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 다시 벼슬에 뜻이 없었다. 이에 산수 사이에서 소요하고 강과 바다에서 노닐었으니, 누대와 정자를 지어 소나무 · 대나무를 심기도 하고, 글을 읽고 시를 읊조리며 한 세월을 보냈다.
저 경주의 남산, 강주(지금의 의성)의 빙산, 합주(지금의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지금의 마산)의 별서(別墅) 따위가 모두 그가 노닐던 곳이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청량사(淸凉寺)는 “월류봉 아래에 있다. 일찍이 최치원이 이곳에서 노닐었다(在月留峯下 崔致遠 嘗遊于此)”는 구절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면 청량사는 신라 말기 이전부터 있던 옛 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의 자취가 씻은 듯이 사라진 새 절이다.
여러 해에 걸친 불사(佛事)로 ‘깨끗이’ 새 단장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볼 게 없을까 미리 속단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아마 최치원도 머리를 조아렸을 불상과 탑과 석등이 엄연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매화산 월류봉의 풍광이 너무도 그윽하니 말이다.
청량사에서는 가야산 국립공원 입장료만 받는다. 주차료는 받지 않는다. 해인사 관람 영수증이 있으면 그날에 한해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석조여래좌상>
불상의 손 모습 가운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 있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 왼손을 가부좌한 발 위에 가볍게 올려놓고 오른손은 손등이 보이도록 무릎 아래로 슬쩍 늘어뜨린 모습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상징하고 있으며, 따라서 석가여래의 고유한 자세라는 게 기본적인 설명이다.
발생은 그렇더라도 항마촉지인이 석가를 초월하여 깨달음 그 자체를 표상하게 되어 깨달음을 얻은 부처라면 누구나 취할 수 있는 부처의 보편적 자세가 된다는 해석도 있다.
우리나라의 불교미술에 이 항마촉지인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7세기 후반 무렵이다. 8세기부터는 그게 널리 유행하게 되고 드디어 석불사(석굴암 창건 당시의 이름) 본존상에서 절정을 이룬다.
모범은 수많은 아류를 낳게 마련이다. 8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많은 통일신라 좌불상 중에는 종교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극치, 정점을 보여주는 세계적 명품인 이 석불사 본존의 형식을 따른 경우가 많다. 항마촉지인 불상이 하나의 계통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범의 모방이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주저스럽다. 이들 통일신라 말기의 항마촉지인 불상에서는 석불사 본존상의 균형잡힌 신체나 조형적인 단순성에서 느껴지는 충만한 정신성과 위엄감이 사라지고 적정한 신체 비례에서 오는 안정감도 줄어든다.
어깨와 무릎의 폭이 좁아져 왜소한 느낌을 주게 되며, 옷주름은 투박해지고 조밀하게 표현되어 불상의 몸매와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예를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흐름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지간히 석불사 본존불의 당당한 조형감을 닮고 있는 것이 청량사 석조여래좌상이다.
항마촉지인 불상도 세부를 살핀다면 다양한 변화를 보이지만, 정통 계열에 속하는 것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머리카락은 민무늬의 소발보다는 대개 곱슬곱슬 말린 나발(螺髮)로 표현된다는 점,
둘째 법의는 양쪽 어깨를 덮는 통견 형식이 아니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 걸치는 편단우견(扁袒右肩) 형식으로 흔히 나타낸다는 점,
셋째 두 다리 위에 걸쳐진 옷자락이 가운데로 모이며 흘러내려 다리 밑 대좌 위에서 부채꼴 모습으로 마무리된다는 점 따위가 그것이다.
청량사 불상은 이런 특징들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석굴암 본존의 충실한 후계자인 셈이다.
그러나 정수리의 육계가 현저하게 낮아진다든지 어깨에서 가슴으로 흘러내리는 옷자락이나 두 다리 위의 옷주름이 조금 번잡해지는 데서 벌써 석굴암 본존상과는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뿐 아니라 이마는 좁고 굳게 다문 입은 작아져 온 얼굴에 충만하던 종교적 이상미는 줄어들고 어떤 강한 의지가 더 크게 드러난다.
더욱 거슬리는 것은 손이다. 땅을 가리키는 오른손은 마치 고무장갑처럼 느껴지는데, 다른 부분을 다듬은 솜씨와 너무 동떨어져 한 장인의 솜씨인지 의아스러울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상을 석굴암 본존상과 비교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모르긴 해도 그것은 두 어깨 때문일 듯하다. 부드러우면서도 위엄과 당당함을 그대로 간직한 두 어깨는 그 밖의 불상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울 듯싶다.
목에서 시작하여 어깨를 지나 팔과 가슴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청량사 불상에서 조형적으로 가장 성공한 곳이 아닐까 한다.
요컨대 여러 가지 결함이 눈에 띄지만 청량사 불상은 석굴암 본존상 계통을 잇는 많은 불상 가운데 단연 앞자리를 차지할 만한 당당한 불상이다. 높이 2.1m, 무릎 폭 1.33m이며 보물 제265호이다.
불상의 뒤를 받치고 있는 광배는 불상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작은 편이다. 두광만 보더라도 불상의 머리로 꽉차 여간 옹색한 게 아니다.
꼭대기에 앉은 화불이 또렷하고, 좌우로 둘씩 아로새겨진 비천은 천의자락이 위로 한껏 부풀어올라 하늘에서 날아 내리는 모습이 완연하다.
대좌는 많이 쓰이는 연화좌대가 아닌 사각대좌이다. 2단의 받침이 있는 상대석이나 면마다 보살상이 둘씩 새겨진 중대석, 위로부터 차례로 안상과 연잎과 팔부중상이 새겨진 하대석이 모두 네모꼴을 기본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특히 중대석의 보살상들은 찻잔을 들어 부처님께 공양하는 따위의 공양보살상들로서, 좌대에 놓이는 무늬의 소재로는 흔치 않기도 하려니와 새김이 깊어 입체감이 풍부하고 세부마다 표정이 살아 있어 작지만 완성도 높은 조각이다.
<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의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 곳곳에 특이한 의장이 보태진 재미있는 탑이다.
긴 돌을 다듬어 네모진 틀을 짜듯 기단 주위를 둘렀다. 탑이 들어선 자리를 여느 땅과 분리하고 구별하는 구실을 하는데, 다른 탑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모습이다.
버팀기둥은 하층기단에 둘, 상층기단에 하나이다. 전성기 석탑에서 한 시대 정도 뒤진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하층기단 덮개돌 윗면에 도드라진 굄대가 3단으로 되어 있다. 보통은 2단으로 만드는데 좀 다르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가운데가 크고 두꺼우며 아래와 위는 아주 얇아 시늉만 낸 정도다. 상·하층 기단 덮개돌의 윗면은 기와집의 처마처럼 아주 은은한 곡선을 그리며 귀퉁이로 갈수록 솟아올랐다.
일반적으로는 평평하게 처리하거나 주변이 점차 낮아지도록 가볍게 경사를 주게 마련이다. 특히 상층기단 덮개돌의 선이 선명하다. 가운데서는 밋밋하게 흐르다가 네 귀에서 살짝 들고 일어서는 곡선의 태깔이 여간 아니다.
지붕돌과 몸돌의 비례는 썩 좋은 편이 못된다. 지붕돌이 지나치게 넓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붕돌의 처마, 낙수면, 귀마루가 이루는 곡선에 너무 반전이 심해 네 귀가 위로 반짝 들어 보인다. 어딘지 진중하지 못한 모습이다. 그나마 기단이 탑신에 비해 넓었기에 망정이지 하늘로라도 떠오르지 않았을지.
1958년에 탑을 수리한 바 있다. 그때 2층 지붕돌의 아래와 위에 하나씩 사리를 넣었던 구멍이 있음이 밝혀졌다. 이 또한 이 탑의 특색에 든다.
몇 군데 유다른 의장을 제외하곤 비례라든지 線에서는 오히려 다른 탑에 빠지는 편인데도 보는 맛이 그리 나쁘진 않다. 탑 전체에 곱게 앉은 이끼에 긴 세월의 무게가 실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구김살 없이 시원한 매화산의 경관 덕분인지 종내 모르겠다. 높이 4.85m, 보물 제266호이다.
<석등>
석탑과 마찬가지로 석등도 우리나라에서 꽃핀 불교예술품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석등으로 인도(정확히는 네팔)와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각각 2점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에 비해 국내에서는 280여 점이 조사되었으며, 그 가운데 90% 이상이 불교 관계 석등이다. 이 땅에서 꽃핀 불교예술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석등은 겉모습에 따라 대충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팔각석등, 고복형석등, 이형석등이 그것이다.
팔각석등은 석등을 이루는 각 부분의 평면이 팔각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하는데, 석등의 발생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만들어진 우리 석등의 주류이자 전형양식이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선호되었다.
고복형석등은 팔각석등과 기본구조가 같되 화사석을 받치는 간주석(竿柱石)이 마치 고복(鼓腹), 곧 장구의 몸통처럼 생긴 석등을 말한다.
팔각석등의 뒤를 이어 나타나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쳐 유행하였다. 대체로 팔각석등에 비해 규모가 크고 장식적이다.
이형석등은 특이한 의장, 이를테면 동물상이나 인물상 따위가 간주석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석등을 가리킨다. 많지는 않지만 어느 시대에나 등장하고 있다.
청량사 석등은 고복형석등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같은 계열의 석등 가운데 가장 시대가 앞선 것으로 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자태나 세부의 표현이 잘 정제되어 그 아름다움 또한 동일계 석등의 앞자리를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제일 아래 세 장의 돌로 네모지게 짠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팔각의 하대석을 앉혔으며 다시 그 위로 연꽃잎이 아래를 향한 여덟 모 복련석(伏蓮石)을 올려 석등의 하부를 구성하였다.
하대석에는 면마다 안상을 파고 그 안에 도드라진 무늬를 넣었다. 앞과 뒤에는 구름에 떠받쳐진 향로를 새기고 좌우로는 봉오리가 여럿 달린 꽃송이를 하나씩 수놓았으며 나머지 네 칸에는 사자를 한 마리씩 들어앉혔다.
무늬마다 조신한 솜씨가 담겼다. 복련석에는 귀마다 얇고 큼지막한 연잎을 겹으로 깔았는데, 연잎 끝에는 작은 귀꽃이 돋았다.
복련석 위로는 간주석이 올라서는 간석받침, 석등의 허리가 되는 간주석, 화사석을 떠받치는 상대석을 차례로 포개 올렸다. 각 부분이 팔각을 기본으로 함은 물론이다.
안으로 휘어진 굽받침을 가진 간석받침의 윗면에는 24장의 연잎을 자잘하게 새겼고, 예의 장구 몸통을 닮은 간주석에는 중앙에 사방으로 꽃이 수놓인 띠를 두른 다음 그 아래위로 갖은 꽃무늬를 가득 아로새겼으며, 상대석에는 위를 향한 연잎 여덟 장을 깊게 새김질했다.
간석받침이 든든하고 간석 또한 굵기나 길이가 알맞아 안정감이 있다.
석등의 얼굴이랄 수 있는 화사석도 팔각을 유지한다. 네 방향으로 화창을 뚫어 불빛이 비치도록 했고, 남은 네 면에는 사천왕상을 하나씩 돋을 새김했다. 사천왕은 모두 바위에 올라선 모습이다. 이른바 암좌(岩座)의 사천왕인데, 자세가 썩 유연한 편은 못된다.
모자처럼 화사석 위를 덮고 있는 지붕돌 또한 팔각임에는 변함없다. 밑면에는 낙숫물이 끊어지도록 턱을 지워 주위로 돌리고 그 안쪽 화사석과 맞물리는 곳에는 받침을 마련하였다.
처마의 아래는 반듯한 직선이고 위는 곡선을 그어 귀퉁이마다 경쾌하게 솟아오른 모양이 여간 산뜻하지 않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 기능과 아름다움 모두 제구실을 멋지게 해내고 있다. 상륜은 모두 없어진 듯 그 조각으로 보이는 돌이 지붕돌 위에 얹혀 있을 뿐이다.
청량사 석등은 아름답다. 전체적인 비례와 균형에 전혀 빈틈이 없어 완벽에 가깝다. 곳곳에 장식적 요소가 베풀어져 있지만 그게 지나치지 않아 인상은 오히려 깔끔한 쪽이다. 처음 만들 때의 선들이 거의 그대로 살아 있어 명쾌하다. 한마디로 이 석등을 바라보는 맛은 쾌적 그것이다.
가만히 보면 지붕돌의 귀마다 네 개씩, 상대석의 모마다 두 개씩 못구멍이 남아 있다. 작은 풍령(風鈴)들이 그곳에 달려 있었으리라. 이 멋진 석등에 위와 아래로 열여섯 개의 작은 방울이 달려 잘랑거렸을 옛모습을 상상하면 괜시리 가슴이 울렁거린다. 석등 높이 3.4m, 보물 제253호이다.
청량사 삼층석탑과 석등은 법당 앞에서 바라보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 한 느낌이다. 탁트인 앞과 대웅전, 석탑이 절묘한 극락의 세계를 연상케한다.
<매화산 월류봉>
청량사의 뒷산 매화산(천불산)의 월류봉(月留峯), 달이 머무는 봉우리. 퍽 운치 있는 이름이다.
그 옛날 서라벌의 달은 월명(月明)스님의 피리소리에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지만, 월류봉에는 무슨 일로 달님이 머물렀을까?
틀림없이 이름만큼이나 운치 있는 경치에 이끌려 였으리라. 매화산을 천불산이라고 부르는데 동의 안 할 수가 없다. 월류봉을 지나 남산 제1봉까지 가는 데는 수많은 부처님이 계신다. 그래서 千佛山이라 했으리라.
그만큼 매화산 월류봉의 바위봉우리는 빼어나고 그 아랫자락에 점점이 들어찬 늙은 소나무들은 격조가 있다. 이 솔숲과 바위봉우리의 어울림이 있어 비록 새 절일지라도 청량사는 찾는 발걸음을 재촉케 한다.
그리고 맑은 날이면 먼 비슬산(琵瑟山)이 가깝게 다가오는 툭 트인 시계(視界)는 청량사에 오른 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무상의 보너스다.
<매화산 등산>
청량사를 품고 있는 매화산(천불산)은 등산하기에 너무 좋다. 기암괴석과 청아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있는 매우 아름다운 산이다. 청량사를 찾는다면 반드시 월류봉 너머 매화산 정상(남산 제일봉)까지 올라, 정상에 서면 해인사 일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무릉동 입구→매표소→청량사→정상(남산 제일봉)→해인사 관광단지로 내려오는 코스가 가장 대표적인데 7.5㎞로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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