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사(普門寺)
양양낙산사와 금산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도량이다.(여수 향일암)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이 곳에 와서 절을 창건하였는데,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산의 이름을 낙가산이라고 하였고,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하여 절의 이름을 보문사라고 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로서, 우리 나라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이다.
창건주 회정은 누구인가? 그가 여기까지 온 연유는,
낙가산에서 바라다 보이는 바다. 물이 빠진 갯벌 저만치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 몇개가 서해의 한낮을 지키고 있었다.
회정은 오늘도 관음기도를 하고 있었다. 작은 암자에 홀로 기거하며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천수천안의 대비행을 배우고자 이 산마루에 묻혀 지낸지도 어느덧 10년 세월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세월과는 상관 없이 기도는 한결 같았다. 회정은 아스라히 금강산을 생각했다. 그리고 보덕각시를 생각했다.
꿈같은 일들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무관세음보살 …" 그는 원래 금강산에서 수행을 했었다. 치솟은 바위 자락에 단칸 움막을 짓고 관음보살의 원행을 온몸으로 배우고 실천 할 것을 원력 세우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소원은 관세음보살님을 꼭 한 번 친견하는 것이었다. 백일기도 천일기도를 번갈아 가며 하고 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꿈을 꾸었다. 한 노파를 만나는 꿈. 그리고 그 노파가 들려 준 생생한 이야기.
그는 꿈속에서 비를 맞으며 바닷가 염전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폭우 속 등대처럼 만나 소금막에서 그 노파는 물었다. "왠 스님이 이렇게 비를 맞으며 다니시우." "금강산의 회정이라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만나고자 …"
"이런 곳에서 찾으면 되는가? 강원도 양구땅에 가서 ‘몰골옹’을 만나 ‘해명방’ 노인의 안부를 물어야지." "여기는 어디입니까" "여기? 어디긴 어디야. 낙가산이지." 생각할수록 신기한 꿈이었다.
또렷한 노파의 이야기와 그 이름들. 낙가산이라면 관세음보살이 머무시는 산이 아닌가. 회정은 그 꿈이 혹 관세음보살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일 수도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끝자락에서 이미 그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 등짐 하나에 지팡이 하나. 그는 물어 물어 양구 땅을 찾았고 우연히 만난 노인이 바로 몰골옹이었다.
몇날을 걸은 피로를 짊어져야 했던 석양녘, 양구의 험준한 산자락 어느 초가에서 만났던 몰골옹은 깡마른 체구와는 달리 유연하고 그윽한 눈매로 다감한 느낌을 주었다.
"저물었는데 어딜 그렇게 가십니까." "아, 예. 사람을 좀 찾고 있습니다." "누구를?" "몰골옹이라면 아실지 모릅니다만." "남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지요."
이렇게 만난 몰골옹은 회정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글쎄 해명방을 만나면, 관음을 친견하는 일도 성취가 되긴 할 테지만 그 법음(法音)을 들을 수는 있을런지 …"라며 말끝을 흐렸다.
회정은 관음을 친견할 수 있다는 말에 흥분되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만나기만 한다면 법음을 들을 수는 있을 것"이라 장담하며 그 길을 가르쳐 달라고 어린 아이처럼 졸랐다.
몰골옹이 가르쳐 준 길은 험했다. 산을 넘고 계곡을 돌아 한참을 간 곳에서 회정은 조촐한 숯막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숯막에는 나이 든 노인이 열여덟 살이나 되었음직한 어여쁜 딸 하나와 살고 있었다. 회정이 먼저 만난 사람은 딸이었다.
"소승은 금강산에서 온 회정이라 합니다. 해명방 어른을 만나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산너머에서 만난 몰골옹께서 이리로 안내하셨지요." "해명방, 그분은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이렇게 만난 해명방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싶다는 회정의 말을 듣고 의외의 서약을 강요했다.
"모든 일을 내가 시키는 대로 복종할 것을 약속해라." "네. 분부 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대성을 친견할 때까지 나를 부모 모시듯 시봉할 것이며 또 내 딸과 결혼을 하여 살아라."
회정은 어이가 없었다. 노인을 시봉하는 일이야 할 수 있었지만 어떻게 출가남자에게 결혼을 요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 분부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관음을 친견하고자 하는 절절한 소망과 그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에 서있는 자신의 현재를 생각하면 파계는 이미 파계가 아닐 수 있었다. 회정은 숯막 일을 거들었고 해명방의 딸 보덕각시와 부부가 되어 살았다.
천만다행이었다. 보덕각시는 여자구실을 못했으므로 여념집의 부부와는 달랐다. 서로눈빛으로 부부 였을뿐 애욕의 그늘로 빠져 들지는 않았다.
그런 세월로 3년. 회정은 금강산에서 3년 기도를 한 뒤 꿈을 꾸고 여기까지 왔었는데 여기서 다시 3년이 지난 것이었다.
"아, 허망하도다. 이제 기도는 뒷전이고 숯일 만하고 또 보덕과 부부의 인연을 맺었으니 나는 참으로 기구하도다. 한낱 꿈을 믿고 너무 많은 것을 던져버린 것은 아닐까."
지난 세월을 더듬으며 회정은 후회스런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산을 내려가기로 헸다.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가 기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뒤도 돌아보지않으며 그간의 세월을 잊어버리고자 했다. 돌아가는 길은 찾아왔던 길 그대로였다.
그 길에서 회정은 다시 몰골옹을 만났다. "그래 관음대성은 친견 하셨는가?" "친견은 커녕, 죽도록 일만 했습니다. 거기에 파계까지 해야 했고 …" 회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벼락이 쳤다. 몰골옹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에잇, 미련하고 어리석은 놈아. 3년이나 대성을 모시고도 만나지 못했다니. 내 뭐라더냐. 만날 수는 있어도 법음은 못들을 것이라 하지 않았더냐.
해명방은 문수대성이고 네 색시 보덕은 관음대성이다. 이 몸은 문수의 도반 보현이고.."
회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겁지겁 돌아가보니 숯막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돌아온 몰골옹의 집도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 3년 세월이 통채로 꿈속에 갇혀 있었던 것인가. 회정은 금강산과 양구 땅에서의 기막힌 경험을 뒤로하고 꿈속에서 들었던 낙가산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정착한 곳이 서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 바로 석모도였다. 그는 이 산의 이름을 낙가산이라 부르고 다시 관음보살을 친견할 것을 서원했다. 절 이름도 보문사라 짓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635년(선덕여왕 4)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
회정이 지난 날을 회상하며 다시금 기도정진력을 가다듬고 있는 한 낮에 어부한 사람이 찾아 왔다.
635년(선덕여왕 4)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고 들고 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스님, 돌 부처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어부는 전날 한 자 남짓의 돌불상 스물 두 개를 그물로 건져 올렸다.
고기가 아닌 돌불상이었으므로 그는 바다에 다시 던지고 다른 곳에서 그물질을 했다.
또 그 돌불상들이 올라와 다시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왜 성인들을 바다에 버리느냐. 그 분들은 서역에서 오신 나한님들이다.
내일 다시 건져 낙가산 길지에 잘 모셔라."라고 말했다. 과연 그는 다시 돌불상을 건져 올렸고 낙가산을 오르다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 '여기가 그 길지인가'라 생각했는데 그곳이 바로 회정이 기도하는 움막 근처의 석굴 앞이었다.
회정은 어부와 함께 석굴로 들어갔다. 석굴안에는 불상을 모시기 좋게 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스물두 나한상을 모시고 나니 굴 가득 서기가 어렸다.
"이 관음도량을 지키고 복락을 베풀 위해 나한님들이 오신 것이 분명하다." 회정은 솟구치는 감격과 환희심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낙가산 보문사는 이렇게 천수천안 관음의 온기와 나한님들의 선선한 가피복락이 서려 있는 도량으로 피어올랐다.
금강산 보덕굴(普德窟)에서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회정(懷正)은 이곳 석실에 불상을 모셨다.
가운데 좌상은 석가모니불, 좌보처는 미륵보살, 우보처는 제화갈라보살이었고, 나머지는 19나한상과 송자관음보살(23상)과 관세음보살(후에 조성)이다.(총 24분)
회정은 이 24존 중 삼존불과 관세음보살과 19나한은 굴속에 모시고 특별이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에 모셨다.
보문사의 전설들은 '불씨 얻어 온 나한님' 등 수두룩하다. 낙가산 보문사는 그 신앙적 배경만큼이나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에서 얘기한 석굴법당에 나한님이 모셔진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고려 왕실에서 시주한 옥등을 어린 사미가 깨어 버렸는데 두 조각이 났던 등잔이 감쪽 같이 붙어 걱정하던 사미가 나한님들의 가피에 감복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또 흉년의 굶주림을 참지 못한 한 사람이 도둑이 되어 석굴법당에 들어와 촛대며 향로 등 물건을 훔쳤다.
그는 훔친 물건을 한자루 등에 짊어지고 도망쳤다. 밤새 달리고 또 달렸는데 아침에 보니 그는 석굴법당 앞을 맴돌고 있었다.
나한님의 위대한 신통력에 감복된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착하게 살아갈 것을 발원했다고 한다.
100여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동짓날 아침 공양주가 팥죽을 쑤기 위해 아궁이를 헤쳐 보니 불씨가 다 죽어 있었다.
장등불도 꺼졌고 절에는 어느 곳에도 불씨가 없었다. 공양주는 가슴이 콱 막혔다.
동짓날 부처님께 공양 올릴 팥죽을 못 쑤다니, 대중 스님들에게 혼날 일도 걱정이지만 불보살님께 죄송한 마음에 조바심을 쳤다.
하는 수없이 석굴법당에 들어가 잘못을 뉘우쳤다. 그리고 터덜터덜 돌아온 공양간, 왠일인가, 아궁이에서는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우선은 팥죽을 쑤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나한님이 아이로 화현해 아랫마을에서 불씨를 얻어 왔음을 공양주는 나중에 알게 됐다.
또 다른 깨어진 옥등잔 전설로,
옛날에, 보문사의 어린 사미승이 부처님께 등공양을 하기 위해 법당에 들어갔다. 나한전에는 보문사에 전해내려오는 귀중한 보물인 옥등잔이 있었는데, 사미승은 옥등잔에 기름을 부으러 가는 것이다.
사미승은 옥등잔을 내리고, 등잔에 기름을 붓다가 실수로 등잔을 떨어뜨리게 된다. 떨어진 옥등잔은 두조각이 나게 되고, 사미승은 혼비백산하여 법당을 빠져나와 구석에 주저앉아 훌쩍이게 된다.
마침 지나던 노스님이 사미승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슨일인지 물어보자, 사미승은 옥등잔을 깨게 된 일을말하게 된다.
사미승과 노스님은 깨진 옥등잔이 있는 나한전으로 들어갔는데, 두동강난 옥등잔은 멀쩡히 불빛만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노스님은 옥등잔을 자세히 살펴 보았지만, 깨진 흔적조차 없이 멀쩡하였다. 이에 노스님은 "이것은 분명 나한의 신통력 때문이로다" 하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의 역사는 사찰의 격에 비하여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조선시대 후기부터의 역사만이 전해지고 있다. 1812년(순조 12)에는 이 절의 승려들이 홍봉장(洪鳳章)의 도움을 받아 중건하였고, 1867년(고종 4)에는 경산(京山)이 석굴 안에 처마를 이어 나한전을 건조하였으며, 1893년(고종 30)에는 명성왕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하였다.
1911년 일제가 30본·말사를 제정하면서 전등사 말사가 되었다. 1918년에 대원(大圓)이 관음전을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주지 배선주(裵善周)가 객실 7칸을 새로 지었으며, 1935년에는 나한전을 중창하였다. 그 뒤 관음전을 중건하고 대범종을 조성하였으며, 1976년 범종각과 요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관음전·대방(大房)·종각·석실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석실 굴 안에는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석굴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을 설치하였고, 동굴 안에는 반원형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撐柱)를 설치하였으며, 탱주 사이에 21개 소의 감실이 있어 석불을 안치하였다.
이 밖에 이 절에는 마애석불좌상과 천인대(千人臺)가 있다.
마애석불좌상은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승려인 이화응(李華應)이 보문사 주지 배선주와 함께 조각한 것으로, 높이 9.2m, 폭 3.3m이다. 석불좌상의 상부에는 거대한 눈썹바위가 있고, 좌측에는 비명(碑銘)이 있으며, 불상 앞에는 소규모의 석등이 있다. 이 석불과 석굴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또 천인대는 길이 40m, 폭 5m의 큰 바위이다. 이 절의 창건 당시 서역(西域)의 고승이 이 천인대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 뒤 이 바위는 법회 때 설법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바위 위에 1,000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여 천인대라고 명명하였다. 1994년 10월 대한불교조계종 직영 사찰이 되었다
◇보문사의 극락보전(아미타전)
극락전 혹은 극락보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시는 아미타부처님과 그 협시보살들을 모신 법당이다.
사찰에 따라서 미타전, 아미타전, 무량수전, 수광전이라고도 하는데, 일부사찰의 경우에는 극락전이 사찰의 주된 전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극락보전의 부처님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부처님과 그분의 협시보살로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혹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진다.
일찍이 아미타부처님이 법장비구로 수행하던 시절에 그 유명한 48대원을 세워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건설하셨다고 한다.
그때 세웠던 서원에 따라 누구나 일념으로 ‘아미타불’이란 명호만을 불러도 극락에 왕생시켜 괴로움을 물리치고 불도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대자대비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아미타불신앙은 예로부터 사후신앙과 관련하여 서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아 왔다.
따라서 전국의 사찰에는 아미타부처님이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많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부처님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거나 미타정인(九品印)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수인을 하고 계신다.
극락보전, 극락전의 후불탱화에는 주존이 설법인이나 미타정인을 취한 아미타부처님이며 좌우 협시보살로서 관세음보살(바라보아 우측)과 대세지보살(바라보아 좌측), 혹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배치된다.
그런데 아미타불탱화는 석가모니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의 주존상과 협시보살만 다를 뿐 대웅전의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통례이다.
왜냐하면 아미타신앙은 『정토 3부경』에 의한 신앙인데, 이 경전들을 설하신 분이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이고 듣는 이가 『법화경』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중이기 때문이다.
현재 보문사 아미타불은 하품중생인 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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