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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남

보성 대원사(大原寺) 와 달마대사 . 혜가단비

by phd100 2020. 2. 21.



보성 대원사(大原寺)
대원사는 전남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대원사를 품고 있는 천봉산(天鳳山)은 해발 609m 로 보성, 화순, 순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대원사는 백제 무녕왕 3년(서기503년)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

천봉산은 전남 보성군의 문덕면 중산리 · 봉갑리와 복내면 일봉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고도:611m). 보성군 북부 산지를 대표하는 산이다.
 산세가 깊고 대원사 계곡을 비롯한 계곡이 많다. 『해동지도』(보성)에 천봉산(天鳳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중봉산(中峯山)은 보성군의 동북쪽 30리에 있는 산으로 대원사(大元寺)는 중봉산(中峯山)에 있다. 또 봉갑사(鳳岬寺)도 중봉산(中峯山)에 있다."라고 하여 '중봉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 때에 아도 화상이 절터를 잡기 직전 꿈에 봉황의 보금자리를 닮은 곳을 발견하고, 꿈에서 깨어 백두대간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며 봉황의 보금자리를 찾다가 대원사터를 찾았는데, 산 형세가 봉황 형국이어서 산이름을 천봉산이라 하고, 봉은 대나무 열매(죽실)를 먹는다 해서 절 이름을 대원사, 죽원사(竹原寺)라 이름 붙였다는 전설이 있다.

 골이 깊고 수석이 좋은 지방 명승지이다. 천봉산 동쪽으로 봉갑사를 비롯하여 많은 절이 있었다. 현대사의 여러 전쟁을 치르면서 대원사가 불에 타는 피해를 겪기도 하였다.

<창건 설화>
 경북 선산군 모레네 집에 숨어 살면서 불법을 전파하던 아도화상은 하룻밤 꿈속에 봉황이 나타나 말하였다.

 아도! 아도! 사람들이 오늘밤 너를 죽이고자 칼을 들고 오는데 어찌 편안히 누워 있느냐.
 어서 일어 나거라. 아도! 아도!” 하는 봉황의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창밖에 봉황이 날개 짓 하는 것을 보았다.

 봉황의 인도를 받아 광주 무등산 봉황대까지 왔는데 그곳에서 봉황이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봉황의 인도로 목숨을 구한 아도화상은 석달 동안 봉황이 머문 곳을 찾아 호남의 산을 헤메다가 마침내 하늘의 봉황이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봉소형국(鳳巢形局)을 찾아내고 기뻐 춤추며 산 이름을 천봉산이라 부르고 대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 대원사극락전(大原寺極樂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건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7호. 대원사에는 6·25 이전까지만 해도 10여채의 건물들이 있었으나 여순사건 때 모두 불타버리고 거의 폐허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당시 극락전 건물만은 남아 있게 되었다.

 극락전의 기단은 전면에 1m 이상의 잡석 축대를 쌓아 중앙에 계단을 설치하였고, 양 측면 및 배면은 축대의 높이가 낮다.
 초석은 자연석으로 덤벙주초 방식이며 기둥은 약간 배흘림이 있고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에는 미세한 귀솟음이 보인다.

 공포(栱包)의 형식은 평방 위로부터 짜여진 다포형식으로 전후 각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를 각각 2구씩 배열하였으며 출목은 외3출목, 내4출목이다.
 가구를 보면 대량이 내고주에 끼워져 상부 가구재를 받고 있으며, 종량은 대량 위에 놓여진 동자주(童子柱 :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가 받게 하였다.

 천장은 하중도리 위로부터 우물천장으로 처리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양 측면에 풍판(風板)을 설치하였으며, 단청은 내외부 금모로(錦毛老) 단청을 하였다. 정면 3칸에는 모두 띠살문양의 4분합문을 설치하였다.

 불단 위로는 중앙에 아미타불이 본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좌우보처로 두 협시불이 있어야 되지만, 1구는 6·25 때 분실하였다고 하며 1구의 협시불만 좌측에 남아 있다.


☆ 대원사 극락전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 (寶城 大原寺 極樂殿 觀音菩薩․達摩大師 壁畵) 
 대원사 극락전의 내부 동・서측 벽에 큼직하게 그려진 관음보살 및 달마대사 벽화는 조선후기 주불전 내부에 조성된 벽화 중 동・서 측면에 관음보살도와 달마도가 각각 독립된 존상으로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었다.

 서벽에 그려진 관음보살 벽화는 기암괴석과 대나무를 배경으로 파도 위 연화대좌 위에 앉아있는 백의의 관음보살과 선재동자를 그렸는데,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의 뒤편에 서서 靑鳥를 안고 있는 특징 있는 도상을 보여준다.

 또한 동쪽 벽에 그려진 달마대사 벽화는 선종에서 즐겨 도상화 되었던 달마대사와 혜가단비의 고사(별지 참고)를 그렸는데, 큼직하게 그려진 달마대사와 달리 혜가를 작게 그려 달마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켜 묘사하였다.

이 벽화는 대원사에 소장된 「寶城天鳳山大原寺大法堂十王殿與衆寮重刱及丹靑兼地藏改金畵各帖記文」(대원사 티벳박물관소장)이라는 현판의 기록으로 보아 1766년의 지장보살도와 시왕도 조성 및 1767년 대법당 중창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원사 관음보살・달마대사벽화는 운문사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자 18세기 중·후반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의겸의 계보를 잇는 의겸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 부처님 발(佛足) 예배법
1. 두손을 모아 합장하고 반배한다.
2. 오른손으로 물을 묻혀, 이마에 세 번 바른다.
3. 두 손을 부처님 엄지발가락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다.
4. 살면서 잘 못한 일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모든 중생이 함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한다.
5. “나무아미타불”을 세 번하고 기도를 마친다.

◇ 부처님 발예배를 하고 난 뒤 세가지 공덕
1. 부처님 되겠다는 서원이 더욱 확실해 진다.
2. 부처님의 발은 천신들이 보배연꽃공양을 올리는 곳으로서, 천신들과 함께하는 공덕을 쌓게 된다.
3.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줄어들어 임종시에 마음이 편안하므로 좋은 환생의 씨앗이 된다.



<달마대사와 혜가단비>

달마(达磨)대사의 본명은 범어(梵語)로는 "통달하고 크다."는 뜻인 '보디다르마(Bodhi-dharma)'이며, 보리달마(菩提达磨) 또는 보제달마(菩提达磨)는 이를 음사(音寫)한 말이고, 달마(达磨)는 그 약칭이다. 의역(意譯)하여 '각법(覺法)'이라고 한다.

 

달마는 남인도(南印度; 일설에는 페르시아) 바라문족(婆羅門族)의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성을 세테이리(刹帝利)라고 했다.

 

어느 날 향지국 국왕이 고승 반야다라(般若多羅)를 초청하였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세 왕자의 지혜를 시험해 보기 위해 질문하였다.

왕이 갖고 있던 보석 하나를 내보이며, “세상에서 이 보석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습니까?”

첫째와 둘째 왕자는 없다고 답한 반면 달마(达磨)이 보물은 가지고 있는 사람만을 기쁘게 하므로 최상의 보물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제일 가는 보물은 부처의 가르침입니다."라고 답하여 고승을 놀라게 하였다.

 

국왕이 승하한 후 달마(达磨)는 출가하여 고승 반야다라(般若多羅)를 섬긴 후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당시 소승선관(小乘禪觀)6() , 유상종有相宗), 무상종(無相宗), 정혜종(定慧宗), 계행종(戒行宗), 무득종(無得宗), 적정종(寂靜宗)이 서로 다투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전도에 나선 달마(达磨)대사가 이들 모두를 굴복시켜 귀의하도록 하여 전 인도에 그의 명성을 떨쳤다.

 

그 후 반야다라(般若多羅)는 죽으면서 "내가 죽은 후 67년이 지나 동쪽으로 전법을 하여 부처님의 이치를 바르게 선양하라"는 부촉(咐囑;법을 전하는 의례.)하였는데,(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달마(达磨)는 그의 뜻을 받들어 520년 중국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 남해(南海)에 왔고, 527년 금릉(金陵, 南京)에서 양무제(梁武帝, 464~549)를 만났으나 서로 뜻이 맞지 않자 그 해 11월 소림사가 있는 쑹산(嵩山)에 도착하였다.

 

쑹산(嵩山) 샤오린쓰(少林寺, 소림사) 부근의 깊이 약 7m, 너비 약 3m의 천연 석굴(지금의 달마동达磨洞)에 자리 잡은 달마(达磨)대사는 매일 벽을 향하여 9년간 면벽좌선(面壁坐禪)하며 때를 기다렸다.

이를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부른다. 달마(达磨)대사가 마주보고 앉았던 거무스름한 빛이 도는 흰 돌에 좌선하는 달마(达磨)대사의 모습이 검은 색으로 찍혀 버렸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달마(达磨)의 핵심사상인 안심벽관(安心壁觀)이다. , 벽을 향해 앉아 모든 번뇌나 망상이 벽에 막혀 자신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자신의 청정한 본심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旨人心 見性成佛)" , "인간의 마음을 가르쳐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을 깨달아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알게 되고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도 사람인지라 좌선 도중에 졸음이 솟아지고 자꾸 눈꺼풀이 내려왔다. 졸음을 쫓으려 대사는 자신의 눈꺼풀을 떼어내 밖에 던졌다.

그런데, 다음날 눈꺼풀이 떨어진 자리에 나무가 자라났고, 향기가 좋아 신기하게 여긴 달마(达磨)가 이를 달여 마셨는데, 이후 더는 잠이 오지 않아 맑은 정신으로 수행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달마(达磨)에 의한 차() 기원설과 '다선일체(茶禪一體)'의 요지이다.(해남 대흥사에서 기거한 우리나라 초의선사의 茶道 참고)

 

그런가 하면 달마도(达磨圖)를 보면, 그의 눈은 항상 유난히 부리부리하고 부릅뜬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 또한 쏟아지는 졸음으로 윗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오자 아예 눈꺼풀을 잘라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쨌던 면벽정진이 9년이 거의 되어갈 때쯤, 뤄양(洛陽, 낙양)에서 신광(神光)이라는 승려가 달마동(达磨洞)을 찾아와 법을 구하였지만, 몇 날 몇 일이 지나도록 달마(达磨)는 본체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새 눈이 내려 허리에까지 차 올라왔는데, 신광(神光)이 그 자리에 끝까지 움직이지 않고 법을 구하니, 달마(达磨)가 드디어 오랜 침묵을 깨고,

"제불(諸佛)의 도()는 오랜 세월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정진하며,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어찌 가벼운 마음으로 진실의 불법(佛法)을 구하려 하는가?" 라고 꾸지람하였다.

 

달마(达磨)의 말이 끝나자, 신광(神光)은 홀연히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잘라 불퇴전의 신심을 표하였고, 달마(达磨)는 그를 받아들여 혜가(慧可, 487-593)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이것이 '혜가단비(慧可斷臂: -)'라는 고사이다.

 

혜가(慧可)가 달마 스승에게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해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달마(达磨)"그 불안한 마음을 가져 오너라."고 요구하니 혜가(慧可)"마음을 찾을 수 없다."하였다.(그 마음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바로 그 마음이 없어졌다라는 뜻)

 

이에 달마(达磨)"내가 벌써 그 마음을 안심(安心) 시켰다"고 했다. 이 말에 혜가(慧可)가 큰 깨달음을 얻었고, 달마(达磨)의 정법은 혜가(慧可)에게 전해졌다.

 

얼마 후 달마(达磨)는 다시 인도로 돌아갈 때가 왔다고 생각을 하고 혜가(慧可)에게 4권 능가경(楞伽經)과 석가모니로부터 내려오는 가사(袈裟)를 주었다.

 

혜가(慧可)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 달마(达磨)는 샤오린쓰(少林寺, 소림사)를 떠나 허난(河南) 협현(陕县) 이촌향(李村乡)의 웅이산(熊耳山) 아래 정림사(定林寺)에서 5년 동안 설법하고 536년에 고향 남인도 향지국으로 가지 못하고 열반하였다.

 

그런데, 3년 후에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동위(东魏)의 사신 송운(宋云)이 총령(葱岭, 파미르고원)에서 지팡이를 집고 한 쪽 발에만 짚신을 신고 오는 달마(达磨)대사를 만났다.

 

송운(宋云)이 물었다. "대사님, 어디로 가십니까?" "서천(西天)으로 갑니다. 당신의 왕은 이미 돌아 가셨소이다."하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송운이 귀국해보니 효명제(孝明帝)는 죽고 효장제(孝庄帝)가 즉위한 후였다.

송운(宋云)이 겪은 일을 왕에게 모두 아뢰자, 왕은 무덤을 파보도록 하였는데, 관 속에는 짚신 한 짝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후 정림사(定林寺)의 이름도 공상사(空相寺)로 바뀌었다.

 

<참고>

달마(达磨)의 전법가사(傳法袈裟)2(二祖) 혜가(慧可)에 이어 3조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6조 혜능(惠能)으로 전해졌다.

 

3조 승찬(僧瓚)2조 혜가(慧可)에게 지난날의 죄를 참회하는 길을 묻자, 혜가(慧可)가 답하길,

"그 죄를 내게 가져오라."

"가져올 수 없습니다."

"벌써 너의 죄를 참회시켰다."는 혜가(慧可)의 말에 승찬(僧璨)은 곧바로 깨달음을 얻었다.

 

4조 도신(道信)3조 승찬(僧瓚)에게 해탈법문(解脫法門)에 대해 묻자 승찬(僧璨)이 반문하길,

"누가 너를 묶었느냐?"

"아무도 묶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를 이미 해탈시켰노라."는 승찬(僧璨)의 말에 도신(道信)이 깨달음을 얻었다.

 

무측천(武則天)이 쑹산(嵩山) 쥔지펑(峻极峰)에서 금간(金简;금판에 쓴 편지)을 쑹산신(嵩山神)에게 올리며 물었다.

"저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 . . . " 쑹산신(嵩山神)은 말없이 용서해주었다.

 

당나라 때 한 스님이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달마(达磨)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지 묻다 조주선사(趙州禪師) 답하길,

"뜰 앞에 잣나무이다. (祖師西來意? 庭前柏樹子)"

 

자신의 마음을 평안히 하고, ​​부처님의 뜻을 따르고, 천국을 가는데,

경전이나 성경을 해석하고 줄줄 외우고, 향 많이 피우고, 기도 많이 하고, 공덕을 많이 쌓는다고, 더욱이 무술을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에 끼어 있는 나쁜 생각 들을 하나씩 지워 깨끗한 마음을 발견하고, 끊임없이 그 경지를 유지한다면

그것이 부처요..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달마의 가르침을 아는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旨人心 見性成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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