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직군 왕릉(悉直郡 王陵)
한반도에 사라진 고대국가, 창해삼국이 있었음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고구려가 점령한 강릉 땅 “예국”, 이사부가 복속시킨 삼척 땅 “실직국”, 그리고 울진에 있던 “파단국” 세 나라를 창해삼국(滄海三國)이라 한다.
1988년 1월 20일 울진 죽변항 옆 논에서 발견된 봉평리 ‘신라비’ 내용에도 이 국가들이 나온다. 파단국(울진)으로 유배된 옛 실직국(삼척)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고 곤장을 치고, 소피를 뿌려 제사를 지냈다는 대목이 나온다.(신라비 전시관 참조)
기록에 따르면 실직국 부흥파 가운데 진씨(秦氏) 가문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전한다. 1990년 한 무리 일본인들이 발견된 비석을 보겠다고 울진을 찾았다. 이들은 자기네 성씨를 秦이라고 쓰고 '하타'라고 읽었다.
비석에 있는 울진 옛 지명 '파단(波但)' 또한 일어로 '하타'라 읽었다. 수수께끼의 고대국가 실직국(삼척)은 그렇게 다시 흔적을 찾았다.
이러한 실직군 왕릉(悉直郡 王陵)이 삼척시 성북동에 삼척 김씨 시조의 무덤이 있다.
신라 장군 이사부가 실직국을 점령한 그 신라도 망했다. 서기 935년이다.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왕건에게 공손하게 나라를 갖다 바치고(그래서 시호가 공경할 경(敬), 따를 순(順), 경순왕이다) 개경에서 살다, 왕건보다 더 오래 살다 죽었다. 그의 시신은 경주까지 오지 못하고, 임진강가에 묻혀 있다.
장남 마의태자는 신라 부흥군을 모집하며 금강산까지 북상하다가 사라졌다.
여덟째 아들 추(錘)는 삼척 땅을 선물 받고 살다 죽었다. 그 후 추의 아들 김옹위가 죽자 고려 왕실에서는 그에게 실직군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실직군. 바로 신라에 의해 사라진 그 나라 이름이다. 자기네가 멸망시킨 신라 왕조 후손에게 신라가 멸망시킨 그 나라 이름을 붙여 놨다.
좀 더 부언하자면 이 릉은 삼척 김씨의 시조이며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인 일선군 錘(추)의 아들 김옹위의 실직군왕릉이다.
敬順王(경순왕, 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한 뒤 왕위를 오르게 하였으나, 935년에 고려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事審官(사심관)으로 남은 여생을 보냈다.
경순왕의 아홉 아들 중, 첫째아들 마의태자 金鎰(김일)과 김굉을 제외한 7아들은 낙랑공주(왕건의 딸)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마의태자로 잘 알려진 金鎰(김일)은 망국의 한을 품고, 愷骨山(개골산, 금강산)으로 入山(입산) 하였다는 비운의 왕자이다.
김옹위(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인 일선군 錘(추)의 아들)의 아버지 錘(추)는 경순왕이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여덟 번째 아들인데 一善君(일선군)에 봉해졌으나 은둔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사망 후 고려로부터 悉直君(실직군)으로 봉해져 왕릉(王陵)으로 조성 되었다.
이 곳은 명당이라 소문나 탐이 난 여러 사람들이 자주 이 능 근처를 노렸지만, 야설에 전하기를 그 마을에 어떤 사람이 능 옆에 암장하려고 가만히 구덩이를 파는데 밤에 샘물이 솟아오르고 백호가 와서 걸터앉아 은은한 바람을 일으키고 갑자기 뇌성벽력이 진동하니 도저히 묘를 쓸 수 없었다한다.
추의 뒤를 이어 김옹위에게 목종대에 실직군으로 봉해졌고 국왕의 賜姓(사성)에 의해 성씨를 가져야 하는 상황에다 성씨가 없으면 과거에 응시도 못하게 하자 본관을 삼척으로 정해 삼척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니까 실직국의 왕릉이 아니라 실직군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실직군왕릉이다.
1838년(헌종 4) 김학조·김흥일 등이 실직군왕의 지석과 유적을 찾으려고 三陟府使(삼척부사) 이규헌에게 간청하여, 왕비 밀양군 박씨의 묘인 史直陵(사직릉)과 실직군왕 김위옹의 묘인 葛夜陵(갈야능)을 발굴하여 두 능을 확인하였다.
1937년 삼척김씨 종중에서 수축할 것을 건의하고 石儀(석의)를 갖추어 능으로 봉하였다.
삼척시 월계동에 齋舍(재사) 왕묘가 있어 매년 음력 3월 15일이면 각처에서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실직군왕비릉>
이 릉은 삼척김씨의 시조이며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김위옹의 妃(비) 밀양박씨의 실직군왕비릉이다.
이곳 묘터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묘 부근에 다른 묘를 쓰기 위해 땅을 파면 '샘물이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백로가 와서 걸터 앉아 훈훈한 바람을 일으키고, 뇌성벼락이 진동하니 두려워 도망을 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1937년 실직군왕릉과 함께 삼척김씨 문중의 건의로 묘를 재정비하여 능으로 봉하였으며, 매년 음력 3월 15일에는 실직군왕릉과 같이 후손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