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국 사찰 & 함께 가고 싶은 곳
여행-충남

예산 수덕사(修德寺)

by phd100 2016. 1. 13.

 

 

가야산 남쪽 덕숭산(德崇山, 495m)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 누구나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고 수덕사에 얽힌 전설을 알면 다시 가보고 싶어지는 곳이다.

 

신라 진평왕 21년(599)에 지명법사(智命法師)가 창건하고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중건한 절이다.(또 다른 설로는 백제말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하고 고려 때 나옹화상이 중건했다고도 한다.)

조선 26대 고종 때 경허스님과 만공선사(滿空禪師)가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도장으로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 또는 선지종찰수덕사(禪之宗刹修德寺)로 불리운다.

경내의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창건된 확실한 고려 건축물이다.(1937년 수리 할 때 묵서명(墨書銘)의 발견으로 건축연대가 확인됐으며, 풍기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강릉 객사문과 함께 고려 건축물의 대표작이다.)

 

수덕사에는 수덕각시의 옛 전설이 있는데 대웅전을 바라보아 왼쪽 옆으로 덕숭산 등산로로 가는 입구에 쪼개진 큰 바위 앞에 관세음보살 입상이 있고, 그 곳에 조그만 판에 전설이 적혀 있다.

수덕관음바위에 대한 전설이다. 이곳은 관세음(觀世音) 보살(菩薩)이 현신(現身)하신 성역이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伽藍)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大重創佛事)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스님들은 불사금(佛事金)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妙齡)의 여인 하나가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供養主, 절에서 시주도하고 밥을 짓는 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은 미모가 빼어난 미인인 지라 수덕(修德)각시의 이름으로 절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심산궁곡(深山窮谷)인 수덕사에 이 미모의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연일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신라의 대 부호(大富豪)요, 재상(宰相)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청년이 이 사실을 알고 찾아와 청혼(請婚)을 하였다. 그러나 수덕각시는 ‘저는 불사를 위해 공양주하는 몸이니 이 불사가 원만히 성취되면 청혼을 받아 들이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정혜 청년은 자기 가산(家産, 재산)을 내놓아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어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大功德主, 불사에 큰공을 세운 분)로 참석한 이 청년은 약속대로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수덕각시는 ‘부엌에서 일하느라고 구정물 묻은 이 옷을 갈아입을 말미를 주소서’ 하고서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한 참을 기다려도 기척이 없자, 이 청년은 그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수덕각시는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당황한 청년은 그 여인을 쫓아가 붙잡으려는 순간 그 여인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졌다.

그리고는 여인이 그 바위 틈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청년은 수덕각시를 잡으려고 하자, 수덕각시의 버선 한 짝이 벗겨지고는 갑자기 흰 연기가 앞을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더니,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벌어진 바위하나만 댕그러니 남았다.

 

이에 모든 것을 포기한 정혜청년은 수덕사 뒷산으로 올라가 움막을 짓고 불가에 귀의하게 되었으니 그 자리가 지금 정혜사 자리라 여겨져 이 곳에 암자를 지어 이 암자의 이름을 정혜사라 부르게 되었고, 그 후 갈라진 바위틈사이에서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피었다. 이 수덕사의 절 이름도 이 수덕각시의 이름에서 따와 수덕사(修德寺)라 부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수덕각시가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 바위를 관음 바위, 또는 수덕각시 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신 이 수덕사에서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게 되어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와 기도하는 인적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또 하나의 전설(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