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령포(淸泠浦)
청령포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머물던 곳으로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있다(1457년 6월)
앞으로는 서강(西江)이 휘감아 돌고 뒤로는 톱날 같은 봉우리 여섯 개가 삐죽 솟아 육륙봉(六六峯)이라고 부르는 도산(刀山)이 곧추 서있어 아무리 둘러봐도 빠져나갈 곳이 없다. 다만 공간이 넓다 뿐이지 외부와 차단된 것은 위리안치(圍籬安置) 정도가 아니라 가극(加棘)안치보다 더 혹독한 유배지라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겼다. 단종은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기기 전까지 두어 달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워낙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종이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했다고 전한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그곳에 살았음을 말해 주는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와 어가,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 외인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 영조가 세웠다는 금표비(禁標碑)가 있다.
그리고, 관음송(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소나무의 갈라진 사이에 걸터앉아서 쉬었다는 전설이 있고,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고[觀], 오열하는 소리[音]를 들었다는 뜻에서 관음송이라 불렀다고 한다)과 울창한 소나무 숲 등이 남아 있다. 단종은 그해 10월 관풍헌에서 17살의 어린나이에 숨졌다.
2. 장릉(莊陵)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의 무덤.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후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수습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하였다.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다가 1541년(중종 36)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어 묘역을 정비하였고,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으로 추복되었으며,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정해졌다.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석물 또한 단출하다.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그 아랫단에 사각형 장명등과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이 있으나 무인석은 없다.
묘가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配食壇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정려비,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 정자각·홍살문·재실·정자(배견정 拜鵑亭) 등이 있다.
왕릉에 사당·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장릉뿐인데 이는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은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 장판옥(藏版屋)
장판옥(藏版屋)은 정조 15년에 건립된 곳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186인, 환관군노위 44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 배식단(配食壇)
장릉의 홍살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곳인데 , 이 곳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 어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한식 때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다.
☆ 영천(靈泉)
영천은 장릉 서쪽에 있는 우물로써 정조 15년(1791년)에 어명으로 박팽년의 후손인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한 우물로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 때 제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 때에는 조금식 샘물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 때 제향을 지낼 때에는 물이 많이 용출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1.5m 정도이며 하부는 화강석 돌담으로 둥글게 쌓여 있고 상부는 정방형이다.
☆ 단종비각(端宗碑閣)
1698(숙종24년)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하고 영조 9년에 비각과 수복실, 정자각을 세웠다.
비석전면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라 쓰여있다.
☆ 정자각(丁字閣)
장릉 정자각(丁字閣)은 영조 9년(1733년)에 건립한 건물로 단종대왕(端宗大王) 제향(祭享)시 제물을 차리는 곳으로 집의 모양이 한자의 정(丁)자와 같다하여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부른다.
정자각은 참도의 끝에 정중앙에 세워져 있고 능에서 정자각은 제향을 올리는 건물인데 묘와는 달리 능에서는 묘앞에서 제향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정자각에서 제향을 봉행한다.
장릉의 형태는 다른 조선의 왕릉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만 묘역이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한 까닭에 정자각과 묘역의 위치가 어긋나 있고 정자각에서 묘역으로 바로 오르는 길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
☆ 신도(神道)와 왕로(王路)
왕릉에 가면 신도(神道)와 왕로(王路)가 있는데, 신도는 신위가 지나가는 길이고, 왕로는 임금이 가는 길이라 한다.
☆ 수복실(守僕室)
능(陵)과 경내(境內)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는 곳으로 영조9년(1733) 정자각(丁字閣)과 함께 세운 것이다.
☆ 엄흥도 정여각(嚴興道 旌閭閣) : 이 비각은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충신 엄흥도가 영월 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 24일 숙부 세조의 명에 의해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단종의 당시 나이는 17세. 그 옥체가 강물에 던져지자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동을지산(冬乙支山, 지금의 장릉)에 암장한 엄흥도를 충신으로 추도하여 세운 비각이다.
☆ 제실(齋室)
제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제사음식 장만, 음복 등을 지내는 곳이다.
☆ 낙촌
낙촌은 박충원의 호로서 중종36년(1541년) 영월군수로 부임하여 꿈에 단종묘를 찾아 수습하고 제사를 올린 내용의 자적이 기록되어 있다. 1973년 4월 박충원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3. 관풍헌(觀風軒)
장릉과는 좀 떨어져 시내에 있다. 관풍헌은 1392년(태조1)에 건립된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로 지방 수령들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건물이다. 세조2년(1456) 6월 28일,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홍수 때문에 이곳으로 옮겨와 머물던 중에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과 공생(貢生) 화득(禍得)의 교살에 의해 1457년 10월 24일 사사된 곳이다.
단종은 관풍헌에 머물며 인근의 자규루에 올라 자규사(子規詞)와 자규시(子規時)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관풍헌 객사 정문을 백운루(白雲樓) 또는 관풍루(觀風樓)라고 부른다.
관풍헌과 인연이 있는 인물이 김삿갓인데 이곳에서 치러진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으나 시제에서 지탄한 선천부사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임을 알고 난 후 자책과 통한을 못이겨 삿갓 쓰고 방랑길에 나서게 되었다.
☆ 자규루(子規樓) : 영월읍 중심가인 관풍헌의 남동쪽에 있는 누각이다. 자규루는 관풍헌과 더불어 옛 객사 근처의 건물로, 관풍헌에서 동쪽으로 약 7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자규루)은 태조 1년(1392)에 객사와 함께 건립되었다. 세종 때(1431) 영월군수 신권근(申權近)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 하였다.
청령포에서 두 달 동안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이 관풍헌으로 어소를 옮긴 후 이 누각에 올라 그 유명한 자규시를 남겼다. 이 누각은 선조 38년(1605) 호우로 유실되었으며, 정조 15년(1791) 강원도 감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중건하여 자규루라 하였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 /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 피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 어찌하여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밝은고”
◎ 단종의 유배길(4개월) - 고운 님 여의옵고
1457년 6월 22일, 단종(1441~1457)은 첨지인 어득해(魚得海)와 군자정(軍資正) 김자행(金自行)과 내시부사(內侍府事) 홍득경(洪得敬), 그리고 군사 50명의 호송 아래 한양 뚝섬 살곶이 다리를 건너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머나먼 유배길에 오른다.
남한강 물길을 거슬러 배가 닿은 곳은 이포나루. 여주의 어수정에서 잠시 목을 축인 단종은 여기서부터 뭍길로 영월 땅을 향한다.
원주 싸리치를 넘어 청령포에 이르는 길은 고개마다 단종의 피눈물이 스민다. 노산군으로 강등당한 단종이 올랐다 하여 군등치(君登峙), 슬픔으로 서산에 지는 해를 향해 절을 한 배일치(拜日峙)며, 마침내 참았던 눈물처럼 소나기가 흩뿌리는 소나기재를 넘는다.
소나기재 마루에서 바위가 갈라진 선돌 사이로 바라보는 서강 물은 참으로 무심하다. 그 물은 청령포의 발치를 적신 후 이내 동강 물과 만나 남한강이 되어 흐른다. 남한강 물은 다시 북한강 물과 만나 한강으로 흐른다. 하지만 시간은 물길처럼 되돌릴 길이 없어 끝내 유배의 포구에 다다르고야 만다.
3면이 강물로 둘러싸이고 남은 한 면마저 험한 절벽으로 막힌 청령포는 오롯이 유배를 위해서 태어난 땅이다. 나어린 단종은 그나마 해질 무렵 서쪽 낭떠러지에 올라 아득한 한양 땅을 그리워했다는 것이니, 이른바 ‘노산대’다. 솔숲 사이에 우뚝한 ‘관음송(觀音松)’은 또 어떤가. 이 땅에서 가장 키가 크다는 이 소나무는 단종의 슬픈 사연을 보고 들었으니 관음송이다.
그러나 단종은 청령포에서 마저 두어 달 정도로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 해 여름 홍수가 나자 읍내 동헌인 관풍헌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겨울을 나기로 했으나 금성대군에 의한 복위사건으로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었으며, 끊임없이 자살을 강요 당한다.
청령포를 떠난 단종은 읍내의 관풍헌(觀風軒)에 머물렀으며 위에 읊은 시는 후에 자규루라고 불린 관풍헌 곁의 매죽루(梅竹樓)에 올라 지은 것이다. 또한 사(詞)도 한편 지었는데 자규사이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밝은고”
이 시는 자규사시(子規詞詩)이다. 궁중에서 나온 한 마리 원통한 새는 자규, 곧 두견새를 일컬으며 단종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저 애달플 뿐 어찌 내가 그 옛날 단종의 마음을 헤아리겠는가.
단종이 관풍헌에 머무는 동안 지었다는 ‘자규시(子規詩)’는 절절하지만, 그 마음을 받아 이름 붙여진 자규루는 지금도 소슬하다.
그러나 그해 10월24일, 단종은 사약을 받고 승하하고 말았으니 그날의 기록은 ‘연려실기술’의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금성(金城)의 옥사와 단종의 별세’ 조에 자세하게 남았는데 다음과 같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금부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으로 단종의 목에 감아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은 문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단종은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동강에 버려진 단종을 따라 시녀와 시종들은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단종은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한 후 동강에 버려졌고, 뒤이어 그를 모시던 시녀들이 강물로 뛰어드니 동강 물은 잠시 잠깐 낙화유수가 된다. 그때의 일을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전한다.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옥 같은 열 손가락이 수면 위에 떠 있었다.”
세조의 명을 받아 단종에게 먹일 사약을 가지고 왔던 금부도사 왕방연은 어명을 받들고 돌아가는 길에 물가에 앉아 긴 울음을 운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그렇게 왕이 되었건 만 왕이 아닌 단종으로 죽음의 길을 갔고, 왕이 아닌 왕인 방연(왕방연)은 삶의 길로 돌아왔다.
후환을 두려워한 탓에 거두는 이 없이 떠돌던 단종의 주검은 한밤중 영월 호장 엄홍도에 의해 몰래 옮겨져 산기슭에 묻혔다. 그 무덤이 바로 장릉이다.
그리고 또 한밤중에 망주석을 빠져나온 단종의 혼은 동강 어라연으로 가 신선이 되려다 그곳 물고기들의 만류로 태백산으로 가 산신령이 되었다. 아니, 되었다고 전한다.
그 전설은 이제껏 사람들의 가슴에 어떤 염원으로 남아있다. 아무래도 사람은 산 자보다 죽은 자의 靈을 더 믿는 모양이다. 이의 전설의 흔적이 장릉 옆 보덕사에 남아 있다.
<참고>
1. 김삿갓 (1807∼1863)
본이름은 김병연(金炳淵)이며, 삿갓을 쓰고 방랑 생활을 했기 때문에 흔히 김싯갓이라고 불리움
2. 가정 배경
① 1807년(순조7년) 경기도 양주에서 김안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② 다섯 살 되던 해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펑안도 선천 부사로 있던 할아버지(김익순)가 반란군과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여 역적의 집안이 되어 멸족의 화를 입기에 이름
③ 후에 정상이 참작되어 벌이 감해지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자식들이 멸시받는 것이 싫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신분을 감추고 삶
④ 나이 어린 김삿갓은 자기 집안의 사정을 모르고 자람
3. 뛰어난 재능
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살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에 통달하였고, 글재주 특히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남
② 방랑 생활을 하면서 사회 풍자와 해학이 담긴 시를 많이 지음
4. 방랑의 계기
① 20세 되던 해에 영월 고을에서 실시된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함
② 그 때의 시제(詩題)가 "가산 군수 정시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 보아라." 였는데, 그는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백 번을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경멸하는 시를 쓰게 됨
③ 이후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역적의 자손이며,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생활을 하게 됨
5. 계속된 방랑 생활
① 방랑 생활 4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1년 정도 묵기도 했으나, 다시 집을 떠남
② 한 번은 충청도 계룡산 밑까지 찾아온 아들을 재워 놓고 도망하였고, 1년 만에 물어 물어 경상도 어느 산촌까지 찾아온 아들을 심부름을 보낸 후 도망을 함
③ 계속된 방랑 생활로 몸이 쇠약해져, 전라도 화순의 어느 선비 집에서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침. 3년 후 영월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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