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사는 직지사의 말사로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440년(눌지왕 24)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고 있음을 보고 절을 지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도리사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최초의 절이라 하며 원래의 절터는 태조산(太祖山) 기슭에 있는 옛 절터로 추정된다. 창건 이후 조선 중반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으며 1677년(숙종 3)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탔다. 1729년(영조5)에 대인(大仁)이 아미타불상을 개금하여 인근의 금당암(金堂庵)으로 옮겨 봉안하고 도리사로 개칭하였다.
경내 본건물의 중수(重修)·단청(丹靑)에 관계된 현판을 보면 「강우선산부동태조산도리사금당암중수기(江右善山府東太祖山桃李寺金堂庵重修記)」 말미(末尾)에 ‘가경십이년무진팔월일(嘉慶十二年戊辰八月日)’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1807년(순조 7)에 해당된다. 1823년(순조 23) 조사전(祖師殿)을 중수했다. 1876년(고종13) 극락전을 중건하고 1922년 칠성각을 건립했다.
「선산도리사법당중수기(善山桃李寺法堂重修記)」에는 ‘대청광서이년병자(大淸光緖二年丙子)’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1876년(고종 13)이다. 「도리사중창기(桃李寺重創記)」에는 ‘불기이구오구년신미양월하완(佛紀二九五九年辛未陽月下浣)’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1930년에 해당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약 70년 간격으로 중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에는 태조선원(太祖禪院) · 삼성각 · 조사전 · 요사채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조사전 좌측 높은 곳에는 1977년 해체 복원한 사리탑과 적멸보궁이 배치되어 있다.
<극락전>
극락전은 현재 도리사의 본당의 기능을 하고 있으나 원래는 도리사의 부속암자인 금당암의 법당이며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법당 내에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으며 법당의 판벽에 그려진 벽화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화강석 가구식 기단 위에 넓고 큰 막돌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워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했다. 벽체를 모두 판벽으로 구성하고 바깥 벽면에는 벽화를 그렸다.
간살이 넓은 어칸에는 4분합 굽널띠살문을 달고 간살이 좁은 양 퇴칸에는 같은 모습의 2분합 굽널띠살문을 달았다. 좌측면 건물 앞쪽 칸에는 외짝문을, 배면에는 어칸에 두짝문을 설치했는데 이 문들 역시 정면의 것과 동일한 형식이다.
공포는 다포계형식으로 어칸에는 간포(間包)를 둘, 퇴칸에는 하나를 놓고 외부는 3출목, 내부는 4출목으로 꾸몄다. 외부 살미는 휘어 오른 3개의 앙서[仰舌]와 1개의 수서[(垂舌]로 이루어져 있다.
앙서 윗면에는 연화 및 연봉각으로 장식하고 간포의 수서 위에는 출목도리와 장혀에 끼운 봉두를 얹어 놓았다. 내부 운궁 밑면에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연화 1개와 연봉 4개가 차례로 장식되어 있다. 겹처마 팔작으로 구성된 지붕부는 용마루 양단을 치미로 장식하고 네 귀의 추녀를 활주로 받쳐 놓았다.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중앙 뒷부분에는 내진주를 세우고 후불벽을 설치했다. 후불벽 앞에 불단을 앉히고 불벽에는 큰 탱화를 걸고 그 위쪽에는 닫집을 시설하였다. 상부 대량 위에는 용두로 조각된 양쪽 측면보의 머리가 걸쳐 있고 그 상부 천장은 우물반자로 꾸며져 있다. 건물 외부는 금단청이고 내부는 모로단청이다.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극락전 뒷편 공간에는 도리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이 서 있다.
이 사리탑은 원래는 삼성각 북쪽 담장 밖에 있었는데, 1977년 칠성각 옆으로 이건하였다.
이때 새로 기단석과 난간을 만들고 앞면 좌우에 석등(石燈)을 세웠다.
이 세존사리탑은 석종형(石鐘型) 의 부도(浮屠)로서 전체 높이는 1.62m, 탑신의 높이는 1.02m, 지대석의 폭은 1.3m 입니다. 이 탑을 이건할 때 탑신 밑에서 '금동육각사리함'과 사리 1개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때 출토된 사리는 새로 적멸보궁과 사리탑을 지어 안치하였고, 금동육각사리함은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직지사 성보박불관에 위탁 보관중이다.
절의 동북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3칸 측면1칸의 7평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안에는 삼성 즉, 즉 칠성,독성,산신의 탱화를 걸어놓고 있다.
설선당 뒷편의 가파른 계단 길 위로 높다랗게 올라 앉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정면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건물로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고 있다.
1977년, 절의 동쪽에 있던 석종형 부도(浮屠)인 세존사리탑을 경내로 이건하던 중 금동육각사리함(국보제208호)과 함께 수정처럼 맑은 사리 1과가 발견되었는데,
이에 당시의 주지인 법등화상(法燈和尙)은 이 사리를 영구히 안치하기 위해 적멸보궁을 창건하고 사리탑을 세웠다.
- 적멸보궁 아래에 있는 해인도는 화염경을 210자로 축약하여 거대한 화강석판에 새겼다.
- 그 옆 팔정법도(八正法圖)는 거대한 화강석판에 바퀴(輪)을 새기고, 바퀴의 축 사이에 정정(正定),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등 인간이 지니고 살아야 할 여덟 가지의 바른 생활 자세를 새겨놓고, 그 아래에 해설을 붙였다.
적멸보궁 옆 언덕에는 범종각이 있는데, 그 앞에 화강암으로 깎은 '신라의 미소'를 상징하는 커다란 '인면문원와당'이 비석 형태로 서 있다.
적멸보궁에서 극락전 쪽으로 가는 길에는 아도화상의 청동좌상이 있다.
- 극락전 맞은 편에 절 밖으로 나가는 작은 돌문이 있는데, 그 돌문을 통과하여 아래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한참 내려가면 아도화상이 참선했다는 '좌선대'(座禪臺)가 나타난다.
네 개의 자연석 위에다 방석처럼 다듬은 큰 바위를 얹은 자리이다.
수 많은 날들을 이곳에 올라앉았던 아도화상은 무엇을 빌고 또 빌었을까...
좌선대 뒷편으로는 아도화상 사적비(阿道和尙 事蹟碑) 와 함께 도리사에 시주한 사람들과 논, 밭의 면적을 기록해 놓은 불량답시주질비(桃李寺佛糧畓施主秩碑)가 있다. 조선 효종 때에 세워진 이 사적비에는 아도의 일생과 불교를 전파한 내용, 도리사를 지은 과정, 뒷면에는 자운비(慈雲碑)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 도리사의 가장 서쪽 끝에는 산으로 올라가는 아담한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길을 100여m 따라 올라가면 바위 언덕 위에 유리로 둘러막은 작은 정자가 나타난다.
이 정자의 이름은 서대(西臺)인데, 옛날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이곳에 올라서서 '손가락을 뻗어 곧게 가리킨'(直指) 곳에 '직지사'의 터를 잡았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서대 옆에 올라 서서보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멀리 낙동강 줄기와 금오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석양이 참 아름답다. 여기서 낙양의 동쪽 낙동강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렇다면 낙동강의 첫 글자인 ‘낙(洛)’은 오늘날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경상북도 지명 유래집에는 ‘상주의 옛 이름은 낙양(洛陽)이고, 낙양의 동쪽은 낙동, 서쪽은 낙서, 남쪽은 낙평, 북쪽은 낙원(처음엔 나원으로 불리다가 오늘날 낙상면이 됨)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낙양’이라는 곳이 ‘낙’의 근원이라는 것인 것이다. 낙양은 상주시가지의 서쪽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는 ‘사직단터’라는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사직단터는 조선 선조 10년(1577년)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 지신(땅의 신)과 곡신(곡식의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자리다.
학자들은 낙양에 있는 이 비석이 바로 ‘낙’의 뿌리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고 말한다. 낙양이 바로 낙동강이란 이름의 고향이라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창건 얘기>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에 있는 신라불교의 초전지, 도리사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도리사의 창건 얘기로는 1987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출간한 『한국구비문학대계』와 2000년 구미문화원에서 출간한 『구미시지』에 수록되어 있다.
문헌이나 현지 채록본에 따라 조금씩 편차를 보이는데, 그 가운데 아도화상이 모례의 시주를 받아 도리사를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흔하다. 그러면서 모례에 대한 시각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아도는 고구려의 승려로, 일명 묵호자 · 아도 · 아두라고도 한다. 아도는 신라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기 100여 년 전의 인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아도는 눌지왕 때 고구려에서 신라로 건너가 불법을 전하였다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도는 5살에 출가하여 19살에 어머니 고도령의 명을 받들어 263년(미추왕2) 신라 왕가에 불교를 전파하려다 실패하였다.
이후 모례의 집에 숨어 있다가 미추왕의 딸 성국공주의 병을 고친 공으로 불교 전파의 허가를 받고 홍륜사를 지었다.
미추왕이 죽은 후 아도는 다시 모례의 집에 굴을 파고 들어앉아 수도하다가 죽었다.
신라 눌지왕 때 아도화상은 모례장자의 집에 굴을 파고 숨어 살았다. 은신하던 중 아도화상은 모례장자의 집 옆에 절을 지어 부처를 모시고 경전을 강론하였는데 눈 속에서 복숭아꽃과 자두꽃이 활짝 피어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아도화상은 절 이름을 도리사라 지었다고 한다.
한편 경북 구미 지역에서 채록된 또 다른 설화로 아도화상이 포교를 위해 신라에 갔으나 들어가지 못하여 근방에 도리사를 짓고 공부하며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리사 유래의 주요 모티브는 ‘아도화상의 강론’과 ‘부처의 법력’이다. 아도화상이 피신 중 모례장자의 집 옆에 절을 창건하였다는 사찰창건 얘기이자, 아도화상이 경전을 강론하던 중 복숭아꽃과 자두꽃이 활짝 피어나 절 이름을 도리사라 지었다는 사찰유래 얘기이다.
「도리사 유래」는 아도화상과 부처의 영험한 법력과 더불어 불교가 신라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겪은 진통을 보여 준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전승 의식이 깔려 있다.
<도리사 석탑(桃李寺石塔)>
화엄석탑(華嚴石塔)이라 부르는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같은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되었다.
석탑은 극락전 앞뜰에 세워져 있으며, 일반 석탑과는 형태를 달리하는 특이한 모습이다. 석탑 주변을 수목이 둘러쌓고 있어 자연 통풍과 건조가 원만하지 못하고 습하기 때문에 초본류 및 지의류가 석탑 전체를 뒤덮고 있었으며, 각층 상부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2004년 지의류 제거 작업을 하여 보수 · 복원해 놓았다.
지대석은 10장의 장대석으로 결구(結構)되었는데, 상면에 각형일단(角形一段)의 받침을 각출하여 기단부를 받치고 있다.
기단부 네 모퉁이에 방주(方柱)를 세우고 그 사이 각 면에 장방형의 판석을 세워 병풍처럼 둘러쌓았고, 동면·서면· 남면은 6장이고 북면은 7장이며, 남면 중앙부에는 종형으로 장방형의 두 문우(門隅)가 음각되어 있다.
기단 갑석도 네 모퉁이에 장대한 판석을 놓고 그 사이에 수매(數枚)의 돌로 결구했는데 각 면이 다같이 3장씩이다. 갑석 윗면에는 별다른 구조가 없고, 평면 위에 탑신이 놓였는데, 각층이 10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은 삼층으로 초층은 각 면이 장방형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동면은 15매석이고 남면은 13매석이다.
탑신 위의 옥개는 일반형 석탑의 옥개석 형태와는 달리 지붕형의 옥개가 아니어서 받침이 각출되지 않았고, 그 위에 낙수면도 없으며, 모전 석탑에서 볼 수 있듯이 윗면에 여러 개의 층단이 마련되어 있다. 각 층단은 기단부 갑석과 같이 네 귀에 장대석을 배치하고 그 사이를 몇 장의 장방형 석재로 결구하였고, 그 위에 2층의 층단을 놓았는데 그 층단은 상하층 동쪽 면이 4매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남면은 하층이 5매석, 상층은 4매석이다.
2층 옥신은 각 면마다 2층으로 장방형 석재를 중첩하여 조립하였는데, 동면은 7매석이고 남면은 8매석이다. 남면에는 중앙에 문비형을 모각한 판석을 세로로 끼우고 그 위의 옥개 갑석은 네 귀에 장대석을 배치하고 각 면마다 그 사이를 장방형 석재로 메웠는데, 동면은 2매석이고 남면은 3매의 작은 석재로 구성되었다.
그 위의 층단 받침은 3단이다. 3층 옥신과 옥개는 각각 한 돌로 조성되었고 밑에 각형 1단의 받침이 있다. 낙수면에는 2단으로 굄을 만들어 그 위에 상륜부를 받치고 있는데 1,2층의 그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정상에는 원형의 앙화와 보주가 놓였다. 앙화석에는 단엽의 앙련이 조각되었는데, 각 연봉의 줄기가 양쪽으로 꽃가지를 뻗치면서 아래까지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연봉과 연봉 사이에는 화판(花瓣)에 연화(蓮花)장식이 양각되어 있다.
석탑의 대강의 개요는 탑은 5개의 층단을 이루고 있는데, 맨 아래층은 기단일 것이고, 위의 두 층은 신부이겠지만, 맨 위의 두 층은 포개진 노반(露盤)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맨 위 한 층만 노반으로 보고 신부를 세 층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한편 구미 도리사 석탑의 옥개석 윗부분 층단과 신부의 구성 형식으로 보아 모전 석탑처럼 보이기도 한다.
구조상 옥개 낙수면이 층단을 이루고 있는 점이라든지 각 층마다 작은 석재를 중첩 결구하여 탑신부를 형성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오히려 모전 석탑의 계열에 가깝다.
이 탑을 현지에서는 ‘화엄석탑(華嚴石塔)’이라 일컫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기단부의 남쪽 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긴 장방형의 문비가 있어 사리 봉안의 상징성을 보이고 있다. 축조 연대는 남면 상하부에 모각된 양 문비형의 양식과 상륜부의 조각을 비롯한 각 부재의 돌을 다듬은 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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