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흥대원군의 묘(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중종의 여덟 번째 아들 덕흥군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없는 서자였다.
하지만 덕흥군은 사후에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 됐다. 왕이 된 아들 선조가 명당을 택해 다시 조성한 묘가 지금의 자리이다.
대원군, 그러니까 왕위를 이을 후손이 없을 때 그 가장 가까운 가문의 사람을 뽑아서 왕위를 또 잊게 하는데, 그 왕자의 아버지를 대원군이라는 군호를 붙여준다.
보통 능이라고 하면은 왕과 왕비가 묻힌 곳을 능으로 하고, 그 친족들이 묻힌 곳을 원이라고 하고, 또 폐위가 되든지, 후궁등이 묻힌 곳을 묘라고 한다.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1530-1559)은 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와의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그는 제12대 인종의 이복동생이자, 제13대 명종의 이복형이다.
아홉 살 때 덕흥군(德興君)에 봉해졌으며, 열세 살 때 정인지의 증손녀와 혼인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훗날의 선조를 포함한 아들 3명과 딸 1명을, 첩에게서도 딸 1명을 더 얻었다.
선조의 친아버지였던 그는 조선 왕실 최초의 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선조는 실제 혈통으로는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지만 명종의 양자가 되어 왕위에 올랐다.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후, 아들을 낳지 못한 명종은 조카들을 종종 궁으로 불러들였는데 그 중 아버지를 일찍 잃은 덕흥군의 세 아들에게 특히 관심을 많이 주었다. 명종이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자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보위를 이었는데 바로 선조다.
덕흥대원군은 선조가 즉위한 2년 후인 1569년(선조 2) 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그러나 왕으로까지는 추존되지 못하였다. 훗날에 덕흥대원군의 증손자인 인조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선조의 5남)을 왕으로 추존했던 것과는 비교가 되는 대목이다.
비록 왕으로 추존되지는 못했으나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후손들은 도정궁(都正宮)이라는 궁호를 받고 선조의 부모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의 제사를 대대로 받들었다.
덕흥대원군묘는 그가 왕의 사친이었음에도 원(園)으로 승격되지 못하고 묘(墓)로 남았다. 이는 후대의 대한제국 때 고종의 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순종에 의해 흥선대원왕으로 추존되고 묘도 흥원(興園)으로 승격된 것과는 대비된다.
덕흥대원군묘는 언 듯 보아 잘 관리 되지 않은 듯하게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모셔진 능 앞의 경사가 꽤 있어서 그렇게도 보인다. 덕흥대원군 묘를 가기 전에, 두기의 묘가 있다.
덕흥대원군 이초(李岧)의 아들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의 묘이다. 이는 선조의 맏형이다. 하원군 오른쪽에는 남양군 부인 홍씨가 함께 모셔져 있다.
왕실 묘라서 문무석이 좌우에 잇고, 장명등도 있으며, 제사를 지내는 상석도 있다.
덕흥대원군, 이초(李岧)는 3남을 두었다. 장남은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 차남은 하릉군(河陵君) 이인(李鏻), 막내가 하성군(河城君) 이연(李昖)이다. 장남 하원군은 덕흥대원군을 모셨고, 차남 하릉군은 후에 숙부 금원군(錦原君)에 양자로 갔으며, 셋째 하성군이 조선 제14대 선조왕이다.
이 하원군 묘 위쪽에 덕흥대원군 묘가 있다. 묘앞에는 거북이가 신도비를 받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왕실묘라서 장명등, 상석, 석등, 문무석이 있다.
여기에도 대원군 부인 홍씨 묘도 함께 있다. 좌측, 대원군묘, 우측, 부인 홍씨묘이다.
덕흥대원군묘는 흔히 덕릉(德陵)으로 불리는데 이는 잘못된 명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덕흥대원군묘 근처의 고개 이름이 '덕릉고개'로, 인근에 위치한 마을 이름 또한 '덕릉마을'로 불리고 있다.
한편, 중종의 후궁으로 덕흥대원군의 어머니이자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 안씨의 묘는 서울 동작동 현충원 내 김영삼ㆍ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 근처에 있는데, 이는 원래 창빈 안씨 묘역이었던 곳 일부 내지는 가까이에 전 대통령들의 묘를 조성한 때문이다.
1567년 조선의 제13대 임금 명종은 후사를 두지 못하고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때문에 명종의 이복형인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선조가 왕이 되까지 과정은 별도 참조>
그가 바로 조선의 제14대 임금 선조이다. 선조는 즉위한 뒤 흥국사에 덕흥대원군의 원당을 짓고 생부의 묘를 덕릉으로 추존하는데,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이에 선조는 묘책을 내어, 왕실 땔감을 대는 사람들에게 어디를 지나서 이곳으로 왔느냐고 물어서 덕묘를 거쳐 왔다고 하면 원래 가격으로 사서 보내고, 덕릉을 지나왔다고 답하면 땔감을 시세보다 후하게 쳐주고 사도록 했다.
이러한 선조의 효심 덕분인지 사람들은 덕흥대원군묘는 덕릉으로 흥국사는 덕절로 부르기 시작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이 묘를 능으로 부르지 못한 선조의 그 안타까움이 나타나다. 하지만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신하들과 부딪히기보다는, 또 민심을 아우르면서 민심을 감싸면서, 결국 이렇게 덕릉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부르는데 이 선조의 그 묘책이 참 대단한 것 같다.
<중종 – 덕흥대원군 - 명종 – 선조>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뒤를 이어 중종이 왕이 되었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이자 인종의 모후인 장경왕후 윤씨는 인종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그 후 중종의 두 번째 계비로 궁에 들어온 문정왕후 윤씨는 세자인 인종(전처 장경왕후 소생, 세자)을 친아들처럼 대하고 인종 역시 문정왕후에 대한 효성이 극진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자신이 낳은, 중종의 둘째 아들인 경원군(후에 명종)을 낳은 후로 태도가 돌변했다. 경원군은 자랄수록 총명하고 의젓해졌다. 게다가 세자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때부터 문정왕후와 그의 오빠 윤원로, 동생 윤원형 등의 소윤 일파는 왕의 자리를 탐내기 시작했다. 이는 세자 비호 세력인 대윤(윤임 일파)과의 정치적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중종이 죽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윤과 소윤의 정치적 대립은 일단 대윤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마음이 급해진 문정왕후와 소윤(윤원형 일파)은 인종 왕이 후사가 없으니 경원대군(명종)을 세제로 책봉해 종사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다.
그런데 세제 책봉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인종이 8개월의 짧은 치세를 끝으로 죽고 말았다. 인종은 죽기 전 경원대군에게 전위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결국 경원대군을 왕으로 삼고자 했던 문정왕후와 소윤 일파의 꿈은 이루어졌다.
1545년 7월 6일 명종이 즉위했다. 이때 나이 12세였다. 너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일파가 정치 전면에 드러나면서 실세로 부상했다.
명종의 비는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로 심강(沈鋼)의 딸이다. 1542년(중종 37)에 경원대군과 혼인했으며, 명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에 책봉되었다.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는 1551년(명종 6)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다. 순회세자는 명종의 유일한 자식이다.
1557년(명종 12)에 7세의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었고 2년 후 윤옥(尹玉)의 딸과 혼인까지 했으나 1563년(명종 18)에 1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었다. 명종은 6명의 후궁을 두었으나 그 사이에서는 모두 자식을 보지 못했다.
명종이 본격적으로 직접 통치를 좀 하려고 했는데 하나뿐인 세자가 13살에 죽어버리니 명종은 멘탈이 붕괴가 돼 버린다.
맨날 술만 찾으니 아빠의 심정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렇지만 현실은 현실 물론 아들을 계속 낳으려고 시도는 했을 것이고 혹시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서 백업 플랜을 준비를 했다.
명종은 저기 우리 집안 족보 갖고 와 봐! 우리 아빠 중종의 손자들 중에 하나를 내가 한번 뽑아볼까?
왜냐하면 중종의 아들은 안 되잖아요. 그럼 자기랑 똑같은 형제 레벨이니까.
선대왕 중종의 서자들이든지, 후궁들 많으니까 서자들 중에 한 명 뽑으면 명종 자기와 같은 형제 레벨이라서 어려웠다.
그러니까 그건 안 되고 중종의 손자 중에 하나 누구 없나?
중종의 첫 번째 부인 7일 동안 왕비였던 단경왕후는 아들이 없었다.
중종의 두 번째 부인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다가 며칠 후에 산후 관리 잘 못해 가지고 인종 8개월 만에 돌아가심.
문정왕후, 그러니까 이 중종의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는 명종을 낳는다.
명종은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는다. 근데 그 순회세자가 13살에 죽는다.
명종은 후손이 없으므로 차기 왕을 찾는다. 그러면 우리 아빠 중종 후궁들 중에 한번 찾아보자. 후궁들 내가 봤을 때는 우리 아빠 후궁 중에 한 명인 창빈 안씨, 창빈 안 씨와 우리 아빠 중종사이에 태어난 아들 덕흥군이 있네. 그러니까 명종 입장에서 봤을 때는 배달은 형제죠.
우리 아빠 중종과 창빈 안씨라는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덕흥군이라는 이 왕자, 서자이다.
명종 입장에서 봤을 땐 배다른 형제 이 덕흥군의 아들, 세명 얘네들이 좀 괜찮은 것 같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자기 배다른 조카들이다. 애들 좀 불러요. 조카들 좀 오라고 해봐요. 이렇게 해서 덕흥군의 3형제를 부른다.
(장남 : 하원군 이정(河原君 李鋥, 1545 ~ 1597). 차남 : 하릉군 이인(河陵君 李鏻, 1546 ~ 1592) - 금원군의 양자로 출계. 장녀 : 광양부인 이명순(廣陽夫人 李明順, 1548 ~ 1637). 사위 : 안황(安滉). 3남 : 하성군(河城君). 선조(宣祖, 1552 ~ 1608) - 명종의 양자로 출계)
“어, 앉아라.” “네, 전하” “자, 내가 모자를 벗을 것이다.”
(익선관이라고 해서 왕이 쓰는 모자)
너희들 세형제들 이거 한번씩 써봐라 그랬더니 큰 놈, 둘째 놈은
“사이즈가 딱 맞습니다. 너무 좋은 모자인 것 같습니다.“
했는데 세 형제 가운데서 막내인 하성군은 안 썼디.
명종이 물어본다. ”하성군, 너는 왜 이 임금 모자를 안 쓰나“ 그랬더니 하성군의 ”전하 어떻게 임금이 쓰시는 것을 신하가 감히 쓴단 말입니까?
저는 못 씁니다.“ 그렇죠 임금이 쓰는 모자 임금이 입는 옷 그건 임금만 쓰고 입어야 됩니다.
여기에서 명종이 감동을 받았다. 아마 형 두 명은 갑자기 앞이 깜깜해졌을 것이다.
아, 이걸 내가 왜 썼을까?
명종은 다음 질문을 합니다.
그 하성군에게 ”저기 하성군아, 임금과 아비 중에 아버지 중에 누가 더 중요하냐?“ 그랬더니 하성군의 대답은
”전하 임금과 아비는 일단은 다 다릅니다.
하지만 임금에 대한 충(忠)과 아버지에 대한 효(孝)는 같습니다.“
충효는 같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마 여러분 같으면 임금 앞이니까, 임금이 더 중요하다고 했겠죠.
조선은 유교 국가인데 충효가 같은 레벨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에 명종이 감동을 합니다. 바로 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아직 제다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또 아들을 낳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어쨌든 하성군을 명종이 가까이 지내게 합니다.
가서 하성군 좀 불러오도록 하여라. 응 너 한번 시 한 번 져봐라. 너 나랑 오늘 한번 술 한잔 할래? 등 명종은 하성군을 늘 가까이 불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까 신하들 사이에서는 다음 왕은 후보는 하성군이다라고 쑥덕쑥덕 했습니다.
그런데도 대신들 사이엔 이런 말이 돌아요. 왕이 되기엔 너무 먼 거 아니야? 그렇죠 차라리 지금 명종의 후궁의 아들이면은 굉장히 왕의 순위 계승 순위가 가까울 건데. .
이런 가운데 갑자기 갑자기 명종이 병에 걸립니다.
아 그리고 갑자기 오늘 내일 오늘 내일 해요.
이때 영의정이 누구였냐면 이준경이었다. 을묘왜변 때 그 왜구들 다 쫓아내가지고 박살 낸 그 문인 겸 장군 이준경 이분이 지금 현재 영의정이다.
병세로 오늘 내일 오늘 내일 하는 왕한테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다음 왕은 누구로 정하셨습니까? 명종은 아직 안 정했다 이렇말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명종에 병이 악화가 돼 버립니다. 다시 영의정 이준경이 달려갑니다.
전하 다음 왕은 누구로 정하셨습니까? 그런데 명종은 병세가 너무 악화가 돼서 말을 못합니다. 의식은 있는데 말은 못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부인 심씨 중전마마한테 묻습니다.
이준경이
”중전마마 혹시 다른 말씀 없으셨습니까?
주상전하가 다음 왕은 누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 없으셨습니까?“
그랬더니 중전인 심씨가 ”아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주상께서 얼마 전에 하성군을 다음 왕으로 하라. 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종은 누워있으면서도 그 말을 다 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을 못하니까. . 과연 이것이 명종의 진짜 의도였을까요?
말을 못해요. 그때 중전이 이런 말을 한 거 참 어떻게 보면 조선의 역사를 바꿔버린 것입니다.
”주상께서 하성군을 다음 왕으로 하라고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직 명종 죽지 않았습니다. 숨은 붙어 있었고 눈은 뜨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의식이 있었는데 말을 못하는 상황.
그러니까 지금 영의정 이준경과 중전이 오고 가는 대화하는 얘기를 다 듣고 있습니다. 과연 그게 명종의 뜻이었을까요?
그러니까 명종이 직접적으로 하성군을 다음 왕으로 난 정한다라고 공식적으로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걸 명종대신 중전이 얘기한 것뿐입니다.
그게 과연 진짜 명종의 뜻이었는지 아닌지 하여간 이렇게 하여 다음 왕이 중전에 의해서 결정이 된 다음에 1567년 명종 22년 죽습니다. 당시 나이가 34살 그렇게 뭐 일찍 죽은 건 아닙니다. 보통 조선 왕의 평균 수명이 한 38세 40세를 못 넘겼으니까.
명종, 그 평생 그 기센 엄마 문정왕후 밑에서 그 기도 못 펴고 살다가 자기 정치 좀 해보겠다고 하는 순간 2년도 못 채우고 바로 죽어버린 불쌍한 왕.
명종 다음 왕은 누구냐 바로 이제 그 중전에 의해서 너 라고 지목이 된 하성군인데,
이 하성군은 조선 왕위 계승 가능성 제로였습니다.
하성군은 중종의 손자죠. 여러 명 손자 가운데서 가장 왕위 계승 순위가 가능성이 없는 그런 손자가 얼떨결에 왕이 됐습니다.
그 왕이 바로 조선 제14대 왕 선조 입니다.
이 선조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 씨의 자손인데 이후로 모든 조선의 왕들은 다 창빈 안 씨의 후손들이에요.
창빈 안씨 능 묘 무덤이 어디 있을까요? 놀랍게도 지금 국립현충원 동작동 국립묘지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이제 창빈 안씨의 묘를 만들었고 그걸 나중에 본 이제 풍수하시는 분들이 가만히 봐도 저 자리가 진짜 좋은 자리인 것 같아 지금 동작동 거기가 그래 가지고 창빈 안 씨의 묘 주변에 동작동 국립묘지를 만들었습니다.
선조는 열여섯 살의 나이에 와위에 올라요. 왕 수업, 세자 수업이라는 것이라는 건 받아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일단 집권 초기는 좀 불안불안해서 그 명종 부인, 하성군을 다음 왕으로 우리 남편이 얘기했습니다. 라고 했던 그 명종 부인 심씨가 6개월 동안 수렴청정을 합니다.
주변에서는 그 따가운 시선으로 봅니다. 저거 또 문정왕후와 같은 수렴청정이 나오는 거 아니야? 모두 그 눈치를 보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바로 6개월만 하고 권력을 다 어린 선조에게 넘겨줍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선조 그는 임진왜란, 이순신과의 그런 질투 때문에, 원균을 총애헀던 선조를 굉장히 무식하고 멍청한 왕으로 알고 계시고 있지만,
아닙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질투하고 도성을 버리고 바로 도망가고 하는 나쁜 왕이지만 굉장히 좋게 말하면 머리가 좋았고 나쁘게 말하면 잔머리가 팽팽팽 돌아가는 똑똑한 왕이었다.
그 증거로 명나라 사신이 왔습니다. 조선에 지금 어린 왕이 들어섰다고 하니까 ”아 우리 사람 와가지고 체크해야 된다 해.“
”조선에서 쿠테타 반란이 일어나면 아 우리 명나라 머리 아프다 해.“
근데 막상 어린 16살짜리 왕을 딱 만나서는 명나라 사신이 선조와 몇 번 대화를 해보니까 너무 똑똑한 거였습니다.
선조에 대해서 명나라 사신이 이런 말까지 남겼다.
”조선은 어린 국왕이 총명해서 동북의 복이다 동북아시아의 복이다.“라고
극찬이에요. 역대 명나라 사신들은 웬만해서는 좋은 소리 안 합니다.
왕의 충성이 부족하다는 둥, 뭐 대충 대부분 이렇게 안 좋은 트집을 잡는데 동북아시아의 복이다.라고 했으니, 총명한 왕이기 때문에 시작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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