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국 사찰 & 함께 가고 싶은 곳
여행-경북

청송 주왕산. 대전사

by phd100 2021. 10. 14.

 

 

 

주왕산(周王山)

주왕산 국립공원은 해발720m로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에 소재하고 있다.

높이 721m이다. 석병산(石屛山)·주방산(周房山)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3대 암산의 하나로 1972년 5월30일 관광지로 지정된 후 1976년 3월 30일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공원의 총면적은 105,582 ㎢로 행정구역상 청송군과 영덕군의 2개 군 5개 면에 걸쳐있다.

기암절벽과 폭포가 많아 자연경관이 빼어난데, 특히 주왕암과 별바위에 이르는 13㎞의 숲이 유명하다.

 

☆ 주왕산에 얽힌 전설

중국 당나라 덕종12년에 당나라 왕손인 주도(周鍍)가 진(晋)나라의 회복을 꿈꾸며 군사 1만명을 이끌고 후주천왕(後周天王)을 자칭하고 반기를 들고 수도 장안을 공격하던 중 곽의자(郭儀子)에 패하게 되자 요동을 거쳐 신라 땅에 도망을 왔다고 한다.

그 후 강원도 지역을 거쳐 진성(眞城)(지금의 진보면-청송 교도소가 있는 곳)땅에 다다른 주왕은 석병산(石屛山)이 매우 험하고 깊다는 말에 따라 이곳에 숨어 주민들의 식량을 약탈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게 되자 신라왕은 마일성(馬一聲) 장군과 그의 5형제들에게 토벌을 명하니 주왕은 기암(旗岩)에 기(旗)를 꽂고 마(馬)씨 형제들과 싸웠으나 크게 패하자 주왕굴에 숨었다가 최후를 마쳤다.

그에게 대전(大典)이라는 아들과 백련(百蓮)이라는 딸이 있어서 현재 주왕산에는 대전사와 백련암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 되었다.

 

☆ 수달래 이야기

음력4~5월에 주방천을 따라 흐트러지게 피어있는 수달래를 볼 수 있다. 주왕산에 숨어든 주왕이 주왕굴에서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숨질 때 흘린 피가 주방천을 흐르고 이듬해부터 꽃이 피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수달래가 있다.

주왕산의 4대 명물로 주방천에 피는 수달래, 산정의 반석위에 자라는 회양목, 바위를 덮고 있는 천년이끼, 송이버섯을 꼽는데 수달래가 첫 번째로 꼽힌다.

수달래는 진달래와 비슷하나 더 진한 편이며 특이한 것은 꽃잎 하나하나에 20여개의 검붉은 반점이 있다.

소금강으로 불릴 만큼 웅장한 산세와 절경을 자랑하는 주왕산의 5월은 주방천(周房川) 계곡을 따 라 수달래(水丹花)가 불붙듯 피어나면서 빼어난 풍광을 빚어낸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수달래를 주왕산에 얽힌 슬픈 전설의 주인공인 주왕(周王)의 화신이라고들 이야기 한다.

 

☆ 명소:

주왕산의 주요 명소로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한 고찰 대전사(大典寺)를 비롯해 주왕의 딸 백련공주의 이름을 딴 백련암(白蓮庵), 청학과 백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학소대(鶴巢臺), 앞으로 넘어질 듯 솟아오른 급수대(汲水臺), 주왕과 마장군이 격전을 치렀다는 기암(旗巖), 주왕의 아들과 딸이 달 구경을 했다는 망월대(望月臺), 동해가 바라다 보이는 왕거암, 주왕이 숨어 살다가 죽었다는 주왕굴(周王窟) 등이 꼽힌다.

그밖에 조약돌을 왼손에 들고 다리 사이로 던져 그 위에 얹히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아들바위는 전설 덕분에 얼마나 돌 세례를 받았는지 껍질이 다 벗겨져 속살이 하얗게 드러나 있기도 하고, 또 자하성(紫霞城:일명 주방산성)·무장굴(武藏窟)·연화굴(蓮花窟) 등의 명소가 있다.

 

30여 곳의 명소와 여러 명승지를 가진 주왕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한국제일의 금강산과 닮았다하여 소금강이라 이름을 얻기도 했다. 특히 희귀식물로 속리산에서 천연기념물 207호로 지정된 망개나무군락이 제1폭포와 제2폭포 사이에 서식하고 있다.

 

주왕산은 바위 병풍을 펼친 듯 하다하여 석병산(石屛山), 옛 부터 난리가 날 때마다 이곳에 피난 온 사람들이 많고 선유선사들이 이곳에 살았다 하여 대둔산(大遁山), 신라왕족인 김주원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여 주방산(周放山)으로 불리다가 그 후 고려 때 나옹스님이 주왕의 전설 때문에 주왕산(周王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기암(旗岩)

정상에 올라 보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하는 봉우리다. 정상의 넓이는 70여 평의 평지로 노송 몇 그루가 있다. 옛날의 전설에 따르면 이 기암 위에 묘를 쓰면 큰 인물이 난다 하여 누군가 부친을 암매장 했더니 그해는 비가 한방울도 오지 않는 가뭄으로 상의동(上宜洞)에 큰 흉년이 들어 이상히 여긴 동리 사람들이 정상에 올라 암장한 묘를 발견하여 그 묘를 파헤치니, 그 후 년부터의 날씨는 순조로웠다 전해진다. 그 후 가뭄이 연속되면 동네 사람들은 이 기암에 올라가서 확인을 했다 한다.

기암 절벽 중심부에는 바위가 일부 떨어져 나갔는데 여기에 얽힌 전설로는 주왕이 마장군 형제와 일전을 벌일 때 바위에 이엉을 둘러 쌀뜨물을 계곡으로 계속 흘러 보냄으로 많은 곡식과 많은 군사가 있는 것처럼 마장군의 눈을 속였고 그때 마장군이 쏜 화살이 바위에 맞아 일부가 떨어졌다 전해진다.

 

 

청송 땅을 밟기 전까지 그곳은 지독한 유배지로나 기억되는 곳이었다.

‘오지게’ 먼 곳이었고 도시인이 먹고 살만한 것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것 같은 막막한 촌으로만 생각되었다. 이 땅에 한군데뿐이라는 ‘보호감호소’라는 이름은 갈 곳 없는 막다른 인생의 종착지요, 온갖 흉악범들이 모여 세상을 향해 이를 뿌득뿌득 가는 깜깜한 소굴이라는 선입견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청송을 떠올릴 때 기억되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주왕산이었다. 앞선 생각 때문인지 이 땅의 다른 산처럼 유산객으로 붐벼 탁한 계류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맑디맑은 투명함이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맑고 투명함이란 대자연의 위대함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탁한 선입견에서 출발한 오지의 이미지라서 푸른 소나무의 땅 청송(靑松)의 발음은 이상하게도 서글피 들렸다.

십여 년 전 늦봄 주왕산을 처음 찾았을 때 산문 앞마을은 여느 촌에서 느낄 수 있는 순수함과 다르지 않았다. 대전사 발치의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다보면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해가 저물도록 평상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맑은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러다 훌러덩 옷을 벗고 수달래 꽃잎이 흘러가는 주방천에 풍덩 몸을 담가도 부끄럽지 않을 곳이 주왕산이었다.

반도의 끝 다대포 몰운대에서 시작한 봄은 낙동정맥의 산줄기를 따라 북상하다 푸른 소나무의 고장 청송에 닿아 긴 숨을 고른다. 청송의 산림은 강원도 산골짜기의 빽빽한 원시림보다는 덜하지만 공기의 신선함은 전국에서 제일이라고 한다.

지명 그대로 숲의 대부분을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어 그렇다는데, 청송은 곧 낙동정맥의 허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이었던 청송은 옛 이름이 청기현(靑己縣)이었다가 조선 세조에 들어와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예부터 ‘푸를 청’자로 이어 내려오는 고장의 지명을 땅위에 펼쳐 보여주는 곳이 곧 주왕산이다.

경북 청송군과 영덕군에 걸쳐있는 주왕산(720.6m)은 1976년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주왕산이라는 이름은 신라 말부터 그렇게 불렸는데 그 전에는 바위가 병풍을 두른 듯 하다해서 석병산(石屛山)이라는 이름이었다. 산 이름이 바뀐데 에는 무언가 큰 사건이 있었을 법한데, 사람들은 주왕산의 이름을 중국의 주왕에서 찾는다.

산명이 된 주왕은 중국 진나라때 벼슬을 지낸 주도라는 사람으로, 진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자 스스로를 후주천왕이라고 부르며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반역을 일으켰다고 한다. 하지만 쿠테타가 수포로 돌아가자 군사를 끌고 몸을 피해 이곳 청송땅까지 쫓겨 왔다는 것이다. 빨치산처럼 산으로 숨어든 주왕은 산문이 되는 주방천 협곡에 산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하여 재기를 꿈꿨지만 당나라의 청을 받은 신라의 토벌대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주왕산 곳곳에 남아있는, 주왕의 이름을 딴 유적은 그것이 정말 사실이기라도 하듯 생명력 있게 다가온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주왕산의 전설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주왕산의 이름이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토종 우리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청송 향토사학자 김규봉씨의 <주왕사적의 연구>에서는 주왕산이 신라 말 155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혼란한 사회 속에서 억울하게 왕권을 빼앗긴 김주원과 이에 반역을 일으킨 김헌창, 그의 아들 김범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김헌창은 국호를 장안(長安)으로 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으나 신라의 군대에 쫓겨 주왕산에서 최후를 맞고 김범문은 주방산성 싸움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전국을 떠돌며 수도하다가 113세로 눈을 감는다.

서기 920년 낭공대사가 쓴 <주왕사적>이라는 비기(秘記)에 기록되어 있는 주왕산의 전설이 ‘주왕산 토종설’을 뒷받침 해준다. 비기란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 오기도 했는데, 실존 인물인 김범문의 제자였던 낭공대사는 김헌창의 난을 중국의 이야기로 꾸며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던 혁명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비기는 낭공대사의 유언에 따라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그가 죽은 지 114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드러났는데 이미 신라는 망하고 고려가 융성하던 시기였다. “너는 살아나가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라”며 총을 들고 도청을 지키던 어린 고등학생을 밖으로 내보냈던 우리 현대사처럼 그 시대에도 바로 말할 수 없었던 ‘5월 광주’가 있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누구나 주왕산을 주왕산이라 부르지만 옛 문헌을 찾아보면 꼭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청송은 세종대왕의 아내였던 소헌왕후의 고향이라서 주왕산은 조선시대에 청송 심씨의 선산으로 지정되었다. 국가 최고 권력자의 고향땅이 반란자의 이름에서 기원했다는 전설은 그들에게 마음편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나라에서 펴낸 지리서에는 주왕산의 이름을 피해 주방산(周房山) 또는 대둔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주왕산의 이름을 개명하려는 노력을 해왔다지만 민간에서는 줄곧 주왕산으로만 불러왔다. 전설이 사실 여부를 떠나 와전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 해도 주왕산 전설은 어떤 권력으로 감추려 한들 다 덮지 못할 충분한 역사성과 생동감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5월 그날’이 조간신문에 폭동으로 실렸어도 아무도 믿지 않았던 것처럼.

주왕산 국립공원 안에는 지금도 사람이 산다.

내원마을과 너구마을이 그것이다. 둘 다 성처럼 둘러싸인 바위봉우리의 안쪽에 있어 철제 난간과 콘크리트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협곡에 걸쳐놓은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야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옛 마을사람들은 그곳에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소가 필요했다. 하지만 조금만 큰 비가 오면 떠내려 갈 정도로 작은 나무다리로 이어진 길은 소가 지나갈 수가 없어서 송아지를 지게에 지고 마을로 들어갔다가 소가 늙으면 그 안에서 도살해서 고기가 되어서야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태풍 루사 이후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가 놓인 너구마을은 길을 새로 닦아 이제 소가 아니라 자동차가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지만 내원마을에는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너구마을 들머리에는 주왕산의 명물인 달기약수가 줄지어 뿜어 나온다. 탄산이 섞여 독특한 맛을 내는 달기약수는 단순한 물이 아니라 영천(靈川)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5월이면 제사를 지낼 정도로 사람들에게 신령스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사람과 질긴 연을 지닌 주왕산에 마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무렵이라고 한다. 한반도를 만주를 할퀴고 있는 호랑이의 모양으로 그려보았을 때 호랑이의 골반에 해당하는 주왕산은 그래서 모성의 산으로 불려왔다.

그 모성이란 다름 아닌 어머니와 같은 포근함을 간직한 산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부스러지기 쉬운 안산암으로 이루어져 자연굴이 많은 것도 주왕산의 모성을 뒷받침 해준다.

주왕이 최후를 맞았다는 주왕굴, 군사의 무기창고였다는 무장굴 등 크고 작은 굴이 간직한 전설이 아니라도 그곳은 뭇짐승들의 안식처와 보금자리로 제 역할을 해왔다.

천혜의 보금자리는 나라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요새처럼 은신하기 쉬워 많은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도 했다. 피난 온 사람들이 난리가 끝나고 나서 눌러앉은 것이 시작이 되어 주왕산은 더욱 사람과 뗄 수 없는 산이 되었다.

한때 160가구가 넘는 사람들이 계곡마다 흩어져 살며 화전을 일구고 농사를 짓다가 일제시대에는 그 안에 목탄공장이 들어설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해발 1000m가 안되는 높지 않은 산에 목탄공장을 세운 까닭은 주왕산의 울창한 수림 때문이다. 조선시대 청송 심씨의 선산으로 특혜를 받으며 관리되던 주왕산이 조선왕조의 몰락과 함께 수난을 겪게 된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의 사냥대상이 된 것은 참나무였다. 주왕산이 조선총독부가 관장하는 국유림으로 지정되면서 전쟁물자조달을 위해 참나무를 베어 껍질은 코르크를 만들고 나무로는 목탄을 만들었다.

목탄공장의 규모는 상당해서 이 공장에서 일을 하면 일제의 강제징용을 면제받을 수 있어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나서 참나무 벌채는 줄었지만 울창한 원시림은 볼 길이 없어졌다. 이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까지도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하고 벌목해서 원목을 생산하는 영림사업이 주왕산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지금 산길을 걷다가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 소나무의 빗살무늬 흉터는 이때 생긴 것들이다. 해가 뜰 무렵이면 온 산이 소나무의 붉은 껍질에서 반사된 황금색으로 빛나고 해질 무렵에는 솔잎에서 은빛 광채가 나왔다고 옛 글에 전하는 푸른 소나무의 산 주왕산이 그 이름과 다르게 변할 뻔했던 일이다. 하지만 당시 주왕산의 산림가치가 청송군의 1년 예산을 훨씬 웃돌았다고 하니 사람과 자연이란 서로 어떻게 상생해야 하는 것인지 그 해답이란 명쾌히 결론내리기가 쉽지 않다.

주왕산의 벌채사업이 사그라지면서 자연히 산에 살던 사람들도 일자리를 찾아 외지로 떠났다. 1970년대부터 전국의 산간오지에 소개령이 내려지며 떠나는 사람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영덕 바닷가에서 가까워 냉전시대에 무장공비의 거점이 될 가능성이 큰 주왕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다시 숲이 우거지고 야생동물이 돌아와 지금의 주왕산은 그 청정한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숲 천이단계의 마지막이라는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어 가장 안정적인 야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주왕산에는 둥근잎꿩의비름, 망개나무, 솔나리와 같은 보호종을 비롯해 678종의 식물이 사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최근에는 수달의 배설물도 발견되어 버들치가 사는 1급수의 맑은 계곡은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은 자연보호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 맑고 투명한 주왕산에 최근 다시 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다. 대전사 경내에 들어서면 여느 절에서 볼 수 있는 만수무강을 비는 기와불사가 아니라 주왕산 입구 관광지 개발을 반대하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주왕산을 찾은 사람은 40만 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그 숫자는 3년 새 7만여 명이나 증가한 것인데,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무대가 된 주왕산 내의 주산지도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한다.

가을이면 관광버스에 실려 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어 주차를 하지 못해 돌아간 사람만도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자본은 이를 그대로 방치할 리가 없어 주왕산은 매일 숙박시설과 주차장을 건설하는 중장비의 소음에 시달리고 있다.

완벽한 주차시설과 안락한 침대가 있는 여관이 생겨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수만 명쯤 더 늘어난다면 청송은 어느새 오지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섧은 이름을 조금씩 벗어 갈 테지만 소나무의 굵은 흉터가 원래대로 메워지거나 달기약수의 톡 쏘는 맛이 갑자기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 있다면 점점 더 그 수가 줄어드는 붉은 수달래와 주왕의 슬픈 전설 같을 것이요, 어느새 용전천 낙동강 따라 흘러가는 꽃잎처럼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일.

새나라 고려 건국을 2년 앞두고 눈을 감은 김범문은 <주왕사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비결이 세월이 멀어지고 사람들 재주 또한 줄어들게 되면 전하고 받는 것이 가히 일만분의 일도 안 될 것이므로 마음이 늘 쓸쓸하다…’

누가 우리 시대의 낭공대사가 되어 오늘 주왕산의 역사를 숨죽여 비기에 적어 묻을 텐가.

 

대전사 (大典寺)

경북 청송군 부동면 주왕산(周王山)에 있는 사찰.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고 신라로 건너와 주왕산에 숨었다. 이에 당나라가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부탁하자 마일성 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의 무리를 죽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이라 하고, 절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절 이름은 나옹화상 혜근(惠勤)이 붙였다고 한다. 또한 신라의 주원왕(周元王)이 수도했던 산이라서 주왕산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절 오른쪽 밭에는 우물을 메운 자리가 남아 있는데, 이 우물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본래 이 절에서는 부처에게 올리는 물을 매일 냇가까지 가서 길어오곤 하였다. 이를 귀찮게 여긴 승려들이 조선 중기에 앞뜰에 우물을 파고 그 물을 길어서 청수(淸水)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곧 불이 나서 전각이 불에 타고 말았다.

뒷날 한 도사가 와서 불이 난 이유를 설명하기를, 이 절의 지세는 배가 바다에 떠서 다니는 부선형(浮船形)인데 우물을 판 것은 마치 배 바닥에 구멍을 낸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다시 우물을 메웠다 한다. 이밖에 노루가 우물에 빠져 죽은 뒤 메웠다는 설도 있고, 이 물을 마신 승려들의 힘이 넘쳐 난폭해지는 바람에 인근 주민들의 원성이 많아지자 메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 대전사(大典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672년(신라 문무왕 12) 의상(義湘)이 세웠다는 설과 919년(고려 태조 2)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절이 있는 산과 절의 이름은 주왕의 설화에서 유래한다.

 

《주왕내기(周王內記)》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고 신라로 건너와 주왕산에 숨었다. 이에 당나라가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부탁하자 마일성 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의 무리를 죽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이라 하고, 절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절 이름은 나옹화상 혜근(惠勤)이 붙였다고 한다. 또한 신라의 주원왕(周元王)이 수도했던 산이라서 주왕산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창건 이후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에 불에 탄 것을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과 주왕암(周王庵)이 있다.

 

이 중 백련암은 주왕의 딸 이름에서 유래하며, 옛날에는 이 암자에 큰 종이 걸려 있어 아침 저녁으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하나 지금은 걸려 있지 않다. 주왕암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주방사로 추정되며, 나한전과 가학루·산령각 등이 남아 있다.

 

주요 건물로는 보광전(普光殿)과 명부전·산령각·요사채 등이, 유물로는 보광전 앞 삼층석탑과 사적비·부도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보광전은 정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李如松)이 유정에게 보냈다는 친필 서신을 목판으로 음각한 것이 보관되어 있다. 보광전 앞의 석탑은 근처에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짜맞춘 것이다.

 

절 오른쪽 밭에는 우물을 메운 자리가 남아 있는데, 이 우물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본래 이 절에서는 부처에게 올리는 물을 매일 냇가까지 가서 길어오곤 하였다. 이를 귀찮게 여긴 승려들이 조선 중기에 앞뜰에 우물을 파고 그 물을 길어서 청수(淸水)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곧 불이 나서 전각이 불에 타고 말았다.

 

뒷날 한 도사가 와서 불이 난 이유를 설명하기를, 이 절의 지세는 배가 바다에 떠서 다니는 부선형(浮船形)인데 우물을 판 것은 마치 배 바닥에 구멍을 낸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다시 우물을 메웠다 한다. 이밖에 노루가 우물에 빠져 죽은 뒤 메웠다는 설도 있고, 이 물을 마신 승려들의 힘이 넘쳐 난폭해지는 바람에 인근 주민들의 원성이 많아지자 메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행-경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항 구룡포문화의 거리  (0) 2021.10.14
포항 구룡포공원  (0) 2021.10.14
청송 주산지  (0) 2021.10.14
청송 송소고택  (0) 2021.10.14
청송 백석탄  (0) 2021.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