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제2부
신륵사(神勒寺)
신륵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 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부터이다. 1379년(우왕 5) 각신·각주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나옹의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지금은 대장각비 만 있음)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 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 1858년(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중수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보물 제180호)·명부전·심검당·적묵당·노전(爐殿)·칠성각·종각·구룡루(九龍樓)·시왕전 등이 있다.
또한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 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일찍이 옛 시인 이규보가 읊은 여강은 지금도 여주의 넓은 평야를 누비며 너그러운 굴곡으로 아름답게 흐르고 있다.
여강은 여주 지역을 흐르는 남한강을 일컫는 말로, 신륵사는 여강이 감싸 도는 봉미산 자락, 그중에서도 풍광이 가장 뛰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옛 절은 대부분 깊은 산속에 있지만 신륵사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강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절이다.
특히 산과 강이 절묘한 경치를 이루어 예로부터 이규보, 이색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머물렀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지었다고 전해지지만, 고려 말에 유림의 탄압(회암사 문수법회로 인한 민심 우려; 나옹화상 편 참조)으로 밀양 영원사로 향하던 나옹선사가 신륵사에 이르러 돌연 입적했는데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명찰로 급부상했다. 이 때에 더욱 신륵사가 널리 알려져, 사찰 창건도 나옹화상이 하셨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일주문이 있는 입구에서 여강 줄기를 따라 백여 미터를 걸으면 사찰 경내에 다다른다.
쪽빛 강물이 옆에 있으니 사찰의 고즈넉한 정취를 즐기기에 더욱 안성맞춤이다.
한국의 절을 보면 대부분 산에 있거나, 또 물이 있더라도 계곡 옆에 있는데 이렇게 큰 물줄기 옆에 절이 차지한 것이 많지가 않다.
신륵사는 역사가 담겨 있는 절이다. 그래서 역사가 담겨 있으니까 그에 따른 문화재도 여기저기 많이 존재하고 있다.
편안하게 와서 마음도 내려놓고 또 역사 속에 거닐면서 스님들의 향기도 좀 접할 수 있는 힐링의 사찰이다.
1. 신륵사 범종각
먼저 눈에 띄는 사찰 건물이 범종각이다. 눈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이 아닌, 들리는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천지 사방을 깨우는 사찰의 종소리일 것이다. 여주 팔경의 으뜸인 신륵사 종소리가 바로 이곳 범종각에서 울려 퍼진다.
범종은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 번뇌로부터 벗어나, 올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는 깊은 뜻이 있다.
여주 팔경 중에 하나가 옛부터 신륵사의 범종소리였다. 신륵사의 범종 소리가 남한강 변에 은은하게 펴지며 그 소리가 신륵사 가까이에 있는 세종대왕 영릉까진 울려 퍼졌다고 한다.
신륵사의 범종각은 몇십 년 전에 새로 신축된 것이기는 하지만 옛부터 전해져 오던 법고와 목어와 운판이 함께 걸려 있다.
특히 범종을 보면, 범종각 안에 본종을 달기 위해서 또 별도의 네 군데에다가 기둥을 세워서 그 위로 가로질러 기둥을 세운 다음에 본종을 매달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범종각이라 하면 범종만 있는 게 아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뭇 중생들에게 알리기 위한 네 가지 법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범종, 그 다음에 법고 그리고 운판, 목어이다.
범종은 지옥 중생부터 하늘 중생까지 계도화하기 위해서 울려퍼지는 법구(法具)이고, 법고(法鼓)는 소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하면서 축생(畜生)들을 제도(濟度)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법구이다.
그리고 운판(雲板)은 구름 모양처럼 생겼기 때문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중생들을 계도(啓導)하기 위해서 울리게 되는 법구이다. 목어(木魚)는 물고기 모양인 것처럼 수중 중생들을 계도하기 위해서 울리게 되는 법구이다.
2. 구룡루
경내로 들어서면 웅장하면서도 특색 있는 하나의 건축물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신륵사의 구룡루다.
구룡루는 사방이 트여 있고 남한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서 있어 사찰로 진입하는 통로의 기능보다는 정자의 역할에 더 충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효 스님이 이 신륵사를 창건하실 때 연못을 메워서 불사를 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원효 스님께서 7일 동안 기도를 드렸더니 연못에서 9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고 난 뒤 불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와 관련해서 “구룡”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 신륵사의 누각인 구룡루는 여타의 누각과 좀 다르게 보통은 “사람의 키높이” 만큼의 높이로 된 기둥으로 된 누각들로, 누각 밑으로 해서 중심 법당으로 걸어서 들어가게 돼 있는데,(이것은 조선시대 건립된 누각의 경우가 그렇다. 그 이유는 지방 관리들이 말을 타고 사찰 본당까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누각 기둥을 낮게 했다)
그런데 이 신륵사의 경우는 누각 기둥이 사람 키높이 보다 낮아, 밑으로 들어서 중심 법당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고 좌우로 통해서 중심 법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누각 좌우로 들어가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면 평지이면서 산지형 가람(보통 입구 누각은 본당 보다 낮게 조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공간적인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않은가 생각이 든다.
대들보나 처마 밑에는 다양한 그림으로 단층이 그려져 있다. 그 그림을 보면 비천상이나 그리고 용 그리고 이 남한강변을 그린 듯한 강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곳의 피어나는 다양한 꽃들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그 누각 자체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으나 강변에 위치한 관계로 단층이 다소 바래진 모습을 보이면서 고풍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게 또 하나의 특징이다.
누각에 올라 여강변(驪江邊)을 보고 있노라면 고즈넉하면서 여유로운 경치가 한눈에 보인다. 고요히 흐르는 물 위에 마음속 번뇌(煩惱)와 시름을 띄워 보낸다.
신륵사의 가람 배치는 이 구룡루를 중심으로 안, 밖으로 나눠질 수가 있는데, 구룡루를 오기 전에 산문(山門)을 지났었고, 그다음에 이 구룡루를 바라보아 오른쪽으로 보면 다층 전탑과 그리고 강월헌과 삼층석탑이 있어, 강가에 위치한 강호(江湖)지역이 되겠고, 구룡루를 중심으로 미음자 형태로 전각이 배치되어 있다.
구룡루에서 보면 안쪽이 신륵사의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이고, 좌우로 신검당과 정묵당으로, 스님들의 수행 공간인 요사채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정묵당 뒤쪽으로 조사당과 명부전이 있다.
이와 같이 극락 보전과 조사당을 중심으로 한, 이 사찰의 중심 영역이 되겠고, 조사당 뒤쪽으로는 나옹 스님의 부도탑과 부도비 그리고 석등이 위치함으로써 또 한적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크게 신륵사는 본당 중심지역, 강변 지역, 그다음에 부도 지역으로 세 군데로 사찰이 배치되어 있는 걸로 볼 수 있다.
3. 극락보전 앞 다층석탑
극락보전 앞마당 한복판에는 높고 길쭉한 탑이 우뚝 서 있다. 대리석으로 세운 조선시대의 석탑이다. 여기저기 깨지고 금이 갔지만 섬세한 모양과 희끗한 대리석 재질이 우아함을 더한다. 석탑은 2층의 계단 위에 여러 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인데 현재는 8층까지만 남아있다.
신륵사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 앞에 있는 신륵사 다층석탑은 말 그대로 신륵사에 있는 여러 층으로 된 석탑이라는 뜻이다.
신륵사 다층석탑이라고 이름 짓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보통 탑들은 층수가 홀수(짝수는 음의 수라고 해서 사용하지 않음)로 가게 돼 있다.
3층, 5층, 7층, 9층 등 홀수로 가게 돼 있는데 신륵사 다층석탑을 보면은 8층으로 되어 있다. 즉 짝수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신륵사 석탑은 원래 몇 층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륵사 다층석탑”으로 명명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우리나라 석탑의 대부분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신륵사 석탑의 경우에는 화강암이 아니라 대리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기단부를 보면 2단 기단부로 되어 있는데, 1층 기단은 구름으로 조성되어 있고,
2층 기단은 용으로 조성되어 있다. 섬세하고 아름답게 조성된 모양은 여타 석탑과 다르게 탑 전체를 웅장하게 보여지게 하고 있다.
보통 보면 여타 탑의 규모가 대부분 우리가 생각한 이상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데, 신륵사 석탑의 경우에는 자그맣다. 그것은 극락보전 앞 절 마당이 그렇게 넓은 마당이 아닌 관계로 전체 규모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자그마한 탑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4.극락보전
신륵사는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극락 보전은 17세기에 중수됐는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이다.
특히 화려한 다포계 양식의 팔짝 지붕은 압권이다.
신륵사 극락보전 석축기단을 보면 네모 반듯하게 기단석이 조성되어 있다. 옛날에는 왕실 외에는 네모 반듯한 돌을 조성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찰이 이렇게 네모반듯한 돌을 조성했다는 것은 왕실과 관련되어 있다.
즉, 극락 보전은 17세기 정조 때 중수 중창되었지만, 세종대왕과 관련된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기 때문에 축대를 이렇게 네모 반듯한 것으로 조성되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리고 축대를 보면 바닥 흙이 황색, 흰색 또는 회색으로 되어 있는 절이 많은데, 여기서는 흰색이다. 그것은 자연 채광의 반사광을 통해서 법당 내부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즉 태양광이 그 하얀 바닥에 비춰서 법당 안으로 들어간 자연 채광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신륵사 극락 보전을 보면,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이다. 참고로 다포계의 양식이라는 것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栱包: 처마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가 여러 개가 있는 것을 다포계 양식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기둥 위에도 공포가 있지만 그 사이 사이에도 여러 공포가 있다고 해서, 많을 多 공포 包자를 서 다포계의 양식이라고 그런다.
지붕의 모습은 팔자(八字)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고 해서 팔작 지붕 양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붕의 무게를 좀 안정적으로 지탱해 주기 위해서 사방으로 별도의 기둥을 세웠는데, 이를 활주(-柱라)라고 한다. 대부분의 절에는 활주가 없지만 몇몇에서의 절에는 이렇게 활주(-柱: 무언가를 지탱할 때 쓰는 굽은 기둥)로를 통해서 안정적인 모습을 취하는 곳도 있다.
정적이 감도는 극락보전의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당겨본다. 부처님 앞에 서면 마음가짐도, 걸음걸이도 조심스러워지고 겸손해 진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내는 아미타여래, 극락정토에 머물면서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왕생의 길로 인도한다는 아미타여래는 우리에게 여전히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극락보전 법당 내부에는 이름 자체가 극락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주불(主佛)이신 아미타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로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이 계신다.
아미타 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에 계신 분이 관세음 보살님, 오른쪽에 계신 분이 대세지보살님이시다.
<참고로 왼쪽, 오른쪽이라 할 때는 우리가 보는 자의 입장이 아니고 부처님 중심으로 좌, 우로 표현하게 돼 있다.>
정토경(淨土經)에 의하면 극락에는 아미타 부처님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제불사님이 자리하고 계시면서 뭇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극락보전에는 세분을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의 3대 신앙, 하면은 미타신앙, 관음신앙, 지장신앙인데, 신륵사는 극락 보전에 아미타불이 봉안 된 것으로 볼 때 미타신앙이 중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관음 기도가 끊이지 않는다고 볼 때 관음 신앙하고도 연결될 수가 있다.
그래서 보면 특히 이 삼존불의 모습이 보통 법당에 가면 삼존불이 앉아 있는 부처님 즉 좌불(座佛)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이 신륵사 극락보전은 아미타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계신 관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 두 분이 서 계신 입불(立佛)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당장 중생들이 급할 때 빨리 달려 나갈 수 있다는 부처님의 적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좌불보다는 입불로 세운 것이 아닌가 한다.
보통 우리가 부처님을 어떤 부처님인가 구별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손 모양으로 구별한다. 그걸 수인이라고 한다. 신륵사의 아미타 부처님의 손모양이 무릎에 놓인 왼손, 들고 있는 오른손이 모두 손가락 고리를 만들고 있다.
이런 손모양을 학자에 따라서 하품 중생 또는 중품 하생이라고 한다. 손모양이 9가지로 나눠 있는데, 그래서 아미타 구품 수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미타 부처님의 손모양은 지금 신륵사 아미타불과 같이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손모양을 하고 있을 때 아미타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고, 좌우에 계신 관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도 그와 비슷한 수인을 하고있다.
법당 안은 다양한 장엄(莊嚴: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꽃 등을 부처에게 올려 장식 하는 것)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불상과 수미단이 그렇고 닫집이 그렇다. 이러한 장엄들은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의 덕성을 상징하고 부처님의 세계인 불국토를 나타낸다.
보통 닫집이라는 것은 궁궐과 같은 개념이다. 지상의 왕중의 왕이 머무는 곳이 궁궐이라 그러면 출세간법(出世間法: 열반(涅槃), 적정(寂定)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닦는 사제)의 법왕이신 부처님이 계신 곳이 궁궐이라는 의미로서 부처님을 모신 불단(佛壇)위의 궁궐의 의미로 닫집을 조성한다.(닫집: 궁궐 중의 궁궐, 구중궁궐(九重宮闕))
그런데 신륵사 극락 보전의 닫집을 보면, 용으로 장엄(莊嚴)되어 있다.
보통 보면 용이 한 마리 있는 경우 있고, 두 마리 있는 게 있고, 여러 마리 있는 경우도 있는데, 신륵사 닫집은 용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신륵사 앞을 흐르고 있는 여강, 남한강이 또 하나의 용이기 때문에 이 법당 안에는 하나의 용으로 모신 것이 아닌가 한다. 아니면 창건당시 원효대사께서 쫓아 낸 용을 위해 모시지 않았나 생각한다.
전설문화라는 것은 다양한 이야기가 겹쳐짐으로써 우리의 전설문화가 살이 된다고 본다.
어느 이야기가 틀렸고 어느 이야기가 맞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이 모여지면 그것이 풍부한 우리의 전설문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륵사 극락보전은 무궁무진하게 우리의 이야기가 덧붙일 수 있는 부처님 법당이라고 볼 수 있다.
멈춤 없이 흐르나 자취가 남지 않는 여강은 구도자의 마음을 닮았다. 언젠가 바다로 흘러감을 알기에 강물은 잠시의 구비침에 흔들리지 않는다. 한없이 마음이 소란할 때 잠시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는 곳, 아미타여래의 무한한 자비와 지혜의 음성이 살아 숨 쉬는 곳, 산 대신 넉넉한 강을 품은 절 신륵사이다.
여주 땅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물줄기를 이곳 사람들은 여강(驪江: 검은 말, 驪. 강, 江)이라 불렀다. 예로부터 여강은 물길이 사납고 곧잘 범람했는데 사람들은 여강의 거센 물살을 용마에 비유하곤 했다.
이 여강 곁에 신륵사가 있다. 절 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고려 우왕 때 여기 여강에 마암(馬巖)이란 바위 부근에 사나운 용마가 나타나 큰 피해를 주었는데 다스릴 재간이 없었다. 이때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로 고삐를 잡으니 용마가 유순해졌다고 한다.
이렇듯 신력(神力)으로 제압했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 했다는 설화다. 이외에도 여러 숱한 전설이 내려 온다. 예부터 흘러왔던 여강은 신륵사를 품으며 비로소 넉넉하고 유로워진 것은 아닐까 한다.
<나옹과 신륵사>
신륵사는 특히 나옹선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 나옹선사는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였고, 선종(善宗)과 교종(敎宗)을 통합해 불교를 중흥시키고자 했던 인물이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한 무학대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양주 회암사에서 왕과 나라의 안녕을 비는 법회 문수회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온 나라가 나옹을 숭상하는 행사가 되었다.
이 불교세력을 그냥 두면 왕권이 위태로워 진다는 소문에, 조정의 관리들과 유림의 탄압으로 나옹은 공민왕의 권유로 밀양 영원사(지금은 폐허가 되어 영원사지로 남아있다) 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영원사로 향하던 나옹선사는 신륵사에 이르러 돌연 입적하게 되는데, 나옹선사를 흠모한 이들이 모이며 조선 초기 명찰로 급부상하게 된다.(신륵사 전설 참조)
이 때문에 신륵사 곳곳에는 나옹선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신륵사는 억불숭유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법통을 이어왔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왕실이 주축이 되어 여러 차례 절을 중수한 특이한 이력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5. 조사당(祖師堂)
고요한 경내 흔들리는 것은 풍경과 마음속에 남은 옅은 번뇌뿐이다.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조사당이다. 극락보전 못지않게 중요한 전각으로 오늘날의 신륵사를 있게 한 나옹선사의 영정이 모셔진 곳이다.
조사당이라는 것은 사찰의 조사스님의 영전을 모신 법당을 말한다. 조사 스님은 이 사찰에서 수행한 스님 가운데 훌륭한 수행력으로 만인의 귀감(龜鑑)이 되셨던 분을 말한다. 그래서 조사스님의 영정을 모신 조사당은 그분의 수행력을 본받아 우리도 부처님까지 살아보자는 뜻을 간직하고 있는 법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곳 신륵사의 조사당은 신륵사 법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법당이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이곳 신륵사 조사당에는 나옹스님과 관련돼 있다. 나옹 스님은 고려 말 때 많은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분으로서, 왕사까지 하셨던 훌륭한 분이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이 나옹 스님께서는 이곳 신륵사에 오시기 전, 양주 회암사에서 많은 대중들을 교화하였다. 그 회암사 크게 불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이에 불교계가 크게 발전하는 것을 염려한 귀족들이 나옹스님을 그곳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자 밀양으로 내려보내게 되는데,
그래서 양주에서 밀양으로 내려갈 당시 나옹 스님은 병환이 있었는데,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이곳 신륵사에 머물게 됩니다.(신륵사 전설 참조)
그리고 여기서 열반에 드신 거죠. 그래서 이곳이 나옹 스님의 열반지로서 인연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옹 스님의 스승이었던 지공스님, 그래서 지공스님, 나옹스님, 무학스님 이 세 분의 영정을 모신 곳이 바로 신륵사 조사당이다.
신륵사 조사당 뿐만 아니고 우리나라 곳곳에 가보면 지공스님, 나옹스님, 무학스님의 영정을 모신 곳이 많다. 이 세 분은 고려말 조선 초에 훌륭하신 스님으로서 3대 화상으로 존경받았던 분이기 때문이다.
조사당 내부를 보면 내부 천정을 보면 거의 대들보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보통 건물 안에도 보면 기둥이 또 별도로 세워져 있는데, 그 기둥 또한 보이지 않고 어찌 보면 좁은 법당인데 그런 기둥들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넓은 감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정면에 있는 문짝이 6장 문짝으로 돼 있는데, 모든 문짝이 펼쳐져서 자연적인 채광이 완전하게 들어올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바깥 모습을 보면요. 팔짝 지붕 양식으로 돼 있고 또 다포계의 양식으로 되어 있다.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큰스님들의 가르침이 가득 찬 넉넉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조사당 앞마당에는 육백 년 된 향나무가 멋스럽게 서 있다. 나옹선사의 제자인 무학대사가 스승의 영정 앞에 향을 피우는 마음으로 심었다고 한다. 빼어난 수형(樹形)을 자랑하는 고목들은 신륵사의 역사를 말없이 함께 해 온 산 증인이기도 하다.
6. 나옹선사의 부도
조사당 뒤쪽으로 60여 개의 층층 계단을 오르면, 솔숲이 감싸고 있는 양지 바른 곳에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 부도비가 모여 있다. 모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이다.
여기는 신륵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나옹 스님의 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석등이 있는 곳이다. 신륵사가 강변에 위치해서 넓은 시야가 있는 반면, 이곳은 뭔가 아늑함을 주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의 중앙에 있는 보제존자(나옹이 공민왕으로부터 받은 존칭) 부도와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석등, 그 옆에 있는 부도비는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라는 말은 붓다라는 말로 놓은 건데,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스님들의 가르침의 결과가 깨달음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 스님들의 유골 사리를 모신 곳을 부도라고 한다. 요즘은 부도라는 말보다 승탑이라고 하기도 한다.
보제존자의 부도는 모양이 기존에 있는 팔각 원통형에서 벗어나 종 모양으로 생겼다.
그래서 석종형 부도라고 그러는데 보통 줄여서 석종부도라고 한다. 돌로 된 종이 아니라 돌로 된 종 모양의 부도라는 뜻이다.
이곳은 나옹 스님의 열반처가 신륵사이기 때문에 그 나옹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성스러운 공간이다. 나옹 스님의 가르침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또는 나옹 스님에게 등(燈)을 공양한다는 의미에서 그 앞에 석등이 모셔져 있는데, 석등 역시 승탑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4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4각형 지대석(地臺石) 위에 4각의 하대석(下臺石)과 단조로운 4각 간석(竿石),
그리고 역시 4각형을 한 상대석(上臺石)으로 이루어진 기단에 2개의 화창(火窓)을 낸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 또한 4각형을 기초로 하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화사석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지 않고 두 개의 직육면체로서 옥개석(屋蓋石)을 받들게 하고있는 점이다. 4각 옥개석 위의 상륜은 석등과는 달리 단순하게 처리하였으나 맨 꼭대기에는 석등과 동일한 모양의 보주(寶珠)로 장식하였다.
전반적으로 네모반듯하게 만들어 경직된 가운데 지붕의 추녀와 낙수면에 완만한 곡선을 두어, 직선과 곡선이 이루어 내고 있는 조화를 보여준다.
석등의 특징은 중앙에 화사석, 즉 불을 피우는 공간에는 그보다 연한 납석으로 되어 있다.
납석이라는 것은 단단한 돌이라기보다는 약간 무딘 돌이다. 그래서 조각하기 쉽게 섬세한 곳을 조각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조성한 걸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 화사석을 보면 위로는 하늘 나는 선녀 비천상이 새겨져 있고, 밑으로는 용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다른 석 등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왼쪽 옆으로 있는 부도비는 나옹 스님에 대한 생애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그 생애에 대해서 쓰신 분이 고려 말의 유명한 문인 가운데 한 분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이라는 분이다.
그 이색이라는 분은 신륵사 “대장각 비”에서 쓰여져 있는 내용과 같이 신륵사와 또 깊은 인연이 있는 분이다.
7. 신륵사 대장각기비(神勒寺 大裝閣記碑)
신륵사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는 현재 명부전이 있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원래 이곳에는 대장각이 있었다고 한다. 멀리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대장각기비가 서 있다.
고려 말의 유학자이자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이색(牧隱)은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선사의 제자들과 함께 신륵사 내에 대장각을 세웠다. 현재 대장각은 남아있지 않고 그 내력을 적은 비석만이 남아있다.
이 비석은 바로 신륵사에 있었다는 대장각의 조성배경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원래는 대장각이 있는 서쪽 언덕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언제인가 극락보전 동쪽 언덕, 전탑 북쪽으로 옮겨온 듯하다.
대장각이라는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을 모시는 정각을 대장각이라고 그런다.
따라서 이곳에 대장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고려 말 목은이색(牧隱李穡)은 아버지 이곡의 발언을 이어받아서 이곳에 대장각을 봉안한 것이다.
그러니까 신륵사에 대장각을 세우려고 발원한 인물은 이곡이다. 이색은 애초에는 불교를 탄핵한 이름난 성리학자였다. 이색이 불교를 가까이 하게 된 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 이곡이 신륵사에 대장경을 간행하여 보시하려던 약속을 대신 이행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색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1381년 4월 연출을 시작해 12월에 끝내고 판본은 대장각에 안치하여 공민왕의 자복(資福)과 선고(先考) · 선비(先妣)의 명복을 빌었다.
이 불사에는 무학, 최영, 최무선, 권중화 등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태고보우(太古普愚: 공민왕, 우왕의 국사) 및 나옹선사와도 친교를 맺게 되었고, 이색은 나옹스님이 입적한 후 회암사에 있는 나옹선사의 탑비 선각왕사비 비문을 쓰기도 하였다. 현재 이 대장각기비석의 비문은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권주(權鑄)가 해서로 썼다.
이 비는 보제존자석종비와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다른 맛을 주고 있다. 직사각형 지대석 위에 역시 직사각형의 대석을 놓고 그 위에 비좌를 올려놓았다.
비좌 상면에 장방형의 홈을 파서 비신을 꽂고 그 위에 다시 지붕돌을 얹었다. 귀부와 이수를 대석과 지붕돌로 바꾸어 전체적으로 간략화 된 양식을 취하고 있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멋은 없지만 나름대로 생략과 간소화된 양식이 오히려 투박한 맛을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양식은 고려 말에 보이는 새로운 형식으로 뒤에 조선시대 석비 양식에 영향을 준다.
비신은 대리석을 다듬어 만들었으며 비신이 쪼개지는 것을 방지하게 위하여 양측면에 화강암으로 만든 지주를 세웠다. 그러나 현재 비신은 손상이 커 잘려 나가거나 탈락 된 부분이 많다. 대리석이 화강암에 비하여 석질이 약하기 때문에 양측면에 지주를 세워도 비신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어렵다.
따라서 비문 내용을 모두 파악하기 어렵다. 건립연대도 탈락되어 정확한 건립시기를 알 수 없다.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남녀 신도)를 구분하여 그 이름을 밝히고 있다. 이색과 나옹선사 문하생들이 발원하여 우왕 6년(1380) 2월부터 대장각을 지었으며, 경률론(經律論) 3장을 인출하고 수장했었다고 한다.
목은이색이 8만 대장경을 인경(引經)하여 신륵사에 모시고자 할 때, 처음에는 개인적인 발언이었으나 공민왕이 죽음으로 해서 국가적인 불사로 바뀌었다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고려 말에 이곳에 8만 대장경을 인경한 고려대장경을을 다 모셔놓고, 그리고 조선 초까지 이어져 오다가 태종 때 일본 사람들이 팔만 대장경 경판을 달라는 소리를 듣고 경판은 줄 수 없다고 하고, 대신 인경한 판본 대장경을 주겠다 하면서 이곳에 모셔져 있던 8만 대장경을 일본 사람들한테 넘겨줬던 역사가 있다. 어찌 보면 문화에 대한 중요성을 잊어버린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어쩌면 오늘날에도 문화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고 우리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한번 되새겨 볼 수 있는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8.신륵사 다층 전탑
사람들은 예로부터 신륵사를 벽절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바로 남한강변에 우뚝 솟은 조금은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전탑 때문이었다.
전탑은 벽돌을 구워 쌓은 탑이라는 의미로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형식이다.
천년의 세월을 한 자리에서 지키고 있는 전탑은 한때 여강을 오가는 뱃사람들에게 등대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신륵사의 주요 건축물 중의 하나인 강변에 위치한 신륵사 다층 전탑은 이름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여러 층으로 된 벽돌탑을 말한다.
탑의 층수는 보통 홀수로 진행되는데,신륵사 전탑은 어떻게 보면 6층이고 어떻게 보면 7층이기도 하지만 옥개석 즉 지붕돌이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볼 때는 6층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기존의 이 탑이 몇 층으로 되어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다층이라고 명명을 하였다.
전탑이라는 말은 벽돌로 만들어진 탑이라는 뜻이다. 보통 탑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서 돌로 만들어진 탑은 석탑, 나무로 만들어진 답은 목탑, 그리고 벽돌로 만들어진 탑을 전탑이라고 한다.
신륵사 다층 전탑을 보면 기단부는 돌로 되어 있고, 탑신부는 벽돌로 된 탑이다. 그래서 탑신부가 벽돌이라서 전탑이라고 명칭하고 있다. 이러한 전탑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흔하지 않는 탑이다. 보통 경북 안동에 몇 개가 남아 있고, 중부 이후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데, 여기 신륵사에 있는 다층 전탑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벽돌로 된 탑이 있다고 해서 옛부터 신륵사를 벽돌로 된 탑을 세운 절, 벽절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다른 절에서는 보통 법당 앞에 탑을 위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법당 앞이 아닌 강가 자연 암벽 위에 놓여져 있다. 그래서 이 벽돌탑은 어쩌면 강물과 관련돼 있지 않느냐 다시 말하면 먼 길을 온 사람들에게 어찌 보면 길잡이 역할을 하는 탑으로써 세워졌다고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홍수가 났을 때 거센 물결이 일어날 때 그 엄청난 기운을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세워진 탑이라고 볼 수 있으며, 여강을 지나다니는 뱃사공들은 멀리 언덕위에 있는 전탑을 향해 무사안녕 기도를 올렸을 거라 생각한다.
9. 신륵사 삼층석탑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驪州 神勒寺 三層石塔)은 신륵사옆 남한강 강변 자연 암반 위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화강암을 깍아 만든 삼층석탑으로 고려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여주 신륵사 경내 강변 암반에 위치해 있다.
탑을 지탱하고 있는 제일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한 장의 넓적한 돌 위에 사각형의 석재를 올려놓고 그 위 덮개에 해당하는 상대석을 덮었다. 기단부 바로 위에 놓여 있는 탑신에 해당하는 돌의 네 모퉁이에는 기둥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다.
그 위에 목조건축물의 지붕과 같은 형태로 옥개석을 덮었다. 옥개석은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옥개서 아랫부분에 새겨진 받침은 3단 내지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형태로 3층의 탑신과 옥개석이 쌓여 있으나,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된 상태이다.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신륵사 동대탑수리비"에 따르면 고려 후기 나옹화상을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탑은 조각이 부드럽고 탑신부의 짜임새가 간결하여 고려후기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0.강월헌(江月軒)
청산과 창공은 말도 없이 티도 없이 살라지만 세상을 살며 미혹이 흔들리지 않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하지만 때론 아름다운 풍광 앞에서 우리는 아주 잠시지만 말도 없이 티도 없이 존재한다. 강월헌에서 바라본 여강의 모습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다. 그저 이곳에 존재함으로 탐욕도, 노여움도, 어리석음도 내려놓게 된다.
강월헌, 여기는 신륵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바로 남한강변 자연 암석 위에 위치한 이 정자는 바로 나옹 스님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이다.
즉 강월헌은 나옹 스님의 또 다른 호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3층 석탑은 나옹스님의 열반지인 이곳에서 나옹 스님을 화장한 곳이다. 화장한 곳에서 사리가 여러 개가 나왔는데, 사리 모두를 양주 회암사로 가져갔다가 수년이 지난 후에 이곳 나옹선사 부도에도 모시기 위해 가져 왔다고 한다. 암튼 나옹선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이곳에 3층 석탑을 세웠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강월헌 앞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뿌리를 따라가 보면 쪼개진 바위틈 사이로 비집고 뻗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살아가기가 얼마나 고통 스러웠음을...
신도가 아닌 사람들도 신륵사를 찾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아름다운 풍광 때문인데, 그 중 으뜸은 바로 저녁 노을이다. 강변을 붉게 물들이면서 내려가는 저녁노을은 이곳 강월헌에서 보는 것이 천하 일경이다.
그래서 다른 곳과 다르게 이 강월헌에는 저녁 무렵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저녁 노을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다짐하는 곳이기도 하다.
여강의 저녁노을은 이 찰나의 순간을 우리가 영원히 기억하길 바라면서 조용히 저물어 간다. 이름 모를 풀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세상에 대한 애착도 시름도 스르르 사라진다.
<신륵사 전설>
신륵사는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 지지만, 또 일설에는 고려 우왕 2년 1376년에 나옹화상이 창건한 사찰로도 전해진다. 어떻든 신령스러운 고삐라는 뜻을 담고 있는 사찰이다.
남한강변에 자리 잡은 이 사찰은 창건 당시부터 백마와 관련된 영험한 이야기가 전해져 왔으며, 특히 강을 오가는 사람들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수호 사찰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본 전설 이야기는 나옹화상이 관세음보살의 계시를 받아 백마의 인도로 도량을 세우게 된 과정과 그 후로 이어진 신비로운 영험들을 담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백마의 모습으로 현현(顯現)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장면들, 그리고 절의 수호신이 된 백마가 사찰과 민중들을 보살피는 이야기를 통해 신륵사의 영적 가치와 불교적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 전설은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백마라는 상징을 통해 어떻게 중생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 속에서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불교 설화이다.
제1장 하늘의 계시
고려 우왕 즉위 초기 불법이 무르익어가던 그 시절이었다. 나옹화상은 중국 임제종(臨濟宗: 선가 오종의 하나)의 법맥을 이어받아 개성 송림사에서 정진하고 있었다.
선종의 종주로 일컬어지던 그의 수행은 매우 엄격했다.
새벽이면 차가운 계곡물로 몸을 정화하고 낮에는 경전을 읽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밤이면 밤마다 달빛 아래서 좌선을 하며 진리를 구했다.
당시 고려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신진 사대부들의 세력이 커지고 권문세족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은 날로 어려워졌다.
나옹은 이러한 세상의 고통을 늘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큰 서원을 세우고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옹은 송림사의 작은 선방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달빛이 유난히 밝았고 은은한 안개가 산사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깊은 선정에 들어 있을 때였다.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변하더니 환한 빛이 그를 감쌌다.
처음에는 흰 구름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그 구름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형체를 만들어 갔다.
점차 그 형상이 선명해지더니 순백의 고귀한 백마로 변모했다. 백마의 갈기는 달빛처럼 빛났고, 그 위엔 금빛 광채를 두른 관세음보살의 모습이 나타났다.
보살님의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그 모습은 너무나 장엄하여 나옹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관세음보살은 천상의 음성으로 나옹에게 말씀하셨다.
“ 나옹아, 내가 그대에게 중요한 소임을 맡기고자 하노라.
남한강 유역에 영험한 기운이 서려 있는 땅이 있느니라.
그곳에서 백마가 멈추는 자리를 찾거든. 그 땅에 나의 진리를 전할 도량을 세우라.
그곳은 천년의 세월 동안 중생들을 구제할 성지가 될 것이니라.”
보살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백마는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솟구쳤다.
그 순간 천지가 진동하고 향기로운 꽃비가 내렸다.
나옹은 그 자리에서 깊이 절을 올렸다. 이 시연은 단순한 꿈이 아닌 명백한 계시였다.
나옹은 즉시 자신의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꿈에서 받은 계시를 자세히 전하고, 남한강으로의 순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이 사실은 회암사에서 밀양 영원사로 쫓겨가는 내용과 다르다)
제자들은 스승의 말씀을 듣고 크게 감동했다. 그들은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할 수 있는 큰 기회라 여겼다.
떠나기 전 나옹은 왕실에 이 사실을 알렸다. 우왕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사찰 건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는 불법을 통해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왕실의 의지이기도 했다.
준비를 마친 나옹은 제자들과 함께 길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저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그의 기도가 끝나자 밤 하늘에는 서광이 비추었고, 멀리서 백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제2장 백마의 인도
이른 봄, 나옹과 그의 제자들은 남한강을 향한 순례의 길을 나섰다. 아직 겨울의 한기가 남아 있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일행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산모퉁이를 돌아설 때였다. 갑자기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그 안개 속에서 한 마리의 백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마는 꿈에서 본 그 백마와 꼭 같았다. 은은하게 빛나는 갈기와 위엄 있는 모습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백마는 나옹 일행을 보자 반갑다는 듯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이나 한 듯이 일행의 앞장을 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백마는 때로는 험준한 산길로, 때로는 평탄한 들길로 일행을 이끌었다. 이상하게도 백마가 인도하는 길에는 별다른 장애물이 없었다. 급한 비탈길도 어느새 완만해졌고, 깊은 계곡도 쉽게 건널 수 있는 여울이 나타났다.
더욱 신기한 것은 백마가 이끄는 길을 따라갈 때면 주변의 새들이 지적이며 반기고, 들꽃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마치 절을 하는 듯했다. 길을 가는 동안 나옹의 제자 중 한 명인 해명이 스승께 물었다. 스승님, 이 백마는 분명 보통의 말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혹시 관세음보살님께서 현신하신 것은 아닐까요?
나옹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백마는 예로부터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져 왔느니라.
특히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백마로 화연(化緣)하시어 나타나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백마는 우리를 부처님의 뜻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안내자일 것이다.
백마는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달이 차고 기울기를 세 번, 백일만에 그들은 마침내 남한강가의 한 지점에 도달했다.
그곳은 강물이 유장(悠長)하게 흐르는 곳이었고, 산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명당이었다.
주변에는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고,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마치 연꽃 봉우리처럼 솟아 있었다.
백마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세 번 크게 울음소리를 내더니 앞발로 땅을 세 번 구르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 순간 하늘에서는 오색찬란한 빛이 내리쬐었고, 은은한 향기가 주변을 감쌌다. 나옹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깊은 감동에 휩싸였다.
이곳이야말로 관세음보살님께서 점지해 주신 성스러운 땅임을 직감했다.
그는 즉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삼배를 올렸다. 제자들도 스승을 따라 함께 예를 표했다.
그들이 예를 올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강물이 잔잔히 일렁이더니 물속에서 연꽃 한 송이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연꽃 위로 햇빛이 비추자 무지개가 그 자리를 감싸 안았다.
이는 분명 이곳이 도량을 세우기에 가장 적합한 성지임을 알리는 하늘의 징표였다.
제3장 신비로운 고삐
백마가 사라진 자리에서 나옹은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 마치 달빛을 응집해 만든 듯한 말고삐가 그곳에 놓여 있었다.
고삐에서는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고, 주변으로는 맑은 기운이 감돌았다. 이는 분명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나옹이 조심스럽게 그 고삐를 들어 올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고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하늘로 치솟더니 그 빗줄기를 따라 수천 개의 연꽃이 피어났다.
연꽃들은 하늘에서 춤추듯 빙빙 돌다가 땅으로 내려와 사라졌다. 그리고 연꽃이 닿은 자리마다 맑은 샘물이 솟아올랐다.
이를 지켜보던 제자 혜명이 말했다. “스승님 이 고삐는 분명 하늘이 내린 성물(聖物)임이 틀림없습니다. 보통의 고삐라면 어찌 이런 신이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
나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이 고삐는 단순한 말고삐가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징표이니라 고삐는 본래 말의 방향을 인도하는 도구이거늘, 이 고삐는 우리의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그때였다. 고삐에서 갑자기 찬란한 금빛이 발산되더니 그 빛 속에서 관세음보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옹아 이 고비는 내가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니라. 이 고삐가 있는 곳에 도량을 세우면 그곳은 영원히 불법이 머무는 성지가 될 것이며, 모든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한 터가 되리라.”
나옹과 제자들은 이 소리를 듣고 깊이 감동했다.
그들은 이 고삐야말로 부처님의 가피가 깃든 성물임을 확신했다.
나옹은 고삐를 소중히 들고 다시한번 그 자리에 예를 올렸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고삐를 든 나옹의 손에서 갑자기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주변의 나무와 풀, 바위에까지 미쳐 모든 것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그 금빛 속에서 수많은 부처님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제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며 합장했고, 어떤 이는 감격에 겨워 절을 했다. 이는 분명히 땅이 단순한 강가의 터전이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이 깃들 성지임을 알리는 징표였다.
나옹은 고삐를 들고 주변을 천천히 걸어보았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에서는 연꽃 모양의 빛이 피어올랐고, 하늘에서는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는 마치 천상의 음악과도 같았다.
그때 멀리서 한 노인이 다가왔다. 노인은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이었다.
그는 나옹 일행에게 깊이 절을 하고는 말했다. 대사님 제가 젊었을 적부터 이곳에서는 종종 백마가 나타나 강가를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죠. 병든 사람이 나았다거나 가뭄 때 비가 내렸다거나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이 영험한 땅이라 여겨 왔습니다.
제4장 도량의 건립
나옹은 백마의 고삐가 놓여 있던 그 자리에 도량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이 소식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가 삽시간에 주변 마을로 전해졌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돌을 날랐고, 어떤 이는 나무를 다듬었으며, 또 어떤 이는 음식을 준비해 왔다.
특히 이 지역의 장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석공, 목수, 화공들은 저마다의 기술을 바치겠다며 나섰다.
그들은 이 도량이 단순한 사찰이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이 깃든 성지가 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신비로운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밤이면 백마가 나타나 공사장을 돌았는데, 이상하게도 다음 날이면 전날보다 공사가 훨씬 더 진척되어 있었다.
무거운 돌들이 저절로 제자리를 찾아 움직였고, 구부러진 나무들이 스스로 곱게 펴졌다.
어느 날 밤 달빛이 유난히 밝을 때였다. 공사장을 지키던 제자 혜명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수백 마리의 백마가 하늘에서 내려와 건물의 뼈대를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우아하고 정교했다. 마치 하늘의 장인들이 내려와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또 다른 밤에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그 꽃잎들은 땅에 닿자마자 황금빛 기와로 변했다.
마치 하늘이 직접 지붕을 얹어주는 것 같았다.
때로는 밤 하늘에 오색찬란한 빛이 비추었는데, 그 빛은 마치 도면을 그리듯 건물의 윤곽을 밝혀주었다. 공사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신비한 경험을 했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피곤을 느끼지 않았고, 굶어도 배고프지 않았다.
다친 사람이 있으면 어디선가 흰 새가 날아와 약초를 물어다 주었고, 목마른 이들에게는 맑은 샘물이 솟아났다.
특히 놀라운 것은 자재가 부족할 때마다 어김없이 백마가 나타나 필요한 것들을 실어 날랐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은 좋은 나무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다음 날 아침 어디선가 최상품의 금송이 쌓여 있었다. 또 어느 날은 돌이 부족하다고 했더니 백마들이 밤새 산에서 돌을 날라다 쌓아두었다.
우왕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왕은 즉시 금과 비단을 하사하고 뛰어난 장인들을 보내 공사를 돕게 했다.
또한 매달 보름날이면 특별히 제(祭)를 올리게 하고, 사찰의 운영을 위한 토지도 하사했다.
그렇게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고, 회랑과 누각도 점차 완성되어 갔다.
특히 대웅전의 단청은 하늘의 화공이 직접 그린 듯 오색찬란했고, 처마 끝의 풍경은 천상의 음악 소리를 담고 있는 듯했다. 마침내 주요 건물들의 공사가 마무리되어 갈 때였다.
어느 날 밤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 소리가 울리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비는 공사장은 피해 내렸고, 대신 건물들을 씻어내리듯 깨끗이 적셔주었다. 비가 그친 후 달빛이 비추자 모든 건물이 금빛으로 빛났다.
제5장 영엄한 기운
사찰이 완성되어 가자 나옹은 이 절의 이름을 정해야 했다.
그는 깊은 선정에 들어 부처님의 뜻을 구했다. 그때 문득 백마의 고삐가 떠올랐다.
그 신비로운 고삐야말로 이 사찰의 시작이자 본질이었다.
이에 나옹은 절의 이름을 신륵사라 지었다. 신륵이란 신령스러운(神) 고삐(勒)라는 뜻이었다.
이름이 정해지자마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늘에서 갑자기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절 앞 강가에 수천 마리의 백마가 나타나 절을 향해 세 번 절을 했다. 그리고는 모두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사라졌다.
이때부터 신륵사에는 신비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이들 앞에는 종종 백마가 나타나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병든 이가 찾아오면 백마가 나타나 그의 주위를 세 바퀴 돌았고, 그러면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가뭄으로 고통받는 농부들이 기도하면 백마가 하늘을 날며 비구름을 몰고 왔다.
특히 달 밝은 밤이면 더욱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났다. 대웅전 앞마당에서는 백마를 탄 관세음보살의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보살님은 늘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계셨고, 때로는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이슬을 뿌리고 가셨다.
어느 날은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찾아왔다. 그녀는 밤낮으로 대웅전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3일째 되던 날 밤 백마가 나타나 그녀를 태우고 전쟁터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부상 당한 채 숨어 있던 아들을 찾을 수 있었다.
또 어느 해 큰 가뭄이 들었을 때의 일이다. 백성들이 신륵사에 모여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그날 밤 수백 마리의 백마가 하늘을 날며 구름을 모았고, 마침내 단비가 내려 모든 논밭이 살아났다.
이후 사람들은 이 비를 백마의 은혜라 불렀다. 흉년이 들었을 때는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절의 창고가 텅 비어 있었는데도 신륵사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양식이 제공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밤마다 백마들이 하늘에서 쌀을 실어다 날랐던 것이다.
특히 신륵사의 고삐를 모신 전각에서는 더욱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났다.
깊은 기도에 잠긴 이들은 고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보았고, 그 빛을 본 이들은 모두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때로는 고비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의 모든 번뇌가 씻겨 나갔다고 한다.
봄이면 절 주변에 핀 꽃들이 절로 절을 하듯 고개를 숙였고, 가을이면 단풍잎들이 부처님께 공양하듯 법당 앞에 쌓였다. 겨울이면 흰 눈이 마치 연꽃잎처럼 내려앉았고,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수행자들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제6장 영원한 수호
세월이 흐르면서 신륵사는 남한강의 수호 사찰로 자리 잡았다. 특히 강을 오가는 뱃사공들에게 신륵사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그들은 이곳을 지날 때면 반드시 배 위에서 합장을 하고 예를 표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렇게 예를 표한 배는 단 한 번도 사고가 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큰 홍수가 났을 때의 일이다. 강물이 범람하여 주변 마을이 모두 물에 잠길 위기에 처했다. 그때 갑자기 수백 마리의 백마가 나타나 강가를 달리며 둑을 만들었다.
백마들의 발굽이 닿는 곳마다 땅이 솟아올라 자연스럽게 제방이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마을은 홍수의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때는 왜구들이 강을 따라 침입해 왔을 때였다. 신륵사가 보이는 강변에 이르자 갑자기 안개가 짙게 끼더니 수천 마리의 백마들이 나타났다.
백마들은 하늘을 날며 번개와 같은 빛을 발산했고, 이에 놀란 왜구들은 도망치듯 물러갔다.
고기잡이를 나가는 어부들에게도 신륵사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들은 출항 전에 반드시 신륵사에 들러 안전과 풍월을 기원했다. 이렇게 기도를 올린 어부들은 언제나 풍성한 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특히 매년 봄 벚꽃이 필 무렵이면 백마가 나타나 절 주위를 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다. 이때 백마의 모습을 본 사람은 그 해 소원이 모두 이루어진다고 했다.
강가의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면 그 모습이 마치 백마의 갈기 같다 하여 사람들은 이를 신마수(神馬樹) 불렀다.
절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밤이면 종종 하늘을 나는 백마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 소리는 마치 천상의 음악 같았고,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졌다고 한다.
특히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백마들이 달빛 속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가뭄이 들었을 때면 백마들은 하늘을 날며 비구름을 모았고, 전염병이 돌 때면 백마들이 마을을 돌며 병을 물리쳤다.
전쟁이 일어날 때면 백마들은 하늘을 날며 적군을 물리쳤고, 흉년이 들었을 때는 어디선가 양식을 실어왔다.
신륵사 주변에는 특별한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 소나무들은 백마의 발굽이 닿았던 자리에서 자란 것이라 하여 신마송(神馬松)이라 불렸다.
이 나무들은 천 년이 넘도록 자라며 절을 지켰고, 가지를 흔들 때마다 맑은 종소리 같은 소리를 냈다고 한다.
제 7장 전설의 수호자
신륵사의 승려들은 매일 새벽 백마가 처음 멈추어 섰던 그 자리에서 독경을 올렸다.
이는 나옹 스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었다.
백마가 처음 머물렀던 그 자리에는 특별한 돌이 있었는데, 이 돌에는 백마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승려들은 이 발자국을 마족석(馬足石0이라 불렀다.
특히 이 마족석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비가 오려 하면 돌에서 물방울이 맺혔고, 큰 일이 일어나려 하면 은은한 빛을 발했다.
절의 승려들은 이 돌을 통해 앞일을 예측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적절한 대비를 할 수 있었다.
어느 해 겨울 극심한 한파가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마족석에서 갑자기 따뜻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승려들이 이상히 여겨 주변을 살펴보니 멀리 눈밭에서 조난당한 행인들이 발견되었다. 덕분에 그들은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
승려들은 매년 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이면 특별한 의식을 거행했다.
이 날이면 백마의 고삐를 모신 전각에서 백마제(白馬祭)를 지냈다.
제를 지내는 동안에는 항상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났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구름이 백마의 형상을 이루었으며, 절 안의 모든 불상에서 빛이 났다.
특히 백마제를 지낼 때면 절 앞 강물이 맑아져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였고, 물고기들이 떼 지어 와서 절을 향해 절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강가의 모든 새들도 날아와 절 주위를 돌며 아름다운 소리로 울었다.
승려들은 또한 매월 보름날 밤이면 백마가 남긴 고삐를 정성스레 닦았다.
이때 고삐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퍼져 나왔고, 그 향을 맡은 이들은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맑아졌다고 한다.
특히 이날 밤에는 고삐가 스스로 빛을 바라며 대웅전을 비추었다. 절의 승려들은 이러한 영엄한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神勒寺誌라 불린 이 기록에는 백마와 관련된 수많은 기적 같은 일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이 기록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고, 후대의 승려들은 이를 통해 신륵사의 영험함을 이해하고 전승할 수 있었다.
한 번은 절의 한 어린 승려가 의문을 품고 물었다. 스님, 왜 백마는 우리 절을 이토록 수호하는 것입니까?
이에 당시에 주지 스님이 답했다. 백마는 관세음 보살님의 화신이시니라.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보살님의 자비가 이 땅 여기 신륵사에 머무는 것이니 우리는 이를 깊이 새기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해야 하느니라.
제8장 신비의 고삐
신륵사에는 백마의 고삐를 모신 특별한 전각이 있었다. 신륵보전이라 불린 이 전각은 절에 가장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다.
고삐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진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는 이들 앞에 만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 전각의 건립 과정도 신비로웠다. 처음 터를 잡을 때 땅에서 갑자기 금빛 연꽃이 피어 올랐다. 그리고 그 연꽃 위에 백마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장인들이 이 자리에 전각을 세우려 하자 밤마다 하늘에서 신비한 빛이 내려와 공사를 도왔다. 전각의 기둥은 특별한 향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이 나무들은 백마가 직접 물어다 준 것이라 했다.
기둥에서는 항상 은은한 향기가 피어올랐고, 이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맑아졌다고 한다. 지붕의 기와는 하늘에서 내린 꽃잎이 변한 것이라 했다. 이 기와들은 달빛을 받으면 무지갯빛으로 빛났고, 비가 오면 절로 음악 소리를 냈다.
처마 끝에 달린 풍경들은 백마의 울음소리를 담고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신비로운 소리를 냈다. 전각 안에는 백마의 고삐를 모신 수정단(水晶壇)이 있었다.
이단은 7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항상 연꽃이 피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 연꽃은 계절에 관계없이 1년 내내 시들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젊은 승려가 고삐를 보관하던 전각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의 기도는 매우 간절했다. 절 근처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전각 안에 갑자기 밝은 빛이 가득 차더니 고비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 속에서 백마가 나타나 승려에게 말했다. 이 고삐는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상징하노라. 고삐가 있는 한, 신륵사는 영원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것이며 모든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리라.
너의 기도를 들었으니 어서 마을로 가보아라. 승려가 마을에 가보니 놀랍게도 모든 병자들이 치유되어 있었다. 그들은 꿈에서 흰말을 탄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병을 고쳐주었다고 했다.
이후로도 신륵보전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가뭄이 들었을 때는 전각의 처마에서 달콤한 이슬이 맺혔고, 이 이슬을 마신 이들은 굶주림을 잊을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전각에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와 적군을 물리쳤다.
제9장 불법의 전당
신륵사는 점차 불법을 전파하는 중요한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전국 각지에서 수행자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이곳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특히 백마의 영험한 기운 덕분에 이곳에서의 수행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어느 날 한 젊은 스님이 천일기도를 시작했다. 그의 기도는 오로지 중생 구제를 위한 것이었다.
천일째 되는 날 밤, 대웅전 앞마당에 갑자기 은은한 빛이 비추었다.
그 빛 속에서 백마를 탄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셨고, 스님의 정수리에 감로수를 떨어뜨려 주었다. 그 순간 스님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절의 법회도 특별했다. 법회가 열릴 때면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백마들이 나타나 법회에 참석한 이들을 위해 춤을 추었다.
특히 절의 종소리가 울릴 때면 백마의 울음소리가 함께 들려왔는데, 이는 마치 천상의 음악과도 같았다. 수행자들은 밤이면 더욱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달빛이 밝은 밤 법당 주변으로 백마들이 나타나 경전을 독송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들은 수행자들은 모두 깊은 선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
특히 절의 스님들은 매일 새벽 예불 때면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향을 피우고 첫 예불을 올리기 시작하면 백마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함께 절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백마들의 몸에서는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와 법당을 환하게 비추었다.
절에는 백마선원이라는 특별한 선방이 있었다. 이곳은 특히 깊은 수행을 위한 장소였다.
선원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종종 백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깨어나면 모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한 번은 오랜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였다. 절의 스님들이 함께 모여 기도를 올리자 백마들이 나타나 하늘을 날며 비구름을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단비가 내려 모든 논밭이 살아났다. 이후 사람들은 이 비를 백마선우(白馬善雨)라 불렀다.
신륵사의 불법 전파는 국경을 넘어 멀리까지 이어졌다. 외국에서 온 승려들도 이곳의 영험함을 듣고 찾아왔다. 그들은 백마의 발자취를 따라 수행하며 깊은 깨달음을 얻어갔다.
특히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이면 신륵사에서는 특별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날이면 수많은 백마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법회에 참석했고, 그들의 울음소리는 마치 천상의 음악처럼 울려 퍼졌다.
제10장 영원한 약속
신륵사의 백마 영험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백마는 절의 영원한 수호신이 되어 때로는 위기에서 절을 구하고 때로는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특히 달이 밝은 밤이면 절 주변으로 백마들이 나타나 순찰을 돌았고, 그들의 발자국이 닿은 자리마다 영험한 기운이 가득했다.
어느 해 큰 전란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적군이 신륵사를 공격하려 했을 때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며 수천 마리의 백마가 나타났다. 백마들은 하늘을 날며 번개와 같은 빛을 발산했고, 이에 놀란 적군은 도망쳤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백마들은 날마다 나타나 절을 수호했다.
또 다른 때는 큰 화재가 일어났을 때였다. 산불이 절을 향해 번져올 때 백마들이 나타나 날개처럼 큰 갈기로 바람을 일으켜 불길을 막았다. 그리고는 입에 물을 물고 와서 불을 껐다. 이때부터 신륵사 주변으로는 큰 재난이 근접하지 못했다.
절을 찾는 순례자들에게도 특별한 일들이 일어났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이들 앞에는 백마가 나타나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병든 이들은 치유되었고, 곤경에 처한 이들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자식을 점지해 주는 영험이 있어 많은 이들이 이를 위해 찾아왔다. 신륵사의 종소리가 울릴 때면 그 소리를 따라 백마의 울음소리가 함께 들렸다. 이는 부처님의 자비가 이 땅에 영원히 머물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종소리와 백마의 울음소리가 어우러질 때면 모든 중생들의 마음이 맑아지고 번뇌가 사라졌다. 매년 봄이면 백마들은 특별한 의식을 거행했다. 수천 마리의 백마가 하늘에서 내려와 절을 세 바퀴 돌며 춤을 추었다.
이때 그들의 갈기에서 떨어진 빛나는 털은 땅에 닿자마자 연꽃으로 피어났다.
이 연꽃들은 1년 내내 시들지 않고 절을 장엄했다.
절의 입구에는 白馬樹라 불리는 오래된 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는 백마가 처음 멈추었던 자리에서 자란 것으로 가지와 잎이 마치 백마의 모습을 닮았다. 바람이 불 때면 나무가 마치 백마가 춤추는 것처럼 흔들렸고, 그 모습을 본 이들은 모든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신륵사는 이처럼 백마의 수호와 함께 불법을 전하는 성스러운 도량으로 자리매김했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기도하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들의 간절한 소원은 신비롭게도 이루어졌다.
이는 모두 백마의 영엄한 기운 덕분이었다. 이렇게 신륵사는 단순한 사찰을 넘어 부처님의 가르침과 백마의 영엄한 기운이 어우러진 성스러운 도량으로 자리매김했다.
백마의 전설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며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위안을 주고 있다.
www.youtube.com/@wisdomfrombudda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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