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국 사찰 & 함께 가고 싶은 곳
여행-경남

합천 연호사(煙湖寺)

by phd100 2018. 2. 5.


 



고타소랑과 신라 장병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원찰 합천 연호사는 행정구역상 경남 합천군 합천읍 합천동에 있다.

대야성 아래에 있는 연호사 뒤로는 황우산이 솟아 있으며, 앞으로는 황강이 흐르고 있다.

합천읍에 있는 군청에서 남쪽으로 3㎞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곳에는 고려 충숙왕 8년(1321년)에 중건하여 여려 차례 중수한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 이황, 조식, 송시열의 글이 있는 함벽루가 있다.

합천 팔경 중 제5경으로 절벽을 등지고 푸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며, 앞으로는 푸른 황강이 흐르고 있다.

 

☆ 연호사(烟湖寺).

산을 뒤로하고 누각에 앉으면 유유히 흐르는 황강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으며, 비 오는 날에는 누각 처마에서 황강으로 바로 떨어지는 빗물을 보는 재미도 맛볼 수 있다.

달빛을 받은 합천 황강의 푸름이 절경을 자랑하는 곳에 말없이 강물에 그 모습을 비추고 세상의 온갖 번뇌망상은 흐르는 물에 흘려버리고 부처님의 불법만 고이 지키고 있는 연호사(烟湖寺).

삼국시대 신라의 변방으로 군사 요충지였던 황우산 대야성에서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남쪽 석벽 위에 지어진 연호사는 642년 대야성 싸움에서 죽은 신라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과 사위 김품석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643년 와우 선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알려진 원찰(願刹)이다.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 얘기>

신라 김춘추는 그의 딸 소랑을 사랑하여 대야주의 속현인 고타 지역을 딸에게 식읍으로 준 후 고타소랑이라 일컫고 사위 김품석을 대야주 도독으로 삼아서 40여개의 성과 고을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김품석은 부하 검일의 아내를 취하는 등 민심을 배반하였다. 백제 의자왕이 부여 윤충 장군을 보내어 대야성을 공격할 당시 품석에게 부인을 빼앗긴 검일이 성안에 불을 질러 백제군의 진입을 도왔다.

 

김품석은 백제장군 윤충에게 살려줄 것을 빌었으나 국토와 백성을 파는 이에게 죽음 외에는 다른 선처가 없었다.

 

이미 이 대야성 싸움 이전에 신라가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한강을 빼앗자 백제 성왕이 한강회복을 위해 관산성 전투에 나섰다가 살해당하고 그 목이 베어져 경주 북청의 계단 밑에 묻혔었는데 백제는 이 대야성 싸움에서 사로잡은 고타소랑과 품석의 유골을 사비성의 감옥 안에 묻어 성왕의 복수를 대신했다.

 

이로써 의자왕에 대한 김춘추의 증오는 깊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1911, 한국상고사에 관한 책, 모두 다섯 책이 함께 묶어져 있다. <삼성기 상><삼성기 하><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에 의하면 고구려 연개소문은 "세나라가 연합하여 중국의 장안을 공격해 중원 땅을 함께 다스리자"고 제의하였으나 김춘추는 이를 거부하였다. 김춘추에게는 백제 멸망이 먼저였다.

 

이후 648년 진덕여왕 2년에 김유신은 대야성 공격에 성공하여 고타소랑과 김품석의 유골을 찾아왔다.

 

660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 훗날 문무왕이 되는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은 의자왕의 아들 융을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밷으며 꾸짖기를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이 묻은 적이 있었다.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원래 이 대야주는 임나가라(任那加羅)의 땅.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던 이곳에서 임나가라 백성들의 안위는 누가 지켰을까.

 

 

- 극락전 위에 있는 삼성각. 이곳은 원래 연호사의 큰법당이 있던 자리였으나 극락전이 지어지면서 삼성각으로 바뀌었다.

 

- 극락전의 아미타불도 원래는 합천의 성덕사에 있던 불상이었는데 조선의 훼불정책으로 성덕사가 어려움에 처하자 그곳의 스님이 이곳으로 옮겨서 봉안한 불상이라고 한다.

 

* 연호사 신중탱(煙湖寺 神衆幀)

연호사 신중탱의 색은 붉은 색이 중심이고 금박을 모란과 연꽃, 제석천과 천녀 의복에 일부 사용하였다. 정확한 도상, 좌우대칭의 엄격한 구성, 맑고 균일한 색채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연호사 신중탱은 조선시대 제석천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형식과 내용에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조선시대 신중탱은 처음에는 제석천도와 위태천도, 이렇게 두 폭으로 그려지다 이후 합쳐지게 되었다. 연호사 신중탱은 두 폭으로 그려진 신중탱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두 폭은 1770년(영조 46) 해인사 제석천도와 위태천도를 모본으로 하였다. 1770년(영조 46) 작품과 1792년(정조 16) 작품 모두 임평이 우두머리로 참여하였다.

 


'여행-경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합천 내천 못재 전두환생가  (0) 2018.03.26
합천 함벽루(涵碧樓)  (0) 2018.02.06
합천 법연사(法然寺)  (0) 2018.01.29
진주 금호지(琴湖池)  (0) 2018.01.22
합천 청량사(淸凉寺)  (0) 2018.01.08