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국 사찰 & 함께 가고 싶은 곳
여행-경북

포항 구룡포~호미곶. 연오랑과 세오녀(延烏郞 細烏女)의 전설을 따라

by phd100 2014. 1. 24.

 

 

연오랑과 세오녀(延烏郞 細烏女)의 전설을 따라 경북 호미곶에서 구룡포까지  

★ 호미곶(虎尾串) : 경북 포항시 장기반도 끝, 영일만을 이루면서 돌출한 곶에 호미곶해맞이광장에 상생의 손이 바다와 육지에 손이 하나씩 있는데 이를 '상생의 손'이라 부르느 조형물이 있는 곳이다.

 

동외곶(冬外串) · 장기곶(長鬐串)이라고도 한다. 원래 생김새가 말갈기와 같다 하여 장기곶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때는 장기갑(長鬐岬)으로 불리다가 그 후 장기곶(長鬐串)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다 2001년에 ‘호랑이 꼬리’라는 뜻의 호미곶(虎尾串)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꾸었다.

 

조선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가 《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秘錄)》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으로 백두산은 코, 이곳을 꼬리에 해당한다고 묘사하였다.

 

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내륙 쪽은 해발고도 200m의 산지지만, 대보리(大甫里) · 구만리(九萬里) 사이에 어촌이 발달해 있고 약간의 농경지도 펼쳐진다. 해안에서 2km까지는 수심 약 40m 정도이며 대보리에는 국립등대박물관이 있다.

 

 

★ 구룡포(九龍浦) : 한반도를 호랑이에 비유한다면 구룡포는 호랑이의 꼬리, 즉 등 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꼬리의 위쪽 끝 부분은 호미곶이지만, 동해와 만나는 한반도의 동쪽 끝은 구룡포 석병리이다.

호미곶-구룡포 해안선을 훑으면 구룡포의 탄생을 짐작할 수 있는 자연의 기록을 만난다.

구룡포해수욕장 인근에 마치 용이 불을 막 내뿜은 듯 주상절리와 판상절리가 자리 잡고 있다. 용암이 급격하게 냉각 수축되면서 5, 6각형 모양의 현무암 조각들이 층을 이룬 것이다. 바다에서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1마리가 떨어졌다는 구룡포의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신생대 화산활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투명한 동해바다로 스며들고 있다.

 

또 구룡포읍과 호미곶면의 경계에 위치한 다무포 앞바다는 고래 서식지로 유명하다.

그런데 고래는 울산, 대게는 영덕, 오징어는 울릉도이고 보니 이젠 남은 건, 구룡포는 과메기밖에 없다.

 

구룡포해수욕장 인근의 주상절리, 대보면과 구룡포읍 경계에 위치한 고인돌, ‘목선(나무배)’을 만들던 조선소,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와 머구리(해남), 하루 세 번 어판장이 열리는 구룡포항의 모습은 너울대는 동쪽 바다의 매력을 한없이 부풀린다.

 

조선 말기까지 말을 기르던 목장의 흔적을 찾는 것도 구룡포 여행의 백미다. 말을 가두기 위한 돌울타리가 구룡포에서 눌태 구릉지, 응암산, 공개산 서북쪽을 걸쳐 동해면 흥환리까지 약 8km의 장기반도를 가로지르고 있다. 여지도, 경주도회자통지도 등 고지도에도 나오는 돌울타리는 길이 12km, 높이가 3m에 달했으며 아직까지 약 5.6km의 구간이 남아 있다.

 

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의 해안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말봉재 정자에 올라서면 우리 땅 동쪽의 눈부신 어항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연오랑과 세오녀(延烏郞 細烏女) 이야기>

이 얘기는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과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옮겨 실려 전해 온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4년인 157년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바위(혹은 물고기라고도 한다)가 나타나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러자 이를 본 일본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다.”라고 하여 연오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일본제기(日本帝記)』를 살펴보면, 이 무렵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었다. 연오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지, 진정한 왕은 아닐 것으로 추측)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세오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하고 역시 그 바위에 올라갔다.

그랬더니 그 바위도 전처럼 세오를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서 연오 왕에게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다시 만나게 되었고, 세오는 귀비(貴妃)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는 현상이 나타났다.(아마 일식으로 생각)

일관(日官, 하늘의 조짐을 살피고 점을 치는 일을 담당한 사람)이 말하였다.

“해와 달의 정기가 신라에 내려와 있었는데, 지금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가져 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괴이한 변고가 생긴 것입니다.”

 

왕은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에게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연오가 말하였다.

“내가 이 나라에 도착한 것은 하늘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오. 그러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 대신 내 왕비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곧 비단을 내려주었고 사신은 돌아가 이 일을 아뢰었다. 그리고 그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이 났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보관하고 국보로 삼았으며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고 하였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영일만이 있는 이곳 호미곶 근처가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연오와 세오의 이동으로 일월이 빛을 잃었다가 세오의 비단 제사로 다시 광명을 회복하였다는 일월지(日月池)의 전설과 자취는 지금도 영일만에 남아 있다.

 

 

 

 

 

'여행-경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천 섬계서원(剡溪書院)  (0) 2015.01.27
경주 이견대(利見臺)  (0) 2015.01.27
경주 기림사(祇林寺)  (0) 2015.01.26
경주 골굴사(骨窟寺)  (0) 2015.01.26
경주 감은사지(感恩寺址)  (0) 201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