의 역으로 초전리 750번지 일대 아름드리 숲들은 역마를 매던 곳이라 한다. 일제 초에는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초전리 830번지(지금의 초전마을 회관)에 있다가 1920년경 송정리로 이전되었다. 1954년에 마을이 현등, 본부락, 월촌으로 분동되었다가 1955년에 다시 초전을 합동되었다.

 

O 돈담(敦談)

돈담부락은 진례면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마을의 지대가 조금 높아서 돋은 마을(돈담)이라고 불렸다고 전해온다. 돈담과 진례등 2개 마을로 구성되고 진례각단은 진례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6.25사변 때는 진례초등학교와 근처의 유휴지가 함안등지에서 피난 나온 피난민의 집단 수용처가 되었고 인구의 증가와 경제발전 등의 여파로 지금은 백조, 동원, 송정아파트와 현오빌라등과 상가 학원 등이 입주하면서 진례면 내에서는 제일 큰 마을이다.

 

 

◇신안리(新安里)

O 신안(新安)

신안마을은 가락국의 수로왕이 왕자 한사람을 진례군(君)으로 봉하고 평지와 창원 사파정사이의 비음령에 진례성을 쌓고 토성에 태자궁을 짓고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갑오경장 후에 초전리에서 분동되고 마을은 해주 오씨와 남양 홍씨가 먼저 입촌하였으나 모두 떠나고 김해김씨, 밀양박씨, 경주최씨, 청송심씨가 입촌하여 여러 성씨가 집단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O 평지(坪地)

비음산 정상에는 가락국 때 조성된 진례산성이 있으며, 옛날에는 동래에서 마산, 진주로 통하는 길목으로 마을 입구에 주막집이 있었고, 남산재 5부능선에는 산막이라는 주막집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마을의 성촌은 최씨, 서씨에 이어 함안조씨가 약 300년 전부터 마을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월리(新月里)

O 신월(新月)

관모산 진등의 서쪽 산기슭에 마을을 이루고 살다 지금의 신월마을로 옮겨 살았는데 어느 시대인지 전해지는 기록이 없다. 마을앞의 얕으막한 언덕바지가 초생달처럼 생겼다고 新月(새달)이라 불렀고, 마을이 배설 또는 행주형이라 전해온다.

 

O 중리(中里)

1850년경 점터마을(초전리 1,100번지 주변)에는 송씨, 박씨, 김씨, 양씨, 편씨, 주씨 등이 살다가 대홍수로 마을이 유실되자 송씨는 담안으로, 양씨 주씨 편씨는 새동편(학성)으로 옮겨가고, 박씨 김씨는 신월리 170~200번지 일대의 지금 중리에 옮겨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온다. 신당(신월)과 점터마을의 중간지점이라고 중리로 불리었다고 하며 그동안 신월부락에 속해 있다가 1979년 신월에서 중리마을로 법정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O 화전(花田)

이조 초에 관에서 모래동 일대에 장(場:시장)을 세울 때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월에 속해있다가 1974년 지방도를 경계로 도로 위 마을은 화전으로 법정이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산본리(山本里)

O 산본(山本)

김해의 진산인 용제봉이 배경으로 산아래 이룩된 마을로 ‘용제봉이 산의 근본이다.’ 하여 산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마을이 이룩된 시기는 전해오는 기록이 없다.

 

O 용전(龍田)

마을의 옛 이름은 생법으로 자여도에 속한 역으로 자여도는 고려 때부터 있었으니 마을은 역의 설치와 함께 이룩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 입촌한 성씨는 남원양씨, 나주임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등이다.

 

O 관동(官洞)

관에서 마을 아래쪽에 장(場:시장)을 세운 뒤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이씨조선 중엽 이후에 생긴 마을이다.

 

 

◇송현리(松峴里)

O 강변(江邊)

약 100여 년 전에 청주송씨 김해김씨 분성배씨 3성이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아랫오룡이라 불렀다가 1920년경부터 강변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때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하천부지를 이용하여 묘목장으로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1970년 중반에 농경지가 정리되어 논농사 짓는데 적합한 농지를 변하고, 1980년부터 산업화의 물결 속에 크고 작은 공장이 40여 개나 부락 내에 설립되고 거주민도 130여 세대에 이른다.

 

O 학성(鶴城)

학성마을은 면 소재지에서 동으로 2킬로미터 지점에 있으며, 동편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새동편이라 부르기도 하다가 냉정고개 당산나무에서 진등산의 끝자락까지 마치 학처럼 생겼다고 학성이라 불렀다.

 

솥골은 예전에 솥을 만들었으므로 솥골이라 부른다. 300여 년 전에 김녕김씨와 신안주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이룬 뒤로 여러 성씨가 옮겨와 마을이 이룩된 것으로 전해온다.

 

O 당리(塘里)

약 400여 년 전에 청주송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이룬 뒤 여러 성씨가 옮겨와 마을이 이룩되었다. 마을 앞에 못이 있어 당지(塘池)라 하였다가 갑오경장 후에 당리마을로 개명하였다.

 

O 오룡(五龍)

마을은 약 400여 년 전 청주송씨가 이주해 살면서부터 마을이 이룩되었으며 마을 이름은 안산이 용의 몸체처럼 길게 뻗었고 송씨의 아들 오형제가 훌륭하게 성장하여 잘 자랐으므로 아들 다섯과 앞산의 용을 따서 오룡이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그 후로 동래정씨 형제가 이주해 왔고. 김해김씨등 여러 성씨가 옮겨와 마을이 이룩되었다고 한다.

 

 

◇담안리(淡安里)

O 담안(淡安)

담안마을은 약 600여 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어 초기에는 김녕김씨가 백사등 아래 뱀산을 중심으로 100여 년간 마을을 이루어 살았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가고, 약 400여 년 전에 청주송씨가 옮겨와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한때는 송씨가 100여 호 살았으나 지금은 50여 호이고 타성도 20여 호나 되고 구씨 등의 집성촌인 서재곡은 1992년 법정 분동 되었다.

10여 년 전부터 많은 공장이 입주하면서 환경도 심하게 오염되고 순박하던 인심도 각박해지고 있다.

 

O 서재곡(書齎谷)

옛날 글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어 마을 이름이 서재곡으로 그때부터 마을이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되나 전해오는 기록이 없고, 창원구씨가 입촌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는데 근 300여 년이 된다. 담안마을에 속해 있다가 1992년 법정분동 되었다.

 

O 상평(上坪)

마을에 고인돌이 2기 있는 것으로 보아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나 전하는 기록이 없고, 선조 40년 정미년(1607년)에 김해부사로 부임하여 무신한 이경호의 후손이 경북 영천에서 상평으로 이주하여 평리(坪里)라 불렀으니 지금부터 약 400여 년 전으로 추축된다. 처음에는 평리, 들말(들 가운데 생긴 마을, 지금의 상하평 옛 이름) 등으로 불리다 근자에 와서 상평으로 부르게 되었다.

 

O 하평(下坪)

약 300여년전 현풍곽씨 진양강씨 순흥안씨가 입주하여 살고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1956년 마을에 대진국민학교가 개교되어 47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곽주동 효자의 뒤를 이어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효자마을이다.

 

O 개동(蓋洞)

개동마을은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마을이 이룩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300여 년 전 경주이씨가 입주하여 살고부터 김해김씨등 많은 씨족들이 옮겨와 마을을 이루었다. 100여년 전까지는 운곡(雲谷)이라 불렀는데 구름골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좋지 않다고 개동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황새봉 능선에 일본인이 거인이 출생한다고 쇠말뚝을 박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고모리(古慕里)

O 고모(古慕)

진례면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고모는 처음에는 고모실이라 하였는데 마치 송아지가 어미소를 그리워하여 되돌아보는 형상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경주이씨 달성서씨들이 입촌하고 김해김씨 전주이씨 밀양박씨등이 옮겨와 마을을 이룬지 수백 년에 이른다.

고모와 신모 고령(일명 높은재)의 자연부락으로 마을의 북쪽 군도(郡道)의 길가에는 김해에서 가장 오래된 완산이씨의 열녀 정려가 있다.

높은재는 진례 주촌 한림면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사방이 산으로 둘려싸인 작은 분지로 마치 진례면 전체의 축소판이라고도 부른다. (전해들은 내용 추가)

 

O 상우(上佑)

전해오는 이야기에 신라시대부터 터실이란 곳에 마을이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고 전하고 지금도 터실에서는 불상이나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다.

현재의 상우마을은 이씨 진씨 조씨 서씨들이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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