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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산서성(1.왕가대원, 2.평요고성. 3.통천협.) B.허난성(4.태항산도화곡 5.환산선과대협곡 6.왕상암 C.허베이성(7.조운묘 8.개원사 9.융흥사 )

by phd100 2020. 3. 21.

A.산서성(1.왕가대원

2.평요고성

 3.통천협.

 B.허난성(4.태항산도화곡

 5.환산선과대협곡

 6.왕상암

C.허베이성(7.조운묘

 8.개원사

 9.융흥사

1.중국 산서성(山西省) 영석(靈石). 왕가대원(王家大院)

 

왕가대원(王家大院: 왕자다위안)

 

왕가대원(王家大院)은 중국 산시성(山西省) 영석(靈石)현 정승(靜昇)진 진중(晋中)에 위치한 저택이다.

청대(淸代) 링스(灵石) 4대 가문 중 하나인, 징성왕씨(静升王氏) 住宅群의 중심 부분이다.

면적은 45이며, 차오자다위안(乔家大院)4배에 달하는 면적으로 진상(晋商) 중 최대 규모이다. 북방 민간가옥의 전통적 양식과 남방 원림(园林)의 설계를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가 9개 중 첫번째인 왕가대원(王家大院)은 민간의 황궁으로 불리운다.

왕가대원은 규모와 레벨은 물론이고 문화적인 차원과 건물의 장식예술적 차원에서 모두 중국 북방 가옥의 건축예술을 집대성했다고 할수 있다.

 

산서(山西)성 영석(靈石)현 정승(靜昇)진이라는 낯선 도시가 중국 최초의 역사문화도시로 선정된 데는 그 소도시에 바로 왕가대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 채의 뜰을 가진 보루식 건물들이 동쪽과 서쪽 두 구간으로 나뉘어 산세를 따라 첩첩하게 자리 잡고 있다.

높고 낮게 즐비한 건물 들 속에는 우아하고 정교한 석각과 벽돌조각, 목각물이 화려한 수를 놓는다.

 

800여년 전의 원()나라 때 정승(靜昇) 왕씨의 조상이 이곳에 와서 농사를 짓는 한편 두부장사를 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나라 때인 1673년 왕씨 가문은 청나라 정부군이 반군과 싸우는데 말 24필을 지원해 황제의 표창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청정부의 힘을 빌어 더 큰 장사를 벌이게 되었다.

 

그 뒤에는 왕씨 가문에서 과거급제를 통하거나 돈을 쓰는 등 방법으로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최고로 정2품직에 오른 사람도 있다.

농사로부터 장사에 이르고 장사로부터 관리에 이른 왕씨 가문은 청나라 중반에 이르러 현지의 4대 갑부로 되었다.

 

왕씨 가문은 장장 500여년 동안 대대적인 공사를 계속해 저택을 신축하고 사당과 패방을 세우며 묘를 조성함으로써 방대한 규모를 형성했다.

왕가대원은 최대 "골목 3갈래, 보루 4, 사당 5"를 보유했는데 그 중 현재 개방된 구간은 번성기의 1/4정도에 달하는 골목 1갈래, 보루 2채뿐이다.

 

1) 고가애(高家崖)

 

대원의 입구는 높은 동문(東門)에 있다. 뜰 두 개를 거느린 보루 고가애(高家崖)는 왕씨 가문의 제17대 손인 두 형제가 살던 저택이다.

왕씨 가문의 번성기였던 1796년부터 1811년 사이에 지은 이 건물에서는 왕씨 가문의 재력을 잘 읽을수 있다.

 

특히 어디서나 볼수 있는 석각과 목각, 벽돌조각은 심원한 의미와 정교한 기법, 기이한 모양, 우아한 품위로 감탄을 자아낸다.

다양한 용도의 뜰이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면서도 다른 뜰과 연결되어 그 속에 들어서면 허와 실이 엇갈리는 미궁에 들어선듯 하다.

 

2) 응서거(凝瑞居)

 

왕가대원에서 조각이 가장 화려한 곳은 응서거(凝瑞居)이다. 안채의 양쪽에는 희소식을 전하는 말이라는 "비마보희(飛馬報喜)"와 과거급제를 뜻하는 "오자탈괴(五子奪魁)"가 정교함의 극치를 자랑한다.

 

특히 "오자탈괴"의 무늬가 가장 복잡하고 화면에 등장한 모든 요소가 길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활발하게 보이는 어린이들이 과거급제와 경사로움 등을 뜻하는 물건들을 갖고 있는데 그 정교함이 이를 데 없다.

 

응서거의 문에 들어서면 왼쪽에 왕씨 가문의 글방격인 양정서숙(養正書塾)이 있다. 글방은 물론이고 모든 건물의 구석구석에 정교하고 화려한 조각이 즐비해 눈을 어지럽게 한다.

 

오늘날 응서거에는 또한 청나라 때 유명한 서예가의 작품과 청나라 때 지도, 채색의 성지(聖旨)가 보존되어 있다. 드라마에 보면 황제의 칙명을 적은 성지는 대부분 노란색이나 사실 그런것 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3) 홍문보(紅門堡)

 

고가애에서 석교를 지나면 맞은 편에 홍문보(紅門堡)에 이르게 된다. 역시 청나라때인 1739년과 1793년사이에 지은 이 건물은 축조시간이 더 이르러서인지 조각물은 상대적으로 소박하지만 규모는 더욱 웅장하다.

 

각자 뜰을 거느린 건물들은 주인의 급별에 따라 서로 다른 규모를 가진다. 예를 들어 5품 이상의 관리직을 지낸 집은 뜰도 네 겹이고 장식도 더욱 화려하다.

 

사마원(司馬院)이 바로 그런 뜰이다. 입구에서부터 시작해 관직이 높아진다는 의미의 가관(加官)과 봉록이 많아진다는 진록(進祿), 복이 많다는 증복(增福), 장수를 의미하는 첨수(添壽)로 명명된 네 겹의 뜰을 지나서 뒤로 들어갈수록 복이 많이 받음을 느끼게 된다.

 

홍문보는 높은 곳에서 봐야 그 절묘한 설계를 읽을 수 있다. 길게 모난 보루는 남북향의 중심거리바닥에 커다란 자갈을 깔았고 그 거리 양쪽에 동서향의 골목 세 갈래가 조성되어 한자로 왕()자의 모양을 이룬다.

 

그 골목과 골목사이에 각자 뜰을 거느린 저택 네 채가 줄지어 있다. 건물들은 산세를 따라 높고 낮게 첩첩함을 이루며 질서정연하게 보여 똑 같은 잿빛의 기와이고 똑 같은 구도지만 강한 시각적 효과를 보여준다.

 

현재 홍문보에는 왕씨박물관과 서예관, 보물관, 왕씨양조방, 두부방 등 다양한 시설들이 보존되어 있고 특히 왕씨박물관에는 왕씨가문의 보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왕가대원의 보루에 올라서면 불타는 노을속에 왕가대원이 한 눈에 안겨온다. 발아래 보이는 저 많은 건물들속에 그 옛날에는 왕씨가문의 많은 자손들이 살았지만 흐르는 세월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한때는 아름다움을 소망하는 조각과 키 높은 소슬대문이 있어도 왕씨가문은 세월속에 사러져 갔고 남은 것은 후세사람들에게 경험과 교훈을 말해주는 조각과 건물뿐이다.

 

4) <고가애와 홍문보의 차이>

 

고가애와 홍문보는 각자 특색이 다르다. 고가애는 가까운 곳에서 자세히 보고 홍문보는 높은 곳에 올라서서 내려 다 보는 것이 좋다. 고가애에서는 사소한 것을 보고 홍문보에서는 웅장한 기세를 읽으며 고가애는 조각이 정교하고 홍문보는 구도가 엄밀하다.

 

왕가대원의 관람은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왕가대원 뒷면의 스토리들을 잘 들을 수 있다. 먼저 가이드를 따라 한 번 둘러 보고나서 자신이 관심하는 곳을 혼자서 돌면 좋은 관광이 될 것이다.



 2.

중국 산서성(山西省) 평요현(平遙縣) 평요고성(平遙古城)

 

평요고성(平遙古城)

 

평요고성(平遙古城)은 중국 산시성(山西省) 태원(太原)에서 90km나 떨어진 평요현(平遙縣)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이다. 황토고원의 산시성은 중국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탄의 매장량이 엄청나게 많은 성이다.

그러므로 광산주들은 부유층이 많으며 근로자들은 그에 비하여 빈곤하다. 주로 한족(漢族)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외 민족으로는 회족(回族), 만주족(滿洲族), 몽고족(蒙古族)이 이곳에 거주를 하고 있다.

산서성에는 오대산(五臺山)과 더불어 운강석굴도 있지만, 이곳 평요고성(平遙古城)도 유명하다.

 

평요고성(平遙古城)은 여강고성(麗江古城), 대리고성(大理古城)과 더불어 중국의 3대 고성가운데 하나이다. 그중 평요고성은 흙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성벽(城壁)과 성문(城門)으로 유명하다.

 

평요현(平遙縣)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성은 다른 성과 다르게 성벽의 경계가 곧 마을의 경계이다. 그러므로 성곽(城郭)으로 둘러 싸여진 성내의 도시라고 생각을 하면 된다.

평요고성은 서주(西周) 선왕(宣王)이 처음으로 건설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니 기원전 827~782년으로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서주의 장수(將帥)이며 정치가, 문학가이기도 한 윤길보(尹吉甫)의 군대가 이곳에 주둔하기도 하였다. 그 후 명나라 청나라시기에 개축을 거듭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평요고성은 지금도 사람들이 거주를 하고 있다. 인구도 42000명 정도이고, 성의 넓이는 680,625평정도이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성안에는 사원(寺院) 묘사(廟祠) 누각(樓閣) 현아서(縣衙署) 등 고대의 건축물이 원형 그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고성(古城)내부에는 골목길만 하여도 100개가 넘는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른 시가지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다 갖추고 있는 성중(城中)의 도시이다.

 

평요고성 안에는 명나라 때부터 유명한 소기(小器)가 특산품이다. 그리고 성벽의 높이는 12m이며 총 길이는 6.4km이다. 성문은 모두 6개이고 문 밖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다.

이는 평요고성이 다른 표현으로 오구성(烏龜城)이라 불리기에 풍수지리학을 바탕으로 성을 수축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물 밖 2개의 우물은 거북이의 눈을 나타낸다. 북문(北門)은 꼬리이며 동문 서문에는 각각 2개의 문이 있으니 이것은 거북이의 다리를 표현한 것이다.

 

* 평요고성 내부에는 민가만 하여도 3,800여 채가 된다. 이 민가들은 거의 기와를 사용하여 지은 흙집이 대부분이다.

 

* 평요고성의 시가지 동쪽에는 사찰이 많고 서쪽에는 부자가 많으며 남쪽에는 상가가 즐비하고 북쪽에는 부유하지 못한 이들이 주로 거주를 하고 있다. 그리고 옛날에는 각 가정마다 문()의 장식으로서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 성내에 도교사원인 성황묘(城隍廟)가 있고, 맞은편에는 문묘(文廟)가 있다. 이 사원 안에는 유교를 살펴볼 수 있는 묘원(廟院)있다.

 

* 표국(鏢局)이라는 건물은 빠오쥐라고 하여 평요고성의 무술을 알아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 일승창(日升昌)이라는 건물도 둘러보아야 하는데, 이곳이 바로 중국 최초의 은행건물이다. 그만큼 평요고성은 금융업이 일찍부터 발달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일승창은 중국 최초의 표호(票號 : 환으로 보내진 돈을 현금으로 바꿔주는 금융업자)로 중국현대 은행의 아버지이다.

 

평요는 산서에서 가장 큰 상품집산지로서 상업의 발달은 금융업의 발달을 이끌었고, 평요의 상인 이씨는 청나라 도광3(1823) 일승창(日升昌)이라는 표호를 만들었다.

대청금융제일가(大清金融第一街)인 평요고성의 서대가에 있으며, 100년 동안 번성하였다. 전국 35개의 도시에 진출하였으며 정부의 은(), 조세, 군인의 급여, 대출, 예금 등의 업무를 보았다. 멀리는 미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에도 진출하였으며 청나라 경제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일승창의 입구에 걸린 편액에는 일승창기(日昇昌記)’라고 쓰여 있는데 자는 동쪽하늘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듯 사업이 번창하라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이 편액은 청나라 가경말년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진항(陳沆)의 필체라고 한다.

 

일승창에는 총 21채의 건물이 있고, 넓이는 1400이다. 남북으로 마련된 정원에 3진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동원은 좁고 긴 모습을 하고 있고, 서원은 일신중표호(日新中票號: 개인이 운영하는 금융기관)를 병합한 것이다. 일신중표호는 2진의 규모이며 2층의 누각식 건축물이다. 두 표호(일신중과 일승창) 모두 산서민가의 전통특색을 잘 갖추고 있다.

 

일승창에는 영업용 방과 접견실, 그리고 보조용 방들이 있다. 전원(前院)에는 궤방(櫃房), 신방(信房), 장방(賬房)이 있고, 후원(後院)에는 접견실, 손님방, 주인방 등이 있다. 주요 건물 뒤 쪽으로 하인들의 방과, 주방, 화장실, 창고 등이 있다.

 

* 이랑묘(二郞廟)는 이랑신 양전(楊戩)을 모신 사원으로 이랑신은 옥황상제의 조카이자 천궁을 지키는 대장이기도 하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을 체포하는 것도 이랑신이다.

동향으로 건설되었으며 3진의 규모(문을 세 곳 지나야 하는 규모)를 갖추고 있다. 명대에 건설된 것으로 산문, 희대, 종고루, 원진전, 토지전, 신마전으로 되어 있다.

 

신마전은 이랑신이 탄다고 하는 용마(龍馬)를 모신 곳이다. 원래 이 말은 민강(岷江)에 사는 용신이었는데 수시로 바람을 불어 풍랑을 일으켰다. 그래서 이랑신은 이 용신을 굴복시켜 자신의 용마로 삼았다고 한다. 지금도 민강 주변에서는 복용관(伏龍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3.

산서평순(山西平順) 통천협(通天峽)

 

태원으로 가는 고속도에서 내려 조금만 가면 통천협이다. 중국 산시성(山西省·산서성), 이 곳이 산서평순 천척산 국가지질공원(山西平順 天脊山 國家地質公園)으로 지정된 곳이다.

매표소 입구에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아웃도어 매장도 있다. 통천협은 한국 여행사에서 개발한 곳이란다.

 

중화인민공화국 국토자원부(中華人民共和國 國土資源部)라고 적힌 표지 석 뒤로 통천협(通天峽) 방문객을 열렬하게 환영(熱烈歡迎)한다는 전광판을 단 새로 단장한 넓은 방문객 대기실이 있다. 아직도 공사중이라 한산하다.

 

미니 셔틀버스를 타고 통천협곡 관광지구 천계삭도(通天峽 景區 天界索道) 승차장까지 10여분 올라가는 길엔 멋진 계곡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통천협 맛보기 이다. 하늘과 통하는 곳이 이곳이 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올라 가야하며, 펼쳐질 하늘의 선경이 궁금해진다.

산중에서 경사가 50도나 되는 중국에서 가장 경사가 심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전망대로 향하는 도중에 위에서 내려다보는 통천협 협곡은 대단하다.

 

산정휴게소(능공객잔)에서 조금 더 가니 정말로 비경이 발아래 펼쳐진다. 내가 선 여기가 하늘이다. 능선 계단길(천가)을 힘들게 걸어서 하늘의 끝(천노대)까지 가본다.

그래도 하늘의 끝이 아니다. 하산 길은 케이블카를 타지 말고 걸어서 내려간다. 그게 정말 멋진 계곡을 볼 수 있다. 내려가는 중간 중간엔 간이 좌판 매점이 있다.

뭐든 사먹지 않을 수 없다. 3~40분이면 걸어서 케이블 승차장까지 갈 수 있고 거기서 다시 미니 셔틀 버스를 타고 입구까지 내려갈 수 있다.



4.

임주시(林州市)도화곡(桃花谷)

 

태항대협곡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도화곡(桃花谷)태항산 관광의 백미이다.

태항산대협곡 중 중국 허난성(河南省) 임주시(林州市) 내에 자리하며 남태항산의 일부에 속한다.

태항천로(환산선)와 왕상암과 함께 3대 주요관광지중 하나로 폭포와 맑은 담이 조화를 이뤄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도화곡(桃花谷)은 엄동설한에도 복숭아 꽃이 핀다해서 이름이 유래하며, 수억만년전에 지질형성 중에 유수의 침식으로 인해 홍암석이 씻겨 나타난 깊은 골짜기이다.

협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며 연못과 폭포를 형성하고 있어 한폭의 산수화를 보는 느낌이들 정도이다.

골짜기를 따라 도화촌 마을까지 40여분 동안 이어지는 트레킹은 계곡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비경을 보여준다.

 

도화촌 마을에 도착하면 태항산 환산선을 둘러 볼 수 있는 셔틀버스가 기다린다. 버스를 타고 태항산 산허리를 돌고 돌아 1시간 가량 가는 동안 태항산 대협곡을 감상할 수 있다. 가는 길엔 원주민 마을 들이 가끔씩 있고, 전망대가 있어 정차해 계곡의 웅장함을 맛 볼 수 있다.

환산선의 끝은 왕상암까지이다.



5.

중국 허난성(河南省) 임주시(林州市) 태항천로(太行天路:환산선)

 

중국 허난성(河南省) 임주시(林州市)에는 도화곡과 태항천로(환산선)이 있다.

도화곡 풍경구를 모두 지나면 도화촌에서 태항천로 관광버스 환승역에서 태항천로(Taihang Skyroad) 미니셔틀 버스를 탄다. 도화곡에서 왕상암으로 이어지는 절벽길을 태항천로(太行天路)라고 하는데 우리는 태항산 환산선이라고 한다.

 

천로 입구에서 릉운랑(凌云廊)”, “천경(天境)”, “평보청운유리잔도(平步靑云琉璃棧道: Glass Skywalkway)”, “몽환지곡(夢幻之谷)”을 지나면 태행천로종점(太行天路終点)에 닿는다.

그 길이가 약 25에 이른다. 이곳에서 왕상암 풍경구로 내려 갈 수 있는 실린더 계단(통제:筒梯: Cylinder Stair)을 볼 수 있다.

도화촌에서 버스를 타고 절벽 위로 난 아슬아슬한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데 덜컹거릴 때마다 버스에서 떨어 질 것 같다.

 

해발 1000m 위에 난 구불구불한 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셔틀버스는 운전기사의 운전 솜씨도 스릴을 더한다. 바깥을 쳐다보기 조금 겁나기도 하지만 조금만 용기를 낸다면 평생 보기 힘든 아찔한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대협곡에 집을 짓고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도 인상적이다.

 

가히 태항산 위로 난 길이라 해서 태항천로라 부를 만 하다. 도중에 버스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면, 거대한 협곡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유리 스카이워크 전망대에서 보는 스릴도 느낄 수 있다.

벼랑에서 걷는 기분을 체험할 수 있는 스카이워크는 약 10m 길이 강화유리로 만들어져 있어 그 위를 걸을 수 있다. 까마득히 보이는 발아래 풍경을 보고 있자니 한발 한발 내 딛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타이항산 대협곡이 주는 특별한 체험을 놓치기에는 아쉬워 용기를 내어 걸어본다.

 

태항산천로 종점에 다 달으면 또 다른 경치가 눈앞을 가로 막는다. 바로 왕상암으로 가는 절벽이다.

왕상암으로 내려가는 곳에서 만나게 되는 초록색 철제실린더계단(통제)도 놀랍다. 높이 88의 절벽에 붙어 있는 원형 사다리 계단인 통제는 공포를 이겨내고 깎아지른 절벽을 수직으로 내려오는 스릴과 쾌감을 즐길 수 있다.

깎아지른 듯 한 절벽에 잔도를 만들어 가는 길목엔, 아찔하게 세워진 옥황각이 절벽에 붙어 있다. 절경이다.



6.

중국 허난성(河南省) 임주시(林州市) 남태항산(南太行山) 왕상암(王相岩)

 

중국 허난성(河南省) 임주시(林州市) 남태항산(南太行山) 왕상암풍경구(王相岩風景區)에 있는 왕상암(王相岩)3300년 전(기원전 1600) 왕 무정(武丁)과 재상 부열(傅說)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유서 깊은 곳이다.

험준한 산세의 깊은 골짜기에 형성되어 있는 좁은 협곡 사이를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코스로 절벽에 수직으로 세워진 계단인 마천통제(摩天茼梯: Cylinder Stair, 실린더계단)가 유명하다.

 

부운정에서 왕상암으로 걸어서 내려가 본다. 아찔한 경사도를 자랑하는 계단이라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스릴은 만점이다.

옥황각을 지나 조금은 완만한 길을 거치면 이 코스의 최고 난이도 나선형 계단이 나타난다. 수직계단이라 어지러움을 느낄 수도 있는 만큼 체력과 담력을 요구한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한 걸음씩 내려간다면 우공이산의 교훈처럼 성공적으로 왕상암까지 하산할 수 있다.

 

이곳 관광은 왕상암에서 환산선으로 위로 올라오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환산선 셔틀버스에서 내려 부운정부터 왕상암까지 걸어서 내려간다.

이런 길이 중국이니까 가능한 것인지, 신선들은 이쯤이야 별 것 아닌지, 아무튼 태항산은 여러 가지로 놀랍고 아찔함을 준다.

 

환산선 종점에서 계단의 끝에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절벽에 첫 번째 건물을 만난다. 두 개의 옥황각(玉皇閣)이다. 둘 중의 하나는 부속건물인 듯하다.

이곳에서 잠깐 서서 한 숨쉬고, 앞을 보면 천애의 낭떠러지와 아래에는 광대한 협곡이 끝없이 펼쳐지고, 나아갈 방향에는 절벽 중간쯤에 파란 기둥을 휘어 감고 있는 나선형 동체 계단이 위용을 뽐내고 서있다.

 

계속 걷는다. 낭떠러지 바위 사이를 뚫어서 사람 하나 허리를 굽히고 지나갈 수 있는 잔도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잔도 옆 가드레일 사이로 보이는 전경은 아름답지만 그 곳으로 눈을 돌릴 수가 없을 정도로 아찔하다.

잔도는 바닥만 울퉁불퉁한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바위 옆도 날카롭게 들쑥날쑥하여 자칫 허리를 펴거나 넘어지면 큰일이 날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도 볼 수 있는 고통을 덜어 주는 서낭당이 있다. 바위 층 사이에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꽂아 두었는데, 허리아픔의 고통을 덜하게 해 준다는 샤머니즘이다.

 

바위 잔도(棧道)를 따라 한참을 가면 설마 했던 하늘을 만질 수 있는 통, 마천통제(摩天茼梯: 실린더 계단) 앞에 이른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순간 가슴이 덜컹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 이곳을 통과하느냐, 마느냐는 선택할 여지가 없다. 내려가야 한다.

 

앞에 나타난 나선형 계단 앞에서는 얘기 소리가 요란하지만 나선형 계단으로 내려서면 누구나 잠잠하다. 그 누구도 무서워서 앞만 바라보고 빙글거리며 돌고 돌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나무로 만든 바닥이 깨어지고 닳아서 곧 무너질 것 같다.

그러나 아래로는 아름다운 절경이 손짓한다. 그리고 멀리 지나온 절벽 사이로 우리가 지나왔던 바위길 잔도가 실뱀처럼 늘어졌다.

 

마천통제(摩天茼梯)88m326개의 계단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오르내리는 계단이다. 왜 하필 나선형이고, 탑높이는 88m 일까?

 

아래 내려선 왕상암 계곡은 다른 곳과는 달리 푸른 나무들이 울창하여 하늘을 보기 어렵다. 앙천지(仰天池), 월궁동(月宮洞), 무정교(武丁橋)를 지나 왕상촌(王相村)에서 다시 뒤를 돌아보면 장엄한 바위 사이로 마천통제가 통체로 모습을 보인다.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내려온 암벽바위에 거북이 바위가 보인다. 물에 있어야 할 거북이가 엉금엉금 하늘을 기어간다. 선계(仙界)에서는 하늘과 바다의 분별이 없다. 모두가 한곳에 있다.

 

발에 노예의 족쇄를 찬 부열(傅說)의 동(銅像) 앞에 서서 그의 얘기를 생각한다.

 

<무정과 부열의 이야기>

부열은 공자보다 약 800년 전의 상()나라 재상으로 중국의 첫 번째 성인(聖人)이다.

기원전 1600년경에는 상()으로 시작했지만 기원전 13세기경에는 국호를 은()이라고 바꾼다.

 

()나라는 갑골문자를 만들었다. 그 후 은()나라의 성탕(成湯)에서 무정(武丁)까지는 스무 명의 천자가 있었고 여러 번 천도를 하였다.

무정(武丁)이 왕이 되면서 밤낮으로 은상(殷商)을 부흥 시킬 것을 꿈꾸었지만 그를 보필할 사람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무정이 꿈속에서 한 성인을 만나서, 그를 찾으니 부험(傅險)에 사는 노예 부열(傅說)이었다.

부열은 신분이 비록 미천하지만 도()를 닦으며 큰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

무정은 재상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부열과 더불어 무정중흥(武丁中興) 시대를 펼치면서 가장 번성했던 은()나라를 이루었다.

 

이곳이 바로 옛날의 무정과 부열이 만나서 서로 문()과 무()를 나누고, 부열이 노예의 신분으로 왕의 재상이 되어서 왕상암(王相岩)이라 부른 곳이다.

 

부열의 이야기는 묵자여씨춘추에 기록 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부열이 무정에게 간하는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첫째, 나무는 줄자와 먹에 따라서 자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은 간언하는 말을 잘 듣고 행동하면 성인이 된다.

둘째, 세상에 전해지는 유명한 말은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다.

셋째, 임금과 신하는 함께 노력해야 한다.

부열의 간언이 어찌 옛날 만의 이야기겠는가, 오늘날에도 버릴 것이 없는 귀한 교훈이다.

 

왕상암이란 글씨가 새긴 커다란 바위를 지나칠 수 없어 넓은 광장에서 왕상암을 뒤돌아 바라본다.

왕상암이 저녁 햇살에 늘어선 바위들과 함께 부드럽게 빛난다. 이래서 왕상암을 좋은 명당이라 하나보다.

왕상암으로 오르고 내리는 계단이 아득히 바라보인다.



7.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석가장 정딩(正定) 조운묘(趙云廟)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정딩(正定)에 있는 문묘로 상승장군(常勝將軍, 항상 승리하는 장군)으로 불렸던, 삼국시대의 명장 조운(赵云)의 문묘이다.

현재의 묘는 1996, 본래의 터에 중건한 것이다. 총 면적은 1500이며 명청(明淸) 시대의 고건축 구조를 모방하였다.

주요 건축물로 먀오먼(庙门), 쓰이뎬(四义殿), 우후뎬(五虎殿), 쥔천뎬(君臣殿), 순핑허우뎬(顺平侯殿) 등이 있다.

 

조운(赵云) 그는 누구인가? 조운((赵云 ? ~ 229)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자는 자룡(子龍)이다. 관우(關羽), 장비(張飛), 황충(黃忠), 마초(馬超)와 더불어 오호대장군으로 불렸다.

 

촉의 오호대장군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 있었다. 기산전투에서 조예군에 목숨을 잃긴 했지만 제갈량의 출사표로 유명한 촉의 북벌의 일등공신이다.

 

조운은 본래 상산 출신이며 창술가 집안의 외아들이 였다. 본래 공손찬의 부하였지만 원소에게 의탁하던 유비의 눈에 띄어서 유비가 의형제들과 여남으로 가게 되면서 조운도 합류하게 된다. [공손찬군은 패망]

 

신야성에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했을 때 남하하는 조인군을 물리칠 때 숫적으로 불리했지만 조운의 활약으로 물리친 전과도 있다.

 

장판파전투 때는 유비의 감부인은 구하지 못했지만, 아들인 유선을 조조의 대군 속에 들어가서 찾아온 대단한 무장이다.

 

촉의 역사에 있어서 촉의 흥 = 자룡의 합류. 촉의 망 = 자룡의 죽음 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조운의 합류로 여남에 자리 잡고 있던 유비군이 유표에게 몸을 의탁할 당시 채모의 암살계획을 막은 것도 그렇지만 상승장군[항상 이기는 장군] 이라고 불리우는 조운의 이름이 적벽에서 붙혀 졌다.

 

적벽 하면 제갈량 조조 방통 주유만 생각하지만 삼국지를 유심히 보면 조조군 패 한 후에 추격할 때 조운이 조인 조홍 허저 등등 위의 5대 무장들을 모두 다 격파했다.

 

북벌당시 기산에서 조예군에 패망하여 조운이 죽고 나서 북벌은 실패하고 그 뒤로 몇 차례 더 북벌을 시도 했으나 장안성까지 밀렸던 적은 조운이 대장군 이름으로 출격했던 전투 뿐이었고 그 뒤론 계속 막혔고 유명한 제갈량이 직접 이끌고 간 오장원에서도 끝내 제갈량의 죽음과 함께 패하고 말았다.

 

삼국을 제패한 것은 위는 아니지만 위에서 파생된 진인데, 보통 삼국지 무장이나 지장들을 신으로 추앙하는 것으로 봤을 때 보통 촉의 장수들을 추앙하는 것이 중국 사람들이다. 관우 조운 제갈량 등.

 

조운고리(趙云故里: 순평후 조운이 태어나 자란곳)

팔각정비석: 순평후조운고리(順平侯趙云故里: 순평후 조운이 태어나 자란곳)

조자룡음마조(趙子龍飮馬槽: 조자룡이 말의 물을 먹이던 우물)

사의전(四義殿: 결의형제(유비, 관우, 장비)는 세 명이 했지만, 나중에 조자룡이 합류하여 네 명이 형제처럼 지냈다 하여 사의전)

거신전(居臣殿: 유비가 앉자있고, 조운이 관우, 장비보다 한발 앞서 서있다.

순평후전 : 22962세 나이로 병사한 조운은 261년에 대장군 순평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래서 조운을 모시고 있는 사당에는 순평후전이라고 걸려 있다.



8.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석가장(石家庄) 정딩(正定) 개원사(開元寺)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석가장(石家庄) 정딩(正定)에 있는 사찰로, ()나라 개원26(AD738) 현종(玄宗)의 칙명(勅命)에 의하여 주요도시 각지에 세워졌던 국영사(國營寺) 중 하나이다.

 

기존(旣存)의 용흥사(龍興寺)나 대운사(大雲寺) 등을 개명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대규모의 사찰이 새로 세워졌다.

송대(宋代) 이후로는 개명 된 경우도 있고, 건축물은 모두 개축되었으나 옛 모습을 지닌 큰 사찰도 적지 않게 남아있다(역현(易縣)정정(正定), 천주(泉州)소주(蘇州)정현(正縣)).

 

경내에 있는 개원사탑 (開元寺塔)은 전탑(塼塔이다.

수미탑(須彌塔) · 수미전탑(塼須彌塔) · 전탑(塼塔)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때 건립된 밀첨식(密檐式) 탑으로, 개원사 종루(鐘樓)의 서쪽 옆에 있다.

모두 벽돌로 쌓아올렸고, 기단부는 평면 사각형이다. 탑신은 높이 1.5m의 네모난 석대(石臺) 위에 올려져 있다.

 

1층 탑신은 비교적 높고, 처마가 인접한 밀첨식 구조로 모두 13개의 처마가 있다. 탑의 전체 높이는 48m이다.

탑의 내부는 비어 있으나 안에서 탑 위로 올라갈 수는 없다. 1층의 남쪽에만 문을 설치하였고, 2층부터는 문과 창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탑의 기단부 모서리에는 천왕역사(天王力士)를 묘사한 작은 석각상이 있는데, 당나라의 건축기법이 그대로 구현되어 있다. 1956년 성급(省級)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9.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석가장(石家庄) 정딩(正定) 융흥사(隆兴寺)

 

융흥사는 허베이성(河北省·하북성) 스자좡시(石家庄市) 정딩현(正定縣)에 있는 사찰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절 중 하나로 무려 1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중국의 역사와 함께 한 중국대표 사찰로 봐도 손색이 없다.

고찰 융흥사는 송, , , 청에 이르기까지 옛 불교문화와 건축이 잘 보존된 곳이며 특히 송나라 시대의 아름다운 건축으로 유명하며 청대에는 황실 사찰이기도 했다.

중 국 10대 이름난 사원 중 하나이며 중국 내 보존이 잘 된 대표적인 불교사원이다.

 

수나라 개황6(586)에 용장사(龍藏寺)로 창건된 사찰은 송나라에 이르러 그 규모가 거대해졌으며, 이후 원. . 청나라를 거치면서 가람 중수가 이뤄졌고, 청나라 강희4591706)에 지금의 사명인 륭흥사(隆興寺. )로 사찰 명칭이 바뀌었는데,

거대한 청동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저 있어 대불사(大佛寺)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며, 융흥사라는 가람 명칭은 청나라 강희45(1706) 강희황제가 융흥사라는 편액을 하사하면서부터이다.

 

융흥사의 가람 배치는 남북 중심축에 주요 법당을, 중심축 좌우로 요사와 정원을 조성하여 놓았다.

사찰 입구에는 석교가 있고, 천왕문, 대각육사전(大覺六師殿), 마니전(摩尼殿), 계단(戒壇), 우측에 자씨각(慈氏閣), 좌측에 전륜장각(轉輪藏閣), 좌측에 강희어비정(康熙禦碑亭), 우측에 건륭어비정(乾隆禦碑亭), 관세음보살입상을 모신 대비각(大悲閣), 대비각 우측에 어서루(御書樓), 북쪽에 미타전 등 주요 건축물이 배치되어 있다.

중국은 관광지를 최하위 A 등급부터 AAAAA등급까지 나누는데 융흥사는 AAAA등급이다. 높은 점수이며 그 만큼 문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방문객 수가 많다는 것을 증명한다.

 

<대비각>

대비각은 융흥사에서 가장 유명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을 모셔둔 곳으로 유명하다.

관세음보살상의 실제 높이는 20m가 넘으며, 42개의 팔에 법기를 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송대(宋代)에 만들어진 <천수천안관음상>으로 이 상은 구리로 주조한 <천수천안관음상千手千眼觀音像>이며, 태원(太原)의 숭선사(崇善寺) 대비전(大悲殿) 안에 있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연간에 만들어진 <목조천수천안관음상木造千手千眼觀音像> 등은 중국의 대표적인 유물인데, 일반적으로 명, 청대(明淸代)에 다시 수리되고 채색되었다.

 

<동전 투입구>

동전을 던져서 엽전의 구멍의 종에 맞추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연못 안 구멍에 동전 넣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