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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사찰 & 함께 가고 싶은 곳
여행-경기

남양주 흥국사

by phd100 2025. 8. 17.

 

1. 흥국사

2.대방

3.대웅보전

4.영산전

5.만원보전

6.시왕전

7.나한전

生이 시작되면 그 순간부터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는 시작된다.
그 굴레에서 고뇌하고 집착하는데 삶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석가모니 부처님의 고민은 안갯속 같은 생로병사(生老病死). 그 네 가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고통 없는 세상이라니 얼마나 한가롭고 평안할까요? 하지만 그 고통을 느끼고 고뇌하기에 인간은 인간적인 것 아닐까요?


수락산 흥국사(水落山 興國寺)<일명 덕절(德寺), 수락사(水落寺), 흥덕사(興德寺)>


수락산은 1400년 동안 부처님을 품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의 명산이다. 지금은 도로가 잘 닦여 있어 찾아가기 편리하지만, 흥국사는 수락산 꽤 깊은 산세 사이에 천년의 숨결을 지닌 고찰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근간이 되었던 화랑도 정신을 주창한 원광법사, 그 원광법사가 창건한 절 흥국사를 찾아간다.

 

경기도 남양주시 수락산(水落山)에 있는 흥국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원광이 창건한 사찰로, 일명 덕절(德寺)이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599년(진평왕 21) 원광(圓光)이 창건하여 수락사(水落寺)라 하였으며, 그 뒤 조선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1568년(선조 1)에 왕이 이 절에 아버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당(願堂)을 짓고 편액(扁額)을 하사하여 흥덕사(興德寺)로 개칭하였는데, 민간에서 덕절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원당 때문이다. 1626년(인조 4) 다시 흥국사(興國寺)로 개명하였다.

 

흥국사는 처음에는 수락사, 흥덕사였다. 사찰 바로 인근에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의 아버지이자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었던 덕흥대원군의 묘역이 형성되고부터 후대에 다시 이제 흥국사로 변하는데, 흥국사가 되기 전에 흥덕사였을 때 마을에서는 흥자를 빼고 덕절로 유명해 졌다. 근처 마을에서는 흥국사나, 흥덕사나, 수락사보다는 덕절로 많이들 알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이 절 흥국사는 별명을 갖게 돼어 “덕절”이 지역 사람들에겐 널리 알려져, 흥국사는 덕절로 불리고 있다.

 

사람들이 덕절, 덕릉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선조의 노력이 가히 애처롭다. 조선 13대 왕이었던 명종 이후 적장자가 없어 후궁 출신 서자로 왕위에 올랐던 선조는 자신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묘를 왕릉으로 추존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사대부의 반대가 심하자 선조는 꾀를 냈다고 한다.
양주마을 사람들이 한양으로 물건을 팔러 올라 올 때 덕릉을 지나왔다고 말하면 값을 후하게 쳐주도록 하면서 사람들에게는 덕릉으로 불리게 한 것이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묘는 그렇게 덕릉으로 불리게 됐고, 곁에 있던 천년 고찰은 덕절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흥국사는 그만큼 왕실과 인연이 깊고 그만큼 생로병사의 고뇌도 많은 인간적인 사찰이었다.

1400년 전통의 고찰 흥국사는 선조 때부터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으며, 정조 14년에는 승려를 감독하는 전국 5규정소(五糾正所: 조선시대 승려의 기강을 바로잡고, 승풍을 규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의 하나로도 지정된 유서 깊은 사찰이기도 하다.

 

 

1. 대방(大房)
나라를 흥하게 하는 절이라는 뜻의 흥국사에서 가장 큰 전각이 바로 이 대방이다.

전면에서 보면 “興國寺”라고 쓰여진 편액이 달린 건물이 대방이다. 보통 사찰을 가게 되면 보제루(普濟樓)니 만세루(萬歲樓)니 하는 이 누각을 지나서 이렇게 사찰로 진입을 하는데, 흥국사는 특이하게 이 대방(大房)이라는 건물이 입구를 떡하니 막고 있다.


그러니까 절 마당에 들어서기 전 다른 절들이 세워놓은 누각 대신 흥국사에는 다목적으로 쓸 수 있는 복합 공간으로 대방을 세웠다.

 

흥국사 사적비에는 이 대방은 임진왜란 이후 불교계에서 일어난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염불계(念佛契)에서 염불 수행을 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라고 적혀 있다. 그래서 아마 이곳도 수행 공간이지만 염불(念佛)도 하고 또 간경(看經)도 하고 또 조선유교의 교리인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대해서 경학(經學)도 하곤해서 불교와 유교의 교리를 경험하고 배우는 곳이다. 그러니까 쉽게 표현하자면 현대식의 불교·유교 종합문화 복합 공간인 것이다.

조선 후기, 정토염불(淨土念佛) 사상이 크게 성행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만든 곳으로 염불과 수행을 같은 공간에서 할 수 있도록 다목적으로 조성된 대방으로 흥국사에서 가장 큰 전각이기도 하다.

 

대방의 외관은 가운데 가장 큰 방을 두고 양쪽으로 치자 돌기 부분에 법당과 누각, 승방과 인법당, 부엌까지 갖추고 있어 왕가에서 찾아와도, 큰 행사가 있어도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조선시대 불교 종합문화 수행 공간인 셈이다.

대방 입구의 현판에는 강한 힘과 기운이 느껴지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유학을 중시하던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 왕가의 흔적이 사찰 입구부터 보인다.


신라의 대승 원광법사에 의해 생겨났지만 대대로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던 사찰인 동시에 조선시대엔 왕실의 원당사찰이었던 흥국사이다,
조선 후기 순조와 흥선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호위를 받아 흥국사를 찾아온 왕족들은 이 대방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염원했을 것이다.

 

대방의 정면에서 대방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법당 마당쪽에서 대방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부처님을 모시고, 그 좌우에 석존이 태어나서 열반에 이르기 지의 과정을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있다. 대방에 부처님을 모신 경우는 흔치 않다. 아마도 왕가에서 찾아와도 이곳에 머물며 부처님을 가까이 뵙게 되는 편의를 제공한 인법당(因法堂)이다 .

 

왕 또는 왕비 등 왕실의 귀한 분들이 오시면 법당에 직접 가서 예를 올려야 되는데, 그 어떤 여러 가지 신변에 제약이 있어, 신변 보호도 있고 해서, 여기에 인법당(因法堂)을 조성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실내에 작은 부처님 공간을 인법당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제 조용하게 기도하고 또 법문도 듣고 또 독경하고, 염불도 하고 해서 신앙생활을 했던 그런 곳이 바로 인법당이다. 즉, 부처님하고 같이 사는 법당이다.

☆인법당(因法堂 :불당이 따로 없는 작은 절에서 승려가 거처하는 방에 불상을 모신 곳)

대방에선 규모 있는 그림도 경전도 제작했다. 특히 흥국사의 불화는 세밀하고 아름답기가 극에 달했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데, 흥국사가 화사양성소(畫師養成所) 또는 경성화소(京城畫所)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화사(畫師) 양성소이자 경전을 편찬하는 장경 도량이었기 때문이다.

또 인법당 맞은 편엔 주방 공간이 있다. 예부터 접객(接客)을 위해 사용해온 공간인데 지금은 현대식 부엌으로 탈바꿈되어 있다.

 

대방의 창을 열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대웅전이 정면으로 보인다. 왕실에서 방문했을 때는 이곳에서 대웅전을 향해 예불을 드리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대방의 현판에서 흥선대원군의 필체를 만났고, 대웅전 지붕 위 잡상에서도 왕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참고: <대방(大房)>

사찰을 찾는 승려와 신앙인들이 증가함에 따라 ​요사채의 규모도 점차 확대되었으며, ​ 보다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변화화되었다. ​ 대방은​ 사찰마다 건축 용도와 기능에 따라 누방(樓房), 법당(法堂), 누(樓) 등의 명칭이 사용되었다. 대방건축물(大房建築物)은 접객과 집회를 위한 큰 방이다.

 

 

2. 대웅보전(大雄寶殿)

대방의 뒤편, 대방과 마주 보는 자리에는 견고한 석축 위에 쌓아 올린 흥국사의 주불전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자리하고 있다.

공작의 날개처럼 펼친 팔작지붕 한가운데에는 청색의 기화 한 장이 눈에 띈다.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에만 올렸다는 청기와도 흥국사 대웅전이 조선 왕실의 의미 있는 사찰이었다는 걸 알려주는 표식이다.

특히나 소맷돌에 있는 태극 문양과 용마루 끝에 있는 잡상도 또 눈에 띄어. 역시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구나 라는 걸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사찰 용마루에 중앙에 한 장 올린 이런 청기와는 또 다른 의미로는, 본존 법당지붕 전체를 청기와로 덮을 수 없어서 중앙에 한 장의 청기와를 얹기도 하고, 이 건물에는 지존(至尊)이 계심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웅전 안에는 인체비례와 비슷하게 조성했다는 아담하고 기품 있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가운데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배치된 목조 삼존불 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마치 세 분의 부처님이 구름 속에서 내려오는 3D 입체 영화의 한 장면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18세기 중반 조각승인 상정스님 또는 그 제자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존불은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중생을 바라보는 것처럼 앉아 있다.
그리고 세 분 모두의 뒤에는 눈에 띄게 환한 금빛 광배가 조성되어 있다.

나무로 조각하고 금으로 덧씌운 광배는 입체감이 더해진 화불(畫佛) 장식이다. 일반적으로 후불탱화를 안치하는 데 반해, 금빛으로 활활 타오르는 듯한 원통형 목조광배를 둔 것은 흥국사만의 특징이다.

멀리서 보면 불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하나가 화불(畫佛) 장식이다.
흰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과 연꽃 위에 석가모니, 푸른 사자를 탄 문수보살이, 그리고 주변에는 영락(零落)으로 중간중간에 아름다운 구슬로 장식하고 있다. 마치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화현(化現)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런 금빛 광배는 흥국사가 유일하다.

그리고 뒤에 금빛광배는 불같이 활활 타오르게 표현했다. 이것은 화염화광(火焰火光) 이라고해서 부처님의 광명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서, 일체 중생들이 다 이 광명으로 편안함을 얻도록 이끄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흥국사 대웅보전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삼존불 양쪽 옆으로 배치된 불화이다. 이 불화의 완성도는 여느 사찰과는 다르다.
덕절 스님들은 불을 지피면서 부지깽이로 시왕조를 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흥국사는 조선 후기 금강산 유점사와 함께 손꼽히는 화승 양성소였기 때문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갈고닦아 깨달음을 얻은 사람, 석가모니가 계신 곳, 흥국사 대웅보전에서 일반 백성들 처럼 왕가의 사람들이 고통 없는 세상을 염원했다니 생로병사야말로 평등한 것 아닐까요? 어쩌면 고통을 느끼는 것 자체가 참으로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 <대웅전(大雄殿)과 대웅보전(大雄寶殿)>

“ 사실은 이렇게 세분을 모시면 대웅전이라고 해야한다. 대웅보전은 선종 계통의 절에서 석가모니불을 본존 불상으로 모시는데,

대웅(大雄)은 마하비라(mahāvīra)를 번역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에 대한 많은 존칭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사찰의 중심 건물이다. 보통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신다. 문수는 지혜를, 보현은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는 행원(行願)을 상징하는데, 본존불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을 협시보살(脇侍菩薩)이라 한다.

 

대웅전(大雄殿)의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할 때는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시고, 다시 그 각각의 좌우에 보좌하는 보살을 모신다. 그리고 여러 불상 중에 무슨 부처인지는 인계(印契)로 구별하는데, 인계는 무드라(mudrā)를 번역한 것이다. 인상(印相) · 수인(手印)이라고도 한다. 이는 부처의 깨달음 또는 서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손 모양을 말한다.”

 

 

3. 영산전(靈山殿) :

대웅보전 서쪽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팔작지붕의 전각, 영산전(靈山殿)이 있다.
낡고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기둥에 남아 있는 생생한 용의 조각은 조선 왕실이 각별히 사랑한 사찰의 위용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산전은 석가모니의 설법장인 영산회상에서 유래한 전각으로 대웅보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장식적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산전은 선조가 자신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묘를 조성할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각이다. 그 이유는 영산전에서 바라보면 오른쪽 직선거리에 덕흥대원군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각 곳곳에 왕실의 사랑이 묻어 있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화려한 용 모습 만 봐도 알 수 있다.
왕의 효심일 수도 있고, 나라의 평안을 위한 왕가의 염원일 수도 있지만 한편 무엇에서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 답을 노년에 접어든 흥선대원군이 영산전 기둥마다 적었다는 주련(柱聯)에서 엿볼 수 있다. 兜率夜摩迎善逝 (도솔야마영선서) 須彌他化見如來 (수미타화견여래) 同時同回會如此 (동시동회개여차) 月印千江不可猜 (월인천강불가시)

“도솔천 야마천에서 맞이할 부처님을 이곳에서 만나고,

수미산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서도 여래를 만나네.
같은 시간 같은 모임, 어디에서도 부처를 배우니,

달이 천개의 강을 비치는 뜻을 의심할 수 없어라.”
왕가의 사람들도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어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모두 평안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 마음은 신분과 지위고하가 따로 없었나 보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로 구성하고 정면을 제외한 삼면에 불단을 설치하였다. 중앙 불단의 상부천장은 대웅보전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형식의 닫집으로, 장엄을 베풀고 나머지 불단의 상부에도 보개를 둘렀다. 천장의 어간부는 소란을 댄 우물천장으로 마감하고, 나머지는 빗반자로 마감하였다.

그리고 천장에는 공포를 크게 복잡하지 않은 구조로 설치하면서도 용과 연꽃 등의 조각 문양을 이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는데, 조선 후기의 장식적인 조각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실내에도 불단과 마주 보는 방향에 용 장식을 하였으며, 천장에 학과 연꽃, 쌍 희(囍)[囍: 큰 기쁨과 경사를 상징하는 글자] 자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왕실의 복을 기원하는 장소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상 위 닫집(불단이나 어좌 위에 목조 건물의 처마 구조물처럼 만든 조형물)은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쪽 지붕에는 생멸(生滅)이 함께 없어지고 번뇌 망상이 잠자 버린 경지를 뜻하는 적멸궁(寂滅宮)이라 쓰여 있고, 위쪽에는 내원궁(內院宮)이라 쓰여 있다.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은 수미산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 위에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도솔천, 이곳은 내원과 외원으로 구별되어 있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이 내원은 내원궁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기 삼존불은 현재 국가지정 보물 1798호로 지정이 돼 있다. 소조(塑造) 삼존 여래 좌상으로 흙으로 빚어서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흥국사 영산전은 어찌 보면 흥국사의 모든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의미 있는 공간이다.

 

4. 만월보전(滿月寶殿)
생로병사 중 가장 고통스러운 고통은 무엇일까? 태어날 때의 고통은 나 자신도 모르게 울음으로 해소했고, 늙어가는 고통은 서서히 다가와 고통을 느낄 수 없었고, 죽음은 잠자듯이 오니 오히려 편안해 질 수 밖에 없는데, 생로병사 중 가장 힘든 고통은 아마도 병들어 아픈 고통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런데 이 한 칸짜리 작지만 화려한 만월보전을 보면 그 고통이 사라진다.

 

대웅전 뒤편으로 석축을 쌓아 한 단 높인 대지 위에 세워진 전각이 만월보전이다. 사찰 건물로서는 유례가 드문 육각형 형태의 법당인 만월보전에는 질병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얀 보름달처럼 모습을 한 약사여래 부처가 신비한 이야기를 간직한 채 모셔져 있다.

특히 흥국사 만월보전에 들어서면 빼놓을 수 없는 장관이 있다. 천장을 지긋이 올려다보면 기둥 하나하나가 모두 연꽃이고, 그 연꽃이 모인 연못 같은 천장이 넓게 보면 하나의 별 모양이 된다.
육각형의 전각이어서 가능한 모양인데, 보름달 뜬 밤하늘에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만 같다.

늙고 병드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 흥선대원군의 흔적이 만월보전 주변에도 남아 있는데, 주련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동방 세계의 이름은 만월이니 약사여래불의 그 밝은 기운은 희고 맑다.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정수리 구슬은 산처럼 푸르고, 미간의 백호는 눈같이 희다.” 즉,

東方世界名滿月(동방세계명만월)

-동방세계 이름은 만월이고

佛號琉璃光皎潔(불호유리광교결)

-부처님은 유리. 빛이 희고 맑네.

頭上旋羅靑似山(두상선나청사산)

-머리 위 나계는 산같이 푸르고

眉間毫相白如雪(미간호상백여설)

-미간의 백호상은 백설처럼 희다네.

 

그리고 만월보전 밖에 걸린 축문 현판에는 다음과 같은 분들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다.

주상전하 신묘생(1831) : 철종

왕비전하 정유생(1837) : 철인왕후 김씨

대왕대비전하 기유생(1789) : 순원왕후 김씨 (순조의 아내)

왕대비전하 무진생(1808) : 신정왕후 조씨 (효명세자의 아내)

대비전하 신묘생(1831) : 효정왕후 홍씨 (헌종의 아내)

 

그러니까 이 내용을 보면 1854년 당시 철종은 왕비 외에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등의 여인들을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만월보전 약사여래불은 영험이 좋은 기도 설화가 재미있는 전설로도 유명하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겐 스님이 된 딸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정릉 봉국사(1354년 고려 공민왕3년, 나옹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은 있으나, 1395년 조선 태조4년, 무학대사 자초(自超)가 세운 사찰)에서 약사여래를 모셔 기도하자 씻은 듯 나왔고 소문이 퍼져 봉국사가 유명 사찰이 됐는데,
그런데 어느 날 약사여래불이 사라져 찾아보니 시냇가에 놓여 있었고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약사여래불의 귀에 대고 여러 사찰의 이름을 대어도 움직이지 않다가 남양주 흥국사로 가시겠느냐 물었더니 그제야 움직여 이곳에 옮겨 놓았다는 전설이다.

우리가 하늘의 구름만 보아도 마음 평안해지듯 보름달 같은 약사여래불을 본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치유받지 않았을까 한다.

 

 

[참고]

<약사여래>

약사여래 부처님은 동방 유리광정토(東方琉璃光淨土)의 부처님이다.

서방 극락정토에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다면 약사여래 부처님은 동방의 불국토를 대표한다.

그래서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존으로 왼쪽에 아미타 부처님, 오른쪽에 약사여래 부처님의 삼존불을 모신다.

 

약사여래 부처님은 동쪽으로 10항하사수(十恒河沙數,갠지스강의 모래알 수) 불국토를 지나 정유리광세계(淨琉璃光世界)에 계시다고 한다.

그래서, 약사전을 ‘유리광전(琉璃光殿)’이라고 하며, 또한 동방유리광전 세계를 동방만월세계라고도 부르기 때문으로 약사여래는 만월세계를 이루셨기에 ‘만월보전(滿月寶殿)’이라고도 합니다.

 

약사여래 부처님는 모든 중생들의 질병을 고쳐주고 재앙으로부터 구해주며 나아가 깨달음을 얻도록 도와주시기에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 한다. 그래서, 약사여래 부처님은 주로 약함을 들고 계신다.

 

<약사여래본원공덕경(藥師如來本願功德經)>에 의하면, 약사여래 부처님은 과거에 보살로서 수행할 적에 성불하기 위해 다음의 12가지 대원을 세우셨다.

 

첫째, 부처님의 지혜의 광명이 무량한 세계를 밝게 비치게 하려는 원

둘째, 몸이 유리와 같이 청정하고 광명이 나와 어두운 세계를 비추려는 원

셋째, 중생이 필요한 물품을 다 갖추게 하려는 원

넷째, 중생들이 모두 대승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원

다섯째, 중생들이 삼취정계를 갖추어 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원

여섯째, 장애를 가진 중생들의 몸이 다시 갖추어지게 하려는 원

일곱째, 중생들이 병고가 있으면 병고의 고통이 없어지게 하려는 원

여덟째, 모든 여인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려는 원

아홉째, 삿된 의도에서 벗어나 정견을 얻게 하려는 원

열번째, 구속이나 감옥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의 해방을 얻게하려는 원

열한번째, 중생들이 배고픔과 목마름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원

열두번째, 옷이 없어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훌륭한 옷을 주겠다는 원입니다.

 

이 12대원을 살펴보면, 약사여래 부처님은 단지 병만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 의식주 등 중생의 모든 고통을 해결해 주시고, 결국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인도하는 부처님이다.

 

그런데, 약사여래 부처님 하면 몸의 병만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몸이 아픈 고통의 현실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아시는 부처님이기에 방편(方便)으로 약손을 내미시고 결국 깨달음의 길로 이끄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약사여래를 모시는 곳은 좌우로는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자리한다.

그리고, 12대원을 상징하는 12지 신장(神將)들도 함께 한다.

 

우리가 잘 아는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도 약사여래 부처님이다.

갓바위 부처님은 수험생 가피 도량으로 유명하다. 갓바위 바로 옆 법당 약사전을 유리광전(琉璃光殿)이라 현판이 있다.

갓바위에서의 시험에 합격 소원은 약사여래 부처님의 12대원 가운데 부처님의 지혜를 얻게 해준다고 발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약사전 중에는 창녕 관룡사 약사전, 청양 장곡사 약사전, 의성 고운사 약사전, 남양주 흥국사 약사전이 유명하다.

 

 

5. 시왕전(十王殿)

명부(冥府)는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저승의 세계이다. 명부전(冥府殿)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해서 시왕을 모시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 ·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삭발하고 이마에 띠를 두른 형상을 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입멸하고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까지, 즉 부처가 없는 시대에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이다.


몸이 병들고 나약해지는 것을 아무리 막으려 한들 죽음을 막을 수는 없을 진데,
시왕전은 그 죽음이라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고자 하는 부처님의 자비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지옥문 앞에서 중생을 구제하려고 설법 중인 지장보살과 사람이 죽으면 거치는 10가지 심판대의 심판관, 그 열명의 왕, 시왕을 미리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아마도 시왕전은 사후의 세계를 살아있을 때 보고 경계하여 살아있는 동안 지옥에 가지 않도록 살라는 뜻으로 지은 것 아닐까 싶다.


특히 흥국사 시왕전은 정조 대왕과의 인연도 깊다.
흥국사에서 백일기도 끝에 왕자를 얻은 정조가 부처님께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지어준 전각이 바로 시왕전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피로 태어난 자식의 생을 축하하며 타인의 죽음까지도 자비 얻기를 바랐던 정조대왕, 그 마음이야말로 정조대왕은 부처의 마음을 닮은 것 같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네 가지 고통,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뛰어 넘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불교에선 두 글자로 많이들 이야기한다. 바로 “修行”이다.

☆참고<시왕전>

시왕전에 모셔진 시왕은 저승에서 죽은 사람이 생전에 저지른 죄를 심판한다는 열명의 왕이다. 사람이 죽어서 명복을 빌기 위해 지내는 재는,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7회에 걸쳐 지내는 49재, 또 죽은 지 100일에 지내는 백재(百齋)와 1주년과 2주년에 지내는 소상(小祥)과 대상(大祥)까지 모두 열 번이다.

이 열 번의 근거는 사람이 죽으면 저승의 시왕 각각에게 심판을 받게 되는데, 심판을 받을 때마다 재를 올린다는 명부시왕신앙에 의한 것이다. 명부전은 지장신앙과 명부시왕신앙이 결합되어 생긴 건물이다.

 

 

 

6. 나한전(羅漢殿)

조선의 왕실이 사랑한 천년 고찰 남양주 흥국사에 가면 왕족부터 천민까지 평등하게 고민했을 화두, 생로병사를 생각하게 한다. 석가모니처럼 생로병사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여기 나한전에 모셔진, 삼존불과 16명의 나한은 이미 수행으로 지혜를 갈고닦아 생로병사를 초월한 분들이다.

나한, 그들이 추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게 한다.
“上求菩提(상구보리) 下化衆生(하화중생),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라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여기 모셔진 나한들은 15세기 초에 만들어졌다는 것에 비해, 나한들의 색감과 모습이 마치 어제 안치한 것처럼 선명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미려(美麗)하다. 우스꽝스럽기도, 무섭기도 한 다양한 표정에선 인간 삼라만상(參羅萬像)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나한전의 16나한의 한 가운데에는 흙으로 직접 빚었다는 소조 석가불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석가여래상은 신체가 날씬하고 얼굴이 갸름해, 조선시대의 풍채 좋고 둥글둥글한 부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수행자의 모습과도 닮은 듯 싶다. 그래서 인지, 삼존불은 수척하고 침울한 모습이다. 이렇게 그려지는 것은 15세기 불상의 특징이라고 한다. 아마 그시대의 시대상을 표현되는 기록일지도 모른다. 모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다.

 

여기 삼존불과 16나한은 1650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하니 무려 370년 넘는 세월,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지혜를 닦고자 하는 마음과 자비심을 느끼게 했을까?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보물로 지정된 16나한상은 우리나라에서 일괄 문화재로 전해오는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599년에 원광법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흥국사의 나한전 벽그림은 원광법사가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주는 모습이다. 창건자의 행적을 벽화에 그려 넣은 것도 흥국사가 유일하다.

 

7. 단하각(丹霞閣).

정면 1칸 측면 1칸의 납도리 맞배집으로 대웅보전 뒤쪽에 ‘단하각(丹霞閣)’이 위치하고 있다.

단하(丹霞)라는 당호를 사용한 스님이 어디 당나라의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 스님뿐이겠냐 마는 단하각하면 아무래도 단하소불(丹霞燒佛)의 고사로 유명한 당나라의 단하천연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 스님은 파격적 수행관으로 유명하였고, 말년에는 단하산(丹霞山)에 들어가 수행한 선승이다


다시말하면 현판의 '단하(丹霞)'가 무엇을 뚯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단하(丹霞)는 단하소불(丹霞燒佛) 고사의 주인공이다.

일찌기 중국 낙동(洛東) 혜림사(慧林寺)에서 목불(木佛)을 깨 부숴서 불에 태워 추위를 피한 단하는 불상(佛像)에 무슨 법이 있겠는가?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논설을 펴서 ‘목불을 깨 사리를 구한다’는 선가의 선종(禪宗)이 된 바 있는 분이다.

또 다른 전설은 단하가 사리를 얻기 위해 목불을 쪼개 불을 땠다는 단하소불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육조시대의 단하천연 선사를 모신 것이라면 선종(禪宗)과 연관이 있는 전각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산신을 모시고 있다. 산신각인가?

 

추론해 보건데, 우리나라에서 단하각으로 유명한 사찰은 부석사와 통도사 극락암인데, 이 사찰들은 단하각에서 전형적인 나반존자상을 봉안하고 독성기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남양주 흥국사와 서울 성북구 미타사에도 단하각은 있는데 이곳에는 산신이 모셔져 있다. 아마도 육당 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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