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사(淨水寺)
인천광역시 강화군(江華郡) 화도면(華道面) 사기리. 마니산(摩尼山)에 있는 절(032-937-3611).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본래 이름은 정수사(精修寺)로, 639년(신라 선덕여왕 8) 회정대사(懷正大師)가 창건하였다.
석모도 낙가산 보문사의 회정선사가 마니산 참선단을 배관(拜觀)한 뒤 그 동쪽 기슭에 앞이 훤히 트이고 밝은 땅을 보고 불제자가 가히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정수(精修)할 곳이라 하면서 사찰을 짓고 정수사라 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 1426년(세종 8) 함허화상(涵虛和尙)이 중건할 때,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정수사(精修寺)에서 정수사(淨水寺)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정수사에는 대웅보전과 삼성각이 있다. 법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집이며, 훗날 달아낸 1칸은 툇간(退間)으로 되어 청판(廳板)을 깔고 있다. 현존하는 중요문화재로는 아미타불을 비롯한 불상 4위와 탱화 7점, 부도(浮屠;사리탑) 1기 등이 있다.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모니불(다른 곳과 색다르게 선정삼매의 자세)과 관음보살좌상(괴로울 때 중생이 그의 이름을 외면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내리고, 해탈하게 해 준다고 함)
지장보살좌상(저승에 있는 이들에게 특히 도움을 준다고 하는 보살), 또 별도의 대세지보살좌상(서방 극락세계에 있는 지혜 및 광명이 으뜸인 보살)이 관음보살 옆에 밀려난 듯이 앉아 있다. 왜 그럴까? 이런 식으로 보살을 모신 사찰은 아직은 없다.
그리고 삼성각(三聖閣)에는 산신탱화( 산신도는 산의 신령으로 존경하다가 마침내는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여기게 된 호랑이를 통해 불교의 토착화를 꾀하기 위해서 그린 그림. 백발이 성성한 신선이 그려지는 데 이때 호랑이의 변화신인 신선(神仙)이 가운데에 큼직하게 그려지고 진짜 호랑이의 모습은 애교 있고 무섭지 않게 그려짐),
독성탱화(독성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으로 독성은 석가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수도하면서 부처님 열반 뒤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아라한이다. 따라서 보통은 갖가지 과일이 열린 천태산을 배경으로 늙은 비구가 석장(錫杖)을 짚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칠성탱화(칠성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칠성을 말한 신으로, 주로 자손의 수명장수를 발원했던 칠성신앙은 한국불교 신앙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경우의 하나)
가 있고 100m 쯤 떨어진 동편 언덕에는 부도인 함허대사 승탑이 있다.
대웅보전 외벽에는 현재 편액 4점이 달려 있는 데 1848년(헌종 14)기년명의 “보탑중수기” “정수사불상개금후불칠성독성산신탱화기” 시주기 2개“ 이다.
대웅보전 전면의 문 중앙에 사분합문(四分閤門)이 있는 데 그 조각이 마치 요술단지 꽃병에서 소담스러운 목단(양쪽 두장)과 연꽃(중앙 두장)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듯 화려하고 아름답다.
잘 조각된 목단과 연꽃 줄기들이 창살의 역할을 하고 있고, 꽃병은 청자와 진사도자기로 네 개의 꽃병 문양이 다르다. 다양성을 추구한 결과다. 마당으로 내려서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생화를 꽂은 것처럼 곱고 화려하다.
가운데 한 칸 문에만 이렇게 화려하게 장식했을 뿐 양쪽 두 칸 문은 격자형의 소박한 창호문이다. 세 칸 모두 꽃장식을 했다면 이 건물과의 조화가 어떠했을까를 생각게 한다. 옛 선인들은 이렇듯 문 창살 하나에도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았다.
여기 오기 바로 전에 함허동천 수련야영장을 지나 왔을 텐데, 그 이름을 딴 법난 극복의 스님 함허당은 누구일까? 함허당기화(涵虛堂己和) 스님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출가했던 시대는 고려왕조와 조선왕조가 교체되던 고려말인 우왕 2년(1376녀) 이었다.
충청도 중원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수이(守伊)’이고 출가 후 법명은 ‘기화(己和)이다. 스님이 주로 있었던 자모산에서는 당호를 함허당이라 했다. 부도가 이곳 정수사에 있고 절 앞의 계곡은 스님의 당호를 빌어 함허동천계곡이라 하니 곳곳에 스님의 얼이 베어 있다.
<각시바위 얘기>
고려말 원나라 승려이자 한림학사였던 한 스님(閣氏)이 함허 기화 스님과 함께 이곳 정수사에서 도를 닦고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자 그의 부인이 바다를 건너 이 곳에 찾아와 함께 돌아 갈 것을 애원했지만,
이 스님은 해돋이와 낙조를 함께 볼 수 있는 이곳, 선정삼매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이 곳에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니, 그 부인은 남편 없는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님을 항상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바다에 투신하였다.
빠져죽은 곳에 바위하나가 생겨났으니 그 바위가 지금 절 앞 극포(極浦) 앞바다에 세칭 각씨암(閣氏巖)이 바로 그 것이다.
지금도 삼성각 앞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각씨암이 외로이 떠있어 이 정수사를 지키고 있다. 어쩌면 삼성각에서는 용왕신도 함께 모시고 있는 셈이다.
정수사 대웅보전에는 대청마루가 있고, 지붕위 용마루에 다른 여느 사찰처럼 청기와를 한 개가 아니고 네 개를 올려놓았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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