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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강원

삼척 준경묘

by phd100 2019. 12. 30.

 

준경묘

사내의 무덤을 뇌리에 각인해두고 직선거리 19, 도로로 31북서쪽 첩첩산중 무덤 하나를 찾아간다. 준경묘(濬慶墓). 조선 왕조가 500년 동안 찾아다녔던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의 무덤이다.

 

백우금관의 전설과 용비어천가

전주에 살던 무관 이안사는 한 상급 관료와 기생을 두고 다투다 식솔 170호를 이끌고 삼척으로 이주를 했다.

이안사는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즉 이성계의 4대 할아버지). 1253년 그 관료가 순찰사로 삼척에 온다는 말에 '앉아 죽느니' 하며 의주로, 함흥으로, 원나라 땅으로 이주했다. 이후 후손들은 다루가치라는 원나라 세습 관리로 살며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웠다.(이성계의 이자춘(환조), 祖父이춘(도조), 曾祖父이행리(익조), 高祖父이안사(목조), 玄祖父이양무)

 

삼척에 정착한 지 한 해 만에 이안사의 아버지 이양무가 죽었다. 이안사가 산중에서 묏자리를 고민하는데, 한 도승이 지나가며 이랬다. "소 백 마리 제사 지내고 금으로 관을 쓰면 5대에 제왕이 날 자리네." 가난한 이안사가 백() 마리 대신 흰() 소를, 황금 대신에 금빛 귀리 짚으로 관을 써서 장사를 지내니, 훗날 고손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

백우금관(百牛金棺) 신화다. 훗날 용비어천가 가사 '육룡이 나라샤'는 목조로 추증된 이안사부터 태종 이방원까지 여섯 왕을 칭송하는 말이다.

 

'그 육룡이 바로 이곳 삼척에서 잉태됐다'고 조선 왕실은 규정했다. 왕실 정통성 확보를 위해 더없이 중요한 곳이었다. 이안사가 삼척을 떠나 태조 이성계까지 139년이 흘렀으니 무덤 위치는 잊힌 지 오래였다.

 

왕조 개창과 함께 무덤 수색 작업이 개시됐다. 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세종 때 삼척에서 이양무의 무덤을 찾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증거가 부족했다. 선조 때에 또 찾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이후 도처에서 무덤을 찾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수색 작업은 500년 넘게 계속됐다. 집요했다.

 

1899711일 흐린 날,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이양무 무덤 수색 완료를 선언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날 고종은 무덤에 준경묘라 이름을 붙이고 비문을 직접 썼다.

태조 때부터 찾아 헤매던 시조 묘에 대한 추적과 왕실 정통성 확보 작업이 그날 완료됐다. 507년 만이다. 그리고 11년 뒤인 1910829일 나라가 망했다. 경술국치(庚戌國恥)라 부른다.

 

<풍수지리설 입각 고찰>

준경묘(濬慶墓)

삼척시 미로면 준경길 333 - 360

 

이양무李陽武 장군은 고려 의종 때 정중부와 함께 무신정권을 수립했던 이의방의 동생인 이인의 아들이다. 이한李翰을 시조로 한 전주이씨의 17세 손으로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의 5대조 할아버지다. 이양무의 후손은, 목조穆祖로 추존된 안사安社, 익조翼祖로 추존된 행리行里, 도조度祖로 추존된 춘椿, 환조桓祖로 추존된 자춘子春, 그 다음으로 이성계로 이어진다.

 

전주에 살던 이양무가 이곳 삼척 땅 활기리에 묻히게 된 것은 고려 고종 18(1231) 그의 아들 안사가 지방 관리들과의 불화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고령의 부모와 그를 따르던 170여 가구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삼척 땅 활기리(活耆里)로 피신해왔는데, 그 이듬해에 운명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이안사의 삼척 피신에 대해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전주에 살았던 지방호족인 목조에게 사랑하는 관기官妓가 있었는데, 안렴사按廉使로 부임한 산성별감山城別監이라는 관리가 그 기생을 탐하게 되자 목조와 대판 싸움이 벌어지고, 그때 목조는 지방장관인 지주사知州事를 포함한 관헌들을 싸잡아 모욕을 하게 된다. 그러자 지주사는 산성별감과 음모하여, 이안사를 목자왕기설木子王氣說 등으로 음해하려들자 만약 이것이 고려왕실에 알려지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할 수가 없다고 느낀 목조가 야반도주를 한다.”라 적고 있다.

 

오늘날 이양무의 무덤을 준경묘라 부르게 된 것은 고종36(1899)에 그 동안 실묘 하였던 이곳 이양무의 묘와 이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하사전리에서 그의 부인 묘를 찾아 대대적인 묘역 정비공사 후 이양무의 묘를 준경묘濬慶墓라 하고, 그의 부인 묘를 영경묘永慶墓로 정하면서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오르는 준경묘 가는 길은 한참이나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오르막이 끝나면 길게 흙길이 이어지고 그것이 끝날 즘이면 평평한 길 양쪽으로 몇굽이나 소나무들이 별난 자태를 자랑한다. 쭉쭉뻗어 하늘을 찌를듯한 금강송의 숲인데, 특별히 이곳 소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한다. 왕실의 관 짤 나무를 대던 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경복궁 중수 때도, 숭례문 복원 때도 쓰였다.

 

그 중에도 가장 눈길을 끄는 소나무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나이가 95, 키가 32m, 둘레가 2.1m인 암소나무로, 소나무의 혈통 보존을 위해서 10여 년간 연구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형질이 우수하고 아름다운 소나무로 선발되었다. 200158일 산림청장의 주례로 충북 보은군 내속리산 상판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正二品松)을 신랑으로 맞아 준경묘역에서 세계 최초의 소나무 전통혼례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보은군수가 신랑(삼산초등학교 6학년 이상훈 대역)의 혼주가 되고, 삼척시장이 신부(삼척초등학교 6학년 노신영 대역)의 혼주가 되어 많은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이 거행되어 한국기네스북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2품송과 혼례를 치렀으니 이젠 이 소나무는 정부인송貞夫人松이라 불러야 옳을 것 같다.

 

◇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설화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로 피신 와 자리를 잡고 산지 1년 만에 아버지(이양무)의 상을 당하게 된다. 이안사는 묘 자리를 구하려고 이산 저산 산등성이를 넘어 사방으로 헤매고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마침 활기리 노동(盧洞) 산마루에 이르러 몹시 고단하여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한 도승이 동자승과 함께 나타나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한 곳을 가리키면서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하는 것이었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도승은 이어서 말하기를, "이곳이 제대로 발복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 백(百)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시신을 금관(金棺)에 안장하여 장사를 지내야 한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바로 잡고 창업주가 될 것이다. 또한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하는 것이었다.

동자승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더 있다가 그들은 다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 마리를 어디서 구하며, 더구나 금으로 만든 관은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부친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안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궁여지책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소 백 마리는 흰 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았다.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고, 귀리짚은 같은 황금색이므로 금관과 의미가 통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마침 처가에 흰 얼룩소가 있었는데, 다음 날 아침 처가에 간 이안사는 밭갈이 할 일이 있다며 흰 소를 잠시만 빌려 달라고 하여 소를 끌고 노동(盧洞) 산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처가에서 빌린 소를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고, 부친을 넣을 관은 귀리짚으로 대신하여 아버지의 장사를 치렀다.

전설은 그렇지만, 이안사의 처는 천우위(千牛衛) 장사(長史)라는 벼슬을 지낸 이공숙(李公肅)의 딸이다. 동북면 의주(덕원)로 이주한 이후에 얻은 처로 여겨지기 때문에, 아마 여기서 말하는 처가가 아니라 외가 일것이다. 어머니가 삼척이씨이기 때문이다.

<준경묘가 되기까지>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삼척군을 목조 이안사의 외향(外鄕)이며 선대 묘가 안치된 곳이라 하여 군()에서 부()로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한다.

그러나 목조인 이안사가 함경도로 이주하고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묘 위치를 알지 못하였다. 태조를 비롯한 태종, 세종 등 역대 왕들이 이양무 묘소를 찾고자 전국의 모든 지관 등을 동원하는 등,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삼척주지(三陟州誌)에는 옛날 호장 김윤식이 소장하였던 옛 기록에 의하면 세종29(1447) 10, 강원감사 이심(李審)과 도사(都事) 황효원(黃孝源), 삼척부사 이윤손(李允孫) 등이 어명으로 묘소를 찾고 있을 때,

그 지역에서 살던 촌노 고봉생(高奉生), 조흥보(曺興寶), 최산봉(崔山鳳) 등이 자료로 제공하기를 목조황고묘(穆祖皇考墓)(준경묘)는 노동(蘆洞)에 있고, 황비묘(皇妣墓)(영경묘)는 동산(東山)에 있으며, 삼척부에서 40리쯤 떨어진 활기동에 목조가 살았던 옛 터가 남아있다고 증언하였다.

이곳은 두메산골 깊숙한 곳인데 논밭과 뽕밭이 있고, 이 지방 사람들이 말하기를 댁기(宅基), 댁전(宅田)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옛날부터 일컬어 왔다라고 하여 이때 묘를 찾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묘를 찾았다 하나, 의심스러워 조상 묘를 확정짓지 못했다. 선조22(1589)에도 새로운 곳의 묘를 찾게 되는 흔적이 발견된다.

결국 이곳의 묘는 그 진위(眞僞)를 놓고, 수백 년 동안을 끌고 내려오면서 왕들의 고심도 매우 컸다. 그러다가 고종35(1898)에 대대적인 묘역 정비공사가 시작된다.

두 곳의 묘는 사방 3,300으로 경계를 정하고 제각(祭閣)을 건축하였는데, 묘비와 부속시설물을 갖춘다. 목조의 선친 묘를 준경묘(濬慶墓)라 하고, 선모(先母)의 묘를 영경묘(永慶墓)로 정했다.

 

1년 후인 1899년에 이곳 활기리 99번지에 새롭게 재실(齋室)을 축조하고, 목조의 사적비를 세웠으며, 수호절목(守護節目)을 만들어 상임수호군(常任守護軍) 4명씩을 배치하여 두 묘를 수호토록 하고 매년 청명일(淸明日)에 제향(祭享)토록 하였다.

 

이양무가 이곳에 묻힌 해가 1232년으로 추정하면, 1899년에 묘비가 세워지기까지 667년의 실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조선의 왕들이 진위를 의심하여 질질 끌었던 것처럼, 의혹의 눈길을 모두 다 지울 수는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다.

용비어천가가 살아서 행적의 신격화를 만들었다면, 이양우의 묘 찾기는 몇 사람의 입 맞추기로 고물 뜯어먹기였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멀고 먼 삼척까지 왕이 찾아 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반대로 아니라고 할 그 어떤 증거도 없기에 다만 그러려니 할 뿐이다.

 

이양무는 이린의 아들이다. 이린은 이용부(李勇夫) 대장군의 아들이다. 그런데 이용부의 아들은 기록에 따라 다르다.

, 선원계보(璿源系譜)에서는 아들이 둘이다. 이인(李璘)과 이거다. 그러나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는 31녀로 기록되어 있다.

이준의, 이의방, 이린(李隣) 그리고 딸 하나다. 따라서 두 가지 이론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린과 이인을 같은사람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인(李璘)은 벼슬이 내시집주(內侍執奏), 배위는 문극겸(文克謙)의 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사·문극겸열전(文克謙列傳)문극겸은 미혼의 딸이 있었는데, 이의방(李義方 ?1174)의 아우 이린(李隣)에게 시집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을 조합하면 이양무의 가계도 이의방 일족이 정적에게 피살된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문극겸은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와 상장군을 겸하였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전주 이씨들은 중앙무대에서 한 때 잘나가다가 정치적 변혁에 휩싸여 몰락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다가 아들 이안사가 일개 산성별감과 다투었다가 멸문의 위기에 처하였다.

그 산성별감이 이제 삼척 땅으로 안렴사가 되어 온다는 것이다. 안렴사가 중앙에서 파견된 인물이라지만 품계는 그리 높지 않다.

대략 4품에서 6품사이였다. 당시는 대략 6품쯤이었을 시절이다. 산성별감은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을 약칭하여 불렀던 벼슬이다. 산성으로 백성을 피신시키는 일을 하는 관리다.

어떻든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에 쫓겨서 처가 곳으로 피신하였다는 것은 중앙무대에서 크게 밀려난 이후라 여겨진다. 문제의 그 산성별감이 이제는 안찰사(안렴사)가 되어 삼척으로 오게 되자 또다시 도주하게 된다.

이번에는 의주(宜州 지금의 덕원)로 이주하게 된다. 거기서 이안사는 의주병마사가 되어 영흥에 있는 원나라 쌍성(雙城)과 대치하는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세가 불리하자 1254년 원나라에 그만 투항하여 버렸다. 그런 후 두만강 유역 경흥(慶興) 동쪽 30리 지점에 있는 알동(斡東)이라는 곳에 정착하였다. 거기서 천호(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어 여진(女眞)의 한 지방을 다스렸다.

1274년 세상을 떠나 그곳에서 묘를 만들었다. 훗날 덕릉(德陵)이 그것이다. 현재 이안사의 능은 함경남도 신흥군에 옮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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